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럽 이어 '일본' 합류기시다 총리, 특별지원… "日 새 반도체 투자처"美 칩스법 520억弗 패권주의 시동… 日·유럽과 동맹유럽판 칩스법 60조 지원… 뒤늦은 韓 육성책 기대감 낮아
  • IBM·일본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 2나노 반도체 기술 제휴 ⓒ연합뉴스
    ▲ IBM·일본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 2나노 반도체 기술 제휴 ⓒ연합뉴스
    반도체가 국가 간 패권 경쟁 핵심으로 자리잡은 가운데 일본도 정부 주도로 반도체 산업을 집중 육성하겠다고 선언해 눈길을 끈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며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유럽도 반도체 생산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각가지 혜택을 내놓고 있는데 우리 정부의 대처가 너무 늦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1일 반도체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지난 7일(현지시간)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 회의를 열고 반도체 산업 분야에 특별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선 반도체 외에도 배터리와 바이오, 데이터센터 산업을 전략 분야로 선정했다.

    일본은 이렇게 4가지 전략 분야 중에서도 반도체를 최우선 순위로 꼽았다. 미래 성장 산업에 필수적인 네 분야 중에서도 반도체는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수요 증가가 예상될 뿐만 아니라 이미 글로벌 곳곳에서 반도체 생산 기지와 관련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일본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아낌 없는 지원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미 선진국들이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부품 공급망을 이전하려는 상황이고 그런 가운데 일본이 새로운 투자처로 부상하고 있다"며 기업들에 러브콜을 보냈다.

    일본은 반도체 산업 부활을 위해 미국, 유럽과의 협력을 공고히 하겠다는 입장도 명확히 했다. 일본이 반도체 경쟁력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선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방국가와의 협력이 필수라는 점을 강조했다.

    현재 미국은 일본을 반도체 동맹국으로 삼고 슈퍼컴퓨터나 AI에 활용되는 차세대 반도체 생산을 위한 연구·개발에서 협력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미국 기업인 IBM은 일본 주요 기업들이 합작으로 만든 반도체 회사 '라피더스'에 기술 협조를 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유럽 최대 반도체 연구소인 IMEC도 라피더스와 기술 협력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 8월 설립된 라피더스는 일본 반도체 산업을 부활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도요타 자동차, 소니, 키옥시아, 덴소 등 일본 주요 대기업 8곳이 출자해 힘을 합친데다 일본 정부도 총 3300억 엔(약 3조 700억 원) 규모 자금 지원을 약속했을 정도다.

    미국이나 유럽은 이미 반도체 자급률을 높이기 위한 중장기 프로젝트를 가동한지 오래다. 특히 미국은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만큼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에 적극적이다. 자국 내에 글로벌 유수의 반도체 기업들의 생산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반도체 지원법(이하 칩스법)'을 기반으로 520억 달러(약 67조 원) 규모의 보조금을 내걸었다.

    하지만 보조금을 받기 위해선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정부가 정한 규정을 따라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보조금을 받는 대신 미국 생산공장에서 나온 초과이익을 미국 측과 공유해야 하고 첨단 기술이나 생산설비 등을 필요할 경우 공개해야 하는 등 이른바 독소조항이 전제돼 논란이 여전하다.

    게다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이 중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별도의 '가드레일 조항'을 두고 중국 추가 투자를 제한하겠다고 밝혀 이를 두고 한국과 미국 정부의 이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결국 미국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반도체 기업과 관련 국가들을 이용하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것이다.

    유럽도 유럽판 칩스법을 가동해 반도체 기업 유치에 돌입했다. 지난 4월 유럽연합(EU)은 반도체 지원법을 시행키로 하고 오는 2030년까지 430억 유로(약 60조 원)을 반도체 관련 공공 또는 민간 기업에 투자한다. 전기차나 AI 등으로 반도체 수요는 늘고 있는데 아시아 국가들의 공급망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현재 9%에 불과한 반도체 공급망 점유율 오는 2030년 20%까지 확대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풀어 기업 유치에 나섰다.

    아직까진 유럽 칩스법 수혜를 두고 기업들이 계산기를 두드려보는 상황이다. 그 중에서도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가 독일 드레스덴에 공장을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EU 투자에 물꼬를 틀 것으로 기대된다. 프랑스에는 미국 최대 파운드리사인 글로벌파운드리가 차량용 반도체 기업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 합작으로 공장을 설립하는데, 프랑스 정부가 여기에 29억 유로(약 4조 원)를 지원키로 하며 EU 국가들 사이에서도 투자 유치 경쟁 불이 붙었다는 평가다.

    국내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절반 이상을 점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기업을 기반으로 반도체 산업이 국가 핵심산업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반도체 산업이 국가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 대비 지원과 관심은 여전히 부족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뒤따른다. 특히 최근 글로벌 반도체 패권주의 구조에서 정부가 나서지 않고 개별 기업들이 해외 투자를 추진하게 되면 실익을 보기 어려울 수 있어 이전보다 정부의 역할과 지원이 절실해졌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8일 반도체 국가전략회의를 통해 반도체 산업 육성 중요성을 강조하며 시급한 현안 중심으로 토론을 나눴다. 여기서 나온 내용들을 토대로 기존 반도체 산업 전략을 보완해 지원 정책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반도체업계와 학계, 투자업계에선 여전히 정부의 반도체 산업 지원 정책에 대해 불신의 눈초리가 강한 상황이다. 다른 국가들 대비 반도체 산업 의존도가 높은 국내 사정에 비해 대책 마련이 너무 늦었고 차별점이나 이점도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는게 공통적인 의견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올들어 반도체업황이 꺾이면서야 비로소 반도체 산업에 지원이 절실하다는 점을 체감하고 있는 것 같다"며 "업황에 관계없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꾸준하고 중장기적인 관점의 산업 육성책을 세워서 빠르게 시행할 필요성이 크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