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본격적인 3세시대… "기업은 사람" "임직원 의견 경청하라" 지혜 되새겨야
  •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이 30일 구속됐다.

     

    그의 구속은 재벌가 딸로는 첫 사례다. 특히 그동안 재벌 3세들 가운데 신규 사업을 펼치다가, 또는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편법적으로 주식을 사모으는 등 경영적인 차원에서 구속된 사례는 있었지만 ‘갑질’이라는 오너 윤리적 차원의 법적 조치는 이번이 처음이다.

     

    더욱이 사태 초기에 수습할 수 있었지만, 책임을 직원에게 전가하고, 증인까지 나타났는데도 폭행을 부인하고, 또한 상황이 확대되자 여론에 이끌려 뒤늦게 하나씩 카드를 내놓는 등 안일한 대응이 결국 구속이라는 결말을 초래했다.

     

    재벌가의 재력으로 변호사를 고용해 사건을 법정 공방으로 끌고 갈 수는 있겠지만, 회사 직원들을, 국민을, 검찰과 재판부를, 법을 매수할 수는 없었다.

     

    이번 사건은 최근 재벌기업 오너 2세들이 고령화로 3~4세들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시점에서 발생, 자칫 이들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인 시각이 확산되지 않을지 우려되고 있다.

     

    특히 ‘넛게이트’(Nutgate), ‘넛스캔들’(Nut scandal), ‘넛레이지’(Nut rage) 등타이틀을 달고 세계 기업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으로 글로벌 이슈화 하면서 한국 기업의 젊은 오너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기름을 붓고 있는 상황이다.

     

    조현아 씨가 수면 위에 떠올랐을 뿐, 일부 재벌 3세들의 황당한 갑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간부들에게 막말을 일삼는가 하면 직원들을 노예 대하듯 하는 3세들이 즐비하다. 회사 밖에서도 고급 외제차를 신호를 무시한채 몰고가다 지적하는 노인들에게 손찌검을 가하고, 술집에서 난동을 피우는 등 지탄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직원들을 갑질의 대상이 아니라 기업을 함께 키워가는 동반자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은 멀리 해외 경영자들에게 물어볼 것도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 기업의 토대를 닦은 창업주들이, 또 2세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던 것들이다.

     

    호암 이병철, 아산 정주영, 정석 조중훈 등 한국 기업의 거성(巨星)들은 기업을 일구면서 ‘시장을 하늘 같이 여겨야 한다’는 점을 뼈 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번창일로를 거듭하던 기업이 정부의 정책 변경으로, 갑작스런 소비자들의 변심으로, 국제정세 문제로, 해외시장의 변화로 하루 아침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사례를 수도 없이 겪은데서 얻은 교훈이었다.

     

    이들이 ‘시장’과 함께 중요시했던 것이 ‘인재’였다.

    회사에 충성하는 간부들의 말을 듣지 않고 혼자 독불장군처럼 좌충우돌하다가, 또 정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임직원들을 기업의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고 또 2세들에게 이를 강조했다.    

     

  •  

    ▶창업주들 ‘임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라’

     

    삼성그룹을 창업한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은 제당, 모직, 전자 사업에 잇따라 진출하면서 지혜가 출중한 간부들의 덕을 톡톡히 봤다. 또 자칫 위험에 빠질 뻔한 일도 탁월한 간부들과 해법을 찾아내곤 했다. 그는 이 때문에 인재를 뽑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호암이 인재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낀 것은 6.26 전쟁 때였다.  서울에서 머뭇거리다 공산 치하에서 온갖 고생을 겪던 중 재산을 몰수당한 채 빈털터리 상태로 남하했는데, 경영을 맡겨두고 잊어버렸던 조선양조장 임원들이 3억원의 자금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는 훗날 “당시 그 돈이 아니었으면 재기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1957년 인재를 공개채용하는 제도를 선보이기도 했다. 삼성 공채 출신들은 오늘날 글로벌 삼성그룹을 일구는 초석들이 됐다. 호암은 “사업의 성패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는데,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반반의 확률 밖에는 자신이 없다”며 좋은 인재를 찾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병철 창업주는 특히 2세들에게 임직원들의 의견을 ‘경청(傾聽)할 것’을 강조했다. 이 창업주의 대를 이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평생 ‘사람’이라는 화두를 놓지 않았다. 그는 “나 자신 삼성의 회장으로서 제일 힘든 일이 사람을 키우고 쓰고 평가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이건희 회장의 천재론은 인재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강조하는 말이었다.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는 자신이 인수한 기업의 사장이 빚더미에 올라앉자 그를 위해 집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대통령 순방 경제사절단 활동을 마친 뒤 미국 워싱턴의 현지 숙소에 머물지도 않고 바로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한 행사장에서 만나 약속한 대학원생 7명과의 저녁식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의 귀국은 LG그룹의 전 임직원은 물론 재계 전체에 구회장이 직원들은 물론 미래 인재들까지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인식시켰다.

     

    ▶“막노동판부터 배워라!” 현장 체험과 밥상머리 교육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사업을 키워온 창업주들은 자녀들에게 ‘큰 돈이 자칫 그들을 정신을 망칠 수 있다’며 항상 겸손하게 근신하며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자신이 쌓은 큰 부가 자녀에게 남다른 기회를 주지만 동시에 그들의 미래를 망치는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는 매일 오전 5시 자식들을 불러 모아 함께 식사를 했다. 지각하는 자녀는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밥상머리 교육으로 자기관리와 성실, 겸양, 예절을 가르친 것이다. 아들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큰 재벌가 자식이라는데 안주해 공부를 게을리하다가 거친 손바닥으로 따귀를 엊어 맞는 일이 허다했다. 

     

    현대중공업을 시작할 때 공사장에서 워커도 벗지 않은 채 인부들과 잠을 자면서 공사를 진두지휘하던 그는 자녀들에게도 ‘어려운 상황에서는 반드시 직원들과 동고동락할 것’을 가르쳤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두 아들이 밑바닥부터 일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원양어선에 막노동 일에 투입했다. 노동자들이 수개월간 함께 바닥생활을 했던 두 아들이 나중에 총수의 자제들인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후문이다.

     

    ▶“기업은 사람이다” 정신 되살려야

     

    이번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한진그룹(대한항공)의 창업주인 고 조중훈 회장도 ‘사람을 중요시하라’ ‘신용을 목숨처럼 지켜라’는 점을 강조했다.

     

    낡은 트럭 한 대로 미군부대 청소 일을 하던 시절, 경인가도에서 차가 고장나서 쩔쩔 매는 외국 여성을 위해 한 시간 반동안 땀을 흘려 고쳐준 다음 사례비도 거절했는데, 후일 그녀가 남편과 함께 찾아왔는데 그가 바로 미8군 사령관이더라는 일화는 유명하다. 직원은 물론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그의 성품이 오늘날 한진그룹을 일구는 밑거름이 됐던 것이다.  
     
    이번 ‘땅콩회항’ 사건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많은 재벌3세들의 교만함이 수면 위에 떠오른 데 불과하다.

     

    이번 사건은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 재벌3세 시대에 새로운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조현아씨의 동생인 조현민 본부장이 이메일을 보낸대로 ‘저와 모든 임직원들의 잘못’이 아니라 ‘저희 한진그룹 3세들과 대한민국 재벌 3세들의 잘못’이라고 해야 옳다.

     

    3세들은 선친과 창업주들이 평생 기업을 키우며 체득한 인재 중시주의, 인간 존중주의를 뼛 속 깊이 다시 새겨야 한다. 오늘의 철저한 반성이 없으면, 내일 또 어떤 희한한 재벌3세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다.

     

    3세들은 또한 대한민국의 앞날을 짊어지고 있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절감해야 한다.

     

    스스로 경영자로서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3세들은 하루라도 빨리 전문경영인들에게 선장 키를 넘겨 주고 대주주로서 역할만 해야 한다.    
     
    오늘날 한 그룹은 막중한 경제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수십만명의 일자리를 책임지고 있다. 새한그룹의 경우 3세시대가 열리자마자 미숙한 경영으로 막을 내렸고 수만명 종업원이 길거리로 나앉고 말았다. 누구도 ‘제2의 새한그룹’이 나타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박정규 뉴데일리경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