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정기상여금과 중식비, 통상임금에 포함” 판결사측 “신의칙 인정되지 않아 유감, 적자전환 불가피”부품업계, 1~3차 협력사 현금흐름 악화로 확산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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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년을 끌어온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이 결국 재앙이 됐다. 법원은 사측의 최근 경영상태를 감안할 때 '신의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 근로자들에게 지급된 정기상여금 및 중식비를 '통상임금'으로 인정했다. 법원이 노조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측은 약 1조원의 부담을 떠안게 됐다. 당장 3분기부터 적자전환이 예상된다.


    기아차는 중국의 사드 보복 여파와 노조의 파업 엄포, 최저임금 인상, 법인세 인상, 미국의 FTA 개정 요구 등 안팎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기에 인건비 추가 부담까지 생기면서 이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중대 기로에 섰다.


    특히 이번 판결로 자동차 및 부품산업을 비롯 제조업 전반에 걸쳐 통상임금 소송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돼 사회적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재계는 인건비 상승에 따른 경쟁력 약화로 자동차 생태계는 물론 산업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부장판사 권혁중)는 31일 기아차 노조 2만7424명이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노조 측에서 제기한 정기상여금과 중식비, 일비 등의 통상임금 적용 여부와 관련해 정기상여금과 중식비가 이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사측이 노조 측에 지급해야 할 금액은 4223억원이다. 지난 2011년 노조 측에서 사측에 청구한 임금 차액인 6588억원과 지연이자 4338억원 등 총 1조926억원 중 38.7%에 해당하는 4223억원을 인정한 셈이다.


    기아차가 실제로 부담할 잠정금액은 1조원 내외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소송 판결액을 기아차 전체 인원으로 확대 적용 시 2011년 11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3년분과 소송 제기 기간에 포함되지 않은 2014년 11월부터 2017년 현재까지 2년 10개월분 등 총 5년10개월분을 합산하고 집단소송 판단액 4223억원을 더할 경우 1조원 내외의 재정부담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재판부는 이번 소송의 핵심이었던 '신의칙' 적용 여부에 대해서는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기아차는 지난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상당한 당기순이익을 거뒀으며, 당기순손실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측이 주장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판단할 정확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며 "중국 사드 등의 영향으로 인한 경영상의 손실도 정확한 근거를 사측에서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근로자들이 마땅하게 받아야 하는 임금을 이제서야 지급하면서 회사 경영상의 중대 위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로 기아차는 최대 위기에 직면하게 됐고, 법원의 결정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기아차 측은 "청구액 대비 부담액이 일부 감액되긴 했지만 현 경영 상황은 판결 금액 자체도 감내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며 "특히 신의칙이 인정되지 않은 점은 매우 유감이며, 회사 경영상황에 대한 판단도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기아차의 상반기 영업이익은 786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4% 감소했고, 사드 보복 여파로 전체 실적의 한 축을 담당했던 중국 판매량은 전년 대비 약 55% 줄었다.


    특히 올 2분기 기아차의 영업이익은 4040억원으로 전년 대비 47.6% 줄어든 상태다. 현 상태가 이어진다면 3분기 적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적자전환에 따른 지속가능한 성장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 자동차업계, 현재와 미래의 경쟁력에 '치명타'

    비단 기아차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번 판결은 국내 완성차 업계에도 큰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는 이번 판결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향후 국내 자동차산업에 미칠 영향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우려했다.


    자동차산업협회 측은 "그간 통상임금에 대한 노사합의와 사회적 관례, 정부의 행정지침, 기아차와 국내 자동차산업 생태계에 미치는 막대한 부정적 영향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판결에 유감을 표한다"며 "정부 지침을 준수하고 노사간에 성실한 임금협상을 임해 왔을 뿐 아니라 상여금 지급 규정을 수십년 전부터 근로자들에게 유리하게 운영해온 기업이 오히려 통상임금 부담 판정을 받게 돼 억울하다"라고 입장을 전했다.


    통상임금 판결에 따른 막대한 임금 부담은 회사의 현재와 미래 경쟁력에 치명타가 될 것이란 설명이다.


    또 자동차산업협회 측은 "국내 생산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기아차의 통상임금 조건과 경영 위기가 타 완성차업체 및 협력업체로 전이돼 전체 자동차산업의 위기가 가중될 수 있다"며 "통상임금 문제의 지속적인 법적 분쟁에 따른 경영의 불확실성과 노사간 대립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상임금을 1임금산정 기간에 지급되는 임금으로 규정한 현행 고용노동부의 행정지침대로 법제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국내 자동차업계는 내수·수출·생산 등 모든 부문에서 역성장세를 기록하며 위기에 빠져 있다. 자동차산업협회 등에 따르면 상반기 국내 자동차 수출량은 132만1390대로 지난 2009년 93만8837대 이후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내수 판매는 전년 대비 4% 감소한 상태이며, 중국 사드 여파로 현지 판매량이 전년 대비 40% 이상 급감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했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재판부도 어느 한쪽의 편을 100% 들어주기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라며 "기아차 뿐만 아니라 다른 사례로 전파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 자동차업계는 한국지엠 철수 가능성을 비롯해 한미 FTA 재협상, 노조 파업, 고비용 문제 등 다양한 악재로 위기에 직면한 상태다. 이번 소송 결과는 타 산업으로까지 파급 효과가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 부품업계, 기아차 유동성 위기 시 '현금흐름 악화' 예상

    자동차 부품업계도 통상임금 여파로 자재, 부품 공급 등 자동차산업 생태계 전반에 미칠 영향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기아차를 비롯한 완성차 업체가 적자 전환할 경우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맞을 수 있고, 이는 협력부품업체 대금 결제 등 현금 흐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다. 1~3차 협력사까지 줄줄이 그 파급력이 전해질 수 있어 자동차산업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기아차는 실제 부담 잠정금액인 1조원을 즉시 충당금으로 적립해야 하는 상황이다. 기아차의 영업이익이 지난 2분기 4040억원인 것을 감안하면 3분기 적자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기아차의 1차 협력부품업체는 334개사이며, 2~3차 협력사까지 합하면 3000여개다. 지난해 기아차의 국내 매출액 31조6419억원 중 1차 협력사에 지급된 부품 납품액은 53%인 16조7721억원에 이른다.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부품) 관계자는 "이번에 신의칙이 적용될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노조 측 일부 승소 판결이 나와서 곤란한 상황"이라며 "같은 입장에 있는 부품업계 근로자들도 줄소송으로 가지 않을까 염려된다"라고 말했다.


    ◇ 재계, 산업경쟁력 약화 우려 및 상급심에서 심도있게 판단하길 기대


    재계에서도 이번 기아차 판결을 두고 낙담하는 분위기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는 “사드 보복, 멕시코 등 후발 경쟁국들의 거센 추격, 한미FTA 개정 가능성 등으로 우리 자동차 산업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번 판결로 기업들이 예측치 못한 추가 비용까지 부담하게 돼 산업경쟁력 약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들이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매진할 수 있도록 향후에는 치열한 글로벌 경쟁, 투자애로 등의 요인도 종합적으로 고려해주길 기대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신의칙 관련 조속한 입법이 필요함을 언급했다. 배 전무는 “과도한 인건비 추가부담 등 기업경영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통상임금 정의 규정을 입법화하고, 신의칙 세부지침을 조속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대한상공회의소도 “대법원이 제시한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상급심에서는 보다 심도있게 고려해 판단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논평했다. 
     
    통상임금 소송은 노사 당사자가 합의해온 임금관행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노사간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대한상의 측은 “향후 노사간 소모적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는 통상임금의 개념과 범위를 명확하게 정하는 입법조치를 조속히 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경총도 기업에게만 일방적으로 손해를 떠안으라는 법원의 판결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면서 신의칙을 적용하지 않은 점은 기존의 노사간 약속을 뒤집은 노조의 주장은 받아들여 주면서, 합의를 신뢰하고 준수한 기업은 일방적인 부담과 손해를 감수하라는 것으로 허탈감을 금할 수 없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회사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이번 판결로 최대 3조원이 넘는 우발채무를 지게 돼 적자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취지에 따른 것인지 의문스럽다는 얘기다.
     
    경총 측은 “이번 판결로 부담이 해당 기업과 협력관계를 맺은 수많은 중소기업에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 제조업 경쟁력에 미칠 여파가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된다”며 크게 우려감을 드러냈다.
     
    대기업‧공공부문 근로자에게 신의칙을 엄격히 적용하는 법원의 태도는 통상임금 논쟁의 최종 수혜자를 ‘좋은 일자리’를 가진 정규직 근로자로 귀결시켜 노동시장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고, 이는 취약근로자 보호를 중시하는 최근 정책과도 어긋난다고 성토했다.
     
    경총 측은 “현재 대법원에 통상임금 신의칙과 관련한 사건이 전원합의체에 회부된 만큼, 대법원이 신의칙에 대한 예측가능한 합리적 판단기준을 신속히 제시해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 기아차 노조 “노동자들의 권리가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중요한 전기”


    반면, 기아차 노조 측은 나홀로 반색하는 분위기다. 이번 승리를 자축하고 있는 것이다.


    노조 측 변호인단 대표 김기덕 변호사는 "재판부에서 이번에 인정해준 금액을 보면 사측 주장을 많이 인정하지 않고 저희 측 주장을 많이 받아들였다"며 "이번 판결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권리가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중요한 전기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2014년부터 2차 소송을 담당해온 노조 측 백하명 변호사는 "신의칙 적용을 제외한 부분은 만족스럽지만 세세한 부분, 인정 안 된 부분도 많이 있다"며 "판결문을 정확히 확인해보고 항소 여부를 검토해야겠지만 일단 최소한 인정받아야 할 것들은 인정 받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다소 아쉬운 점은 있지만 많이 실망스러운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노조 측 송영섭 변호사는 "오늘 1심 판결이 나왔기 때문에 앞으로는 전향적으로 대화에 임할 것을 촉구한다"며 "노사가 원만하게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한편, 기아차 생산직 근로자들은 지난 2011년 연 700%에 달하는 정기상여금 및 각종 수당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