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은총재 "'중국 특수' 누리던 시대 끝났다"'황금알 낳는 시장' 옛말… 미중 압박 속 셈법 복잡"높은 중국 제조업 의존… 서비스업 등 높은 단계 산업 육성 시기 놓쳐
  •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4일 제주 해비치호텔&리조트에서 대한상의 주최로 열린 제주포럼에서 강연하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4일 제주 해비치호텔&리조트에서 대한상의 주최로 열린 제주포럼에서 강연하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국내 4대그룹 총수에 이어 통화 당국 수장이 중국 현지 사업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치면서 국내 기업들의 탈중국 고민이 더욱 깊어지게 됐다. 최근 국내 한 대기업이 최악의 상황 등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한 방안 마련에 나서는 등 각종 악재가 겹친 중국 시장을 바라보는 재계의 셈법도 복잡해질 것으로 보인다.

    14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제주 서귀포시 해비치호텔리조트에서 열린 '제 46회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중국 특수'를 누리던 시대는 끝났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한국 경제는 중국이 2001년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이후 큰 폭의 성장을 보인 '중국 특수'에 너무 익숙해 있다"며 "한국 기업들은 중국에 공장을 짓고 제조업을 영위하며 성장했지만 중국에 너무 의존해 서비스업 등 높은 단계의 산업을 육성하는 시기를 넘겨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총재는 대(對)중 무역 구조에 대응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무역 다변화 및 산업 구조 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 총재는 "우리 경제는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해 많은 흑자를 거뒀는데 이제는 중국이 중간재를 생산한다"며 "빠른 속도로 전환되고 있는 산업구조에 맞춰 산업은 물론 각계각층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의 이 같은 발언은 최근 중국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뜻으로 읽힌다. 실제로 중국의 최근 경제는 회복이 더딘데다 미국과의 패권경쟁으로 인해 다국적 기업들의 '황금알 낳는 시장'이라는 지위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중국의 청년 실업률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데다 민간 부문의 투자는 위축됐고, 부동산 시장도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중국 수출도 최악으로 추락했다. 6월 중국 수출액은 2853억달러로 전년동월대비 12.4% 줄었다. 전월과 비교하면 7.5% 감소한 수치로 3년 4개월여 만에 최악의 성적표다. 중국의 월간 수출은 지난 3월(14.8%)과 4월(8.5%) 잠깐 반등했지만 이내 다시 감소세로 전환됐다.

    실제로 지난 5월 수출액은 -7.5%를 기록한데 이어 지난달 감소폭은 크게 확대됐다. 지난달 감소폭은 2020년 1~2월(-17.2%)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수입액도 줄었다. 중국의 수입액은 2147억달러로 6.8% 줄었는데 이는 지난 5월(-4.5%)과 전망치(-6.1%)를 모두 밑돌았다. 이로써 월간 수입은 지난해 10월 -0.7% 이래 8개월째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하게 됐다.

    중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줄줄이 하향 조정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가운데서는 S&P가 올해 중국의 GDP 성장률 예상치를 기존 5.5%에서 5.2%로 하향했고, 골드만삭스(6.0%→5.4%)와 UBS(5.7%→5.2%) 등도 예상치를 낮췄다.

    중국의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고 있는 점도 탈중국을 부추기는 요소다. 과거 중국은 노동집약적 조립·가공산업에 불과했지만 대규모 투자와 정부의 정책 지원에 힘입어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잠재적 경쟁 상대로 돌변했다. 중국의 산업고도화에 따른 조선, 철강, 화학, 디스플레이 등 우리 10대 수출품목들이 점차 중국시장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미국, 유럽, 일본 등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 의존도를 낮추며 다른 국가로 생산거점을 이전하고 있다.

    실제로 애플은 올해부터 맥북 컴퓨터 일부를 베트남에서 생산하기로 했고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최신형 모델 생산거점을 인도로 이전키로 했다. 구글도 픽셀 스마트폰 생산을 중국에서 인도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마이크론도 인도에 반도체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 기업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에서는 대중국 공급망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생산거점을 중국으로부터 제3국이나 일본으로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 2010년대 초부터 중국 진출 일본 기업 수는 1만 개를 넘어서는 등 일본 기업의 중국 진출이 활발했지만 코로나19가 발발한 2020년을 기점으로 감소세로 전환됐다. 

    한국 기업들도 탈중국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행의 '2022년 지역별·통화별 국제투자대조표'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준비자산을 제외한 한국 대외금융자산(거주자 대외투자) 잔액은 1조7456억 달러로 2021년 말보다 162억 달러 감소했다. 이는 관련 통계가 편제되기 시작한 2002년 이후 처음으로 감소한 것이다.

    지역별로는 미국에 대한 투자가 6833억 달러(비중 39.1%)로 가장 많았고, 이어 동남아(2448억 달러, 14%), EU(2306억 달러, 13.2%) 등의 순이었다. 중국 투자 잔액은 1년 사이 146억 달러가 줄었는데, 2008년(-103억 달러)을 넘어선 역대 최대 감소폭이다.

    지난해 중국에 대한 경상수지는 77억8000만 달러 적자로 돌아섰다. 대중 경상수지가 적자를 낸 것은 2001년(7억6000만 달러 적자) 이후 21년 만에 처음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대중 수출 기업 300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대중 수출 부진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업의 84.3%는 올해 안에 대중 수출 회복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 봤다.

    오히려 중국의 빠른 기술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응답도 나왔다. '기업들이 체감하는 중국 기업과의 기술 경쟁력 격차'에 대해 '비슷한 수준'(36.6%)이거나 '뒤처진다'(3.7%)고 답한 기업은 전체의 40.3%로, 거의 절반에 가까운 기업들이 중국의 추격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따라 국내 기업들은 '포스트 차이나' 발굴에 적극 나서고 있다.

    SK그룹은 현재 핵심 성장동력인 배터리·바이오·반도체와 관련 미국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배터리 사업은 포드와 합작해 현지 공장 확장에 나서고 있으며 반도체 사업에서는 연구개발 협력과 메모리반도체 첨단 패키징 제조시설 확보 등 반도체 생태계 강화에 무려 150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을 세워놨다.

    베트남에 대한 투자도 늘릴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은 최 회장이 공들여 사업을 추진하는 주요 거점 중 한 곳이다. 

    이와 관련 SK㈜ 등은 지난 2018년 총 5억달러를 출자해 SK동남아투자법인을 설립했고 올해 베트남 최대 식음료·유통기업 마산그룹의 유통전문 자회사 빈커머스 지분 16.3%를 매입했다. 또 마산그룹의 유통 지주사 크라운엑스에도 투자했다.

    삼성은 한국과 미국, 동남아 등 생산 거점 다변화에 나선 상황이다. 삼성은 경기도 화성과 용인에 이어 평택에도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가 조성되는데, 삼성 평택캠퍼스가 그 구심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삼성은 또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 유치로 국내와 더불어 테일러 파운드리 신공장에 170억 달러(약 22조 2000억 원)를 투입한 상태다. 이 신공장이 가동되면 지난 2021년 대비 오는 2027년 테일러 지역에 두고 있는 반도체 클린룸 규모만 7.3배가 될 것으로 삼성은 예상하고 있다.

    또한 스마트폰이나 가전은 생산기지를 동남아로 옮겨 안정화에 성공했다. 삼성은 지난 2019년 중국 톈진과 후이저우에 있던 스마트폰 공장을 모두 철수하고 인도 노이다에 스마트폰 생산 거점을 뒀다. 베트남 박닌과 타이응우옌에는 스마트폰 생산기지를 두고 전체 스마트폰의 절반을 만들고 있다.

    LG그룹은 1995년 LG전자가 베트남에 첫 진출한 이후 현재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LG화학 등이 베트남 내 7개 생산법인을 포함해 총 12개 법인을 운영 중이다. 지난해 생산 규모는 120억달러 수준으로 성장해 베트남 국내총생산(GDP)의 약 3%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하이퐁 클러스터는 전자계열 3개사의 핵심 생산 거점으로, 지난해 기준 글로벌 세트·부품 생산액의 15%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