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분쟁 불가피DLF와 사모펀드 사태 이후 두번째"당국이 판매 허용… 책임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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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관련 대규모 금융분쟁이 시작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금융감독원이 불완전판매 배상기준안 검토에 나선다. 금융당국은 해당 상품을 대거 판매한 은행권에 본격적으로 책임을 묻고 있지만 소비자들과 학계에선 이 같은 고위험 상품에 대한 제도적·행정적 미비점을 들어 당국 역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3일 금융당국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H지수 ELS 불완전판매에 대한 배상비율 기준안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내년 초부터 H지수 ELS 만기가 도래하고 손실 확정이 본격화될 경우 신속한 분쟁조정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사전 준비에 나선 것이다. 금감원에서 대표 민원 사례를 대상으로 기준안을 만들면 이를 근거로 금융사들이 자율 조정하는 방식으로 배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이 금융상품 분쟁조정을 위한 배상기준안을 적용하는 것은 앞서 파생결합펀드(DLF)와 사모펀드 사태 이후 두번째다. 사모펀드 사태 때처럼 분쟁 규모가 클 것이라는 전망 아래 또 한번 배상기준안 마련에 당국이 나서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1일 기준 금감원에 접수된 분쟁조정 신청 건수는 42건으로 일반 민원까지 포함하면 규모는 더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앞선 사모펀드 사태 때와 달리 이번 은행권 H지수 ELS 사태는 고령 투자자와 재가입자가 많다는 점이 배상비율을 정하는데 관건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고위험·고난도 상품이 다른 곳도 아닌 은행 창구에서 고령자들에게 특정 시기에 몰려서 판매됐다는 것만으로도 적합성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의구심을 품어볼 수 있다"면서 "설명 여부를 떠나서 권유 자체가 적정했는지 검토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DLF 배상비율 기준안에 따르면 만 65세 이상에는 5%포인트(p), 80세 이상은 10%p가 가산돼 배상비율이 확정됐다. 금융투자상품 거래 경험이 많거나 거래금액이 큰 경우엔 은행의 책임 감경 사유가 된다.

    하지만 사모펀드와 달리 ELS는 공모형이고 대중적으로 오랜기간 판매된 상품이라는 점에서 불완전판매 입증이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번 ELS 가입자 상당수가 연달아 가입을 이어온 재투자자라는 점이 중요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더불어 은행에서 ELS 같은 고위험 상품을 대규모로 취급하는 것이 적절한지 자체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원금 손실 우려가 큰 펀드나 파생상품 자체를 판매하는 데 제한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미 KB국민은행 등을 포함한 5대 시중은행은 H지수 연계 ELS 판매가 모두 중단된 상태다.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 공방도 가열되고 있다. 금융당국은 판매자인 은행권을 향해 '무지성 판매'라는 표현으로 강한 비판을 쏟아내며 화살을 돌리고 있지만 금융소비자들과 학계 등에선 은행권 만큼이나 이를 제대로 제재하지 못한 금융당국이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ELS 같은 고난도 공모펀드의 경우 지난 DLF 사태 이후에도 은행 판매가 허용됐던 상품이라는 점에서 결국은 금융당국이 이후 관리나 점검이 소홀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은행권은 당시 대대적으로 발표한 '고위험 금융상품 투자자보호 강화를 위한 종합 개선 방안'에서 '고난도 금융투자상품'으로 규정된 ELS를 판매하면서 녹취나 숙려기간, 핵심설명서 교부 등을 거쳐 판매했는데 만기에 앞서부터 금융당국이 은행권을 지적하고 나서면서 가입자들이 더 동요하게 됐다는 반응도 있다. 당시에는 고난도 사모펀드가 문제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고난도 공모펀드는 판매 허용 대상으로 큰 문제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지난 2021년 3월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으로 은행 창구에서 거래 시간이 크게 늘어 불만이 커지자 적합성 평가 간소화를 일정 수준 허용한 게 결국 당국이었다는 점도 거론된다. H지수 ELS 판매 과정에서 인공지능(AI) 음성 안내를 통한 설명과 녹취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은행권에서는 AI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한 설명의무는 금융소비자보호법에서 정한 내용이기도 하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홍콩 H지수 ELS가 도마 위에 오르면서 발행량은 올해 급감하는 추세다. 대신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일본 닛케이225 평균주가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ELS가 각광받는 분위기다.

    한국 예탁결제원은 지난달 홍콩 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편입하는 ELS 발행 규모가 석달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연임에 대한 우려로 '탈중국' 분위기가 두드러지면서 H지수 ELS 발행량도 급감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월별 발행 금액이 4000억 원대로 떨어지며 매달 30% 넘게 감소세를 이었다.

    대신 주목받는 것은 닛케이 지수 연계 ELS다. 지난해 연말을 기점으로 홍콩 H지수 연계 ELS와 발행금액이 역전됐고 지난달 기준 H지수 ELS의 3.5배에 달하는 1조 4000억 원 규모가 발행됐다. 일본 증시가 지난 1990년 8월 이후 올해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자 닛케이 지수 연계 상품으로 투자가 확대되는 경향을 나타내는 모양새다.

    다만 H지수 연계 ELS가 지금처럼 문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증시가 오를 때 관련 ELS에 투자하는 것은 리스크가 커질 수 있는 투자방식이라 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