사법 리스크 발목 잡힌 6년지체된 반도체 투자 추진력 '절실'이례적 '6월 인사 및 개편' 통해 조직 쇄신글로벌 현장 경영 개시 이 부회장... 'M&A·투자' 본격화
  • ▲ 지난달 20일 오후 경기 삼성반도체 평택캠퍼스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을 영접하며 기념촬영을 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상윤 기자
    ▲ 지난달 20일 오후 경기 삼성반도체 평택캠퍼스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을 영접하며 기념촬영을 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상윤 기자
    삼성전자가 빠르게 판도가 바뀌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지난 6년 간 사법 리스크 등으로 굵직한 전략 추진이 어려워 경쟁사 대비 시간이 지체됐지만 올 하반기부터는 전열을 가다듬고 이재용 부회장이 글로벌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하는 현장 경영에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3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오는 7일부터 18일까지 네덜란드로 출장에 나선다.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는 EUV(극자외선노광장비) 기업인 ASML을 방문해 장비 공급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다.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을 위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재판의 다음 일정에 불출석할 것을 요청하면서 이 같은 일정을 공개했다.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을 통해 미세공정에 필수로 꼽히는 EUV 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네덜란드 ASML 측에 더 많은 장비를 요청하려는 것으로 예측된다. EUV 공정은 삼성이 메모리 분야에서 지금과 같이 초격차를 유지하는데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파운드리 사업에서 1위 대만 TSMC를 따라잡기 위해서 결정적인 부분으로 꼽힌다.

    그동안에도 이 부회장은 ASML과의 협력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주기적으로 네덜란드 본사를 찾아 경영진들과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이 부회장은 지난 2020년 10월에도 네덜란드 ASML 본사를 방문해 7나노 이하 EUV 장비 공급 계획과 운영 기술 고도화 방안 마련 등을 두고 ASML 측과 의견을 나눴다.

    일각에서는 삼성이 현재 대규모 인수·합병(M&A)을 추진하고 있다고 선언한만큼 이와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재판에 불출석하면서까지 네덜란드로 직접 날아가는 것이라는 추측도 내놨다. 삼성이 인수할 가능성이 높은 매물로 꼽히는 차량용 반도체 기업인 'NXP'도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 부회장이 밝힌 네덜란드 출장 목적은 ASML 방문이지만 빅딜 추진을 위한 작업에도 동시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달 출장을 시작으로 이 부회장이 본격적으로 글로벌 네트워크 점검 등을 중심에 두고 현장 경영 행보에 다시 나설 것이라는 의견에도 힘이 실린다. 지난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과 동시에 삼성전자 평택 사업장 방문에 이 부회장이 중심 역할을 한 바 있고 이에 화답하기 위해 조만간 열릴 미국 테일러시 삼성 파운드리 신공장 준공식에 이 부회장이 참석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다음달에는 미국 아이다호주의 휴양지 선 밸리에서 열리는 '앨런&코 콘퍼런스'에 이 부회장이 참석해 오랜만에 국제 비즈니스 행사 무대에 설 것이라는 기대감도 크다. 이 행사에는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타임워너, 뉴스코퍼레이션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 거물들과 미디어 등 초청된 인사만 참석이 가능해 이 부회장이 과거 1년 중 가장 신경쓰는 행사라고 밝혔을만큼 경영 복귀의 상징성을 갖고 참석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 ▲ 삼성전자 미국 테일러 파운드리 생산공장 부지 구성도 ⓒ삼성전자
    ▲ 삼성전자 미국 테일러 파운드리 생산공장 부지 구성도 ⓒ삼성전자
    삼성이 반도체 분야에서 향후 5년 간 450조 원의 역대급 투자를 예고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길 반도체 주요 조직 수장을 교체하는 작업도 진행해 눈길을 끈다. 삼성은 이례적으로 6월 인사 및 조직 개편을 진행해 지난 2일자로 반도체 사업 부문 주요 임원 20여 명을 교체했다. 이 중 조직 수장을 맡고 있는 부사장급 인원만 1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정규 인사시즌이 아닌 때에 이뤄진 인사 치곤 꽤나 큰 물갈이가 이뤄졌다는 평가다.

    인사 쇄신의 칼 끝은 특히 삼성이 빨리 선발 주자를 따라잡아야 하는 파운드리 분야에 집중됐다. 제조기술센터장이 남석우 부사장으로 교체됐다. 제조기술센터는 파운드리 뿐만 아니라 반도체 사업에 명운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핵심 조직으로, 이번에 파운드리 제조기술센터 수장이 바뀌면서 삼성이 무엇보다 파운드리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쇄신을 추구할 것이란 신호탄을 쐈다는 해석이 나온다.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있어서도 강력한 변화의 필요성을 보여줬다. 이번에 반도체연구소장을 교체하는 강수를 써서 기술 초격차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메모리 사업부에서 플래시개발실장을 맡았던 송재혁 부사장이 반도체연구소 키를 잡았다.

    일각에선 삼성이 앞서 반도체 사업을 이끌었던 김기남 삼성종합기술원 회장 시절의 색체를 빼는데 초점을 두고 완전히 초심자의 마음으로 파운드리 등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글로벌 톱 자리에 도전해야 한다는 취지로 전격적인 인사와 조직 개편이 이뤄진 것이라는 평도 하고 있다. 김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이끌던 때에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압도적인 글로벌 1위로 확실히 자리매김했지만 후발주자로 선두를 쫓아야 하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선 과거와는 다른 접근법이 절실하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6년 간 지체됐던 삼성의 차세대 반도체 사업 투자에 큰 틀이 마련되면서 하반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속도전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코로나19기간 동안 공급 부족 사태로 반도체 패권주의 수준으로 경쟁이 더 치열해진 까닭에 삼성이 그동안 미뤄왔던 대규모 설비 투자와 M&A, 연구·개발(R&D)에 과감한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