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등 첨단기술제품 수출통제…제재 동참 韓도 영향은행 4곳 추가 제재…국제금융결제망 퇴출은 일단 빠져EU도 금융·에너지 제재…韓, 공급차질·원화강세·금리 '삼중고'
  • ▲ 물가 비상.ⓒ연합뉴스
    ▲ 물가 비상.ⓒ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미국이 제재의 칼을 뽑아 들었다. 이른바 '신냉전' 전선이 확대돼 사태가 장기화하면 스태그플레이션(경기 둔화 속 물가 상승)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급망 차질에 원화 강세, 금리 인상 지연 등으로 물가가 치솟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 EU와 對러시아 경제 제재 수위 상향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대국민 연설을 통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력히 비난한 뒤 군대 철수를 압박하기 위한 추가 제재 방안을 발표했다. 반도체 등 첨단기술 제품의 수출 통제와 러시아 주요 은행 제재가 골자다.

    미 상무부는 반도체와 컴퓨터, 통신, 정보보안 장비, 레이저, 센서 등을 수출통제 대상에 포함했다. 러시아의 국방, 항공우주, 해양 분야를 주로 겨냥했다는 설명이다. 미국은 중국의 대표 IT기업인 화웨이를 제재할 때 꺼내 들었던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을 러시아에도 적용해 반도체를 중심으로 러시아 산업 전반에 타격을 입히는 방안을 검토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FDPR는 미국 밖의 외국 기업이 만든 제품일지라도 제조과정에서 미국이 통제 대상으로 정한 장비나 소프트웨어, 설계를 사용했을 경우 수출을 금지하는 조항이다. 앞서 화웨이는 미국의 FDPR 제재로 대만 TSMC 등 해외 반도체 기업으로부터 반도체 칩을 납품받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번 조치로 우리나라도 미·러 갈등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됐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러시아는 우리나라의 10위 교역대상국이다. 지난해 우리 수출의 1.6%, 수입의 2.8%쯤을 차지했다. 수출은 자동차·부품(40.6%), 철구조물(4.9%), 합성수지(4.8%) 등이 많다. 우리로선 반도체와 자동차, 전자제품 등이 대(對)러시아 제재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이미 미국을 주축으로 한 국제사회의 제재에 동참하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4일 우크라이나 사태 보고를 받고 "무력침공 억제와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경제제재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지지를 보내며 이에 동참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러시아의 돈줄 죄기에도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미국은 지난 22일 러시아 최대 국책은행인 대외경제은행(VEB)을 비롯해 방위산업 지원특수은행인 PSB와 42개 자회사를 제재대상에 올려 서방 금융기관과의 거래를 전면 차단했으며 이들에 대한 해외 자산도 동결하기로 했다. 미국은 이날 러시아의 2대 민간은행을 비롯해 4개 주요 은행을 제재 대상에 추가했다. 또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과 그 가족들도 제재 대상에 포함했다.

    다만 가장 강력한 제재 수단으로 거론됐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시스템 퇴출 카드는 이번 제재에서 빠졌다. SWIFT는 1만1000개가 넘는 세계 금융기관이 결제 주문을 위해 쓰는 전산망이다. 여기서 배제되면 러시아 금융기관은 외국 금융기관과의 거래가 사실상 전면 중단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의 SWIFT 퇴출 조처를 요구했지만, 유럽연합(EU)은 SWIFT 제재 카드를 뒤로 미룬 상태다.

    미국은 이번 제재에 EU와 주요 7개국(G7) 회원국이 동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조처로) 러시아 경제에 즉각적인 영향은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심각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 전선은 확대하고 있다. EU 27개 회원국 정상은 24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에서 긴급 정상회의를 열고 러시아에 대한 수출 통제 등 추가 제재에 합의했다. EU 정상은 공동성명을 통해 이번 제재는 금융, 에너지, 교통 부문과 군민 양용 제품, 수출 통제, 수출 금융, 비자 정책을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 ▲ 바이든 미국 대통령.ⓒ연합뉴스
    ▲ 바이든 미국 대통령.ⓒ연합뉴스
    ◇사태 장기화 땐 글로벌 인플레 상승 부채질

    미국을 위시한 동맹국이 러시아 제재에 한 목소리를 내고 중국이 소위 '친러적 중립노선'으로 즉각적인 제재에 동참한 서방과 거리를 두면서 신(新)냉전 전선이 확대하는 분위기다.

    문제는 이번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에너지·곡물시장 등에서 공급 차질이 우려된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주요 원유 생산국이다. 일각에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유가가 120달러에 도달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러시아는 세계 1위 천연가스 수출국이기도 하다. 유럽은 지리적 특성상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전반적인 에너지가격 상승이 예견되는 대목이다. 미국은 최근 우리 정부에 유럽에 대한 액화천연가스(LNG) 지원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군사작전으로 유럽의 LNG 수급에 문제가 생길 것에 대비해 한국·일본 등 동맹국에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밀, 옥수수 등 곡물자원 수출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국제 곡물시장 공급에 차질이 발생하면 식음료 제품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며 고물가 상황을 부채질할 수 있다.

    앞서 우리 정부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길어지면 △원자재 등 공급망 차질 △실물경제 회복세 제약 △금융시장 불확실성 확대 등 실물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
  • ▲ 유가 정보.ⓒ뉴데일리DB
    ▲ 유가 정보.ⓒ뉴데일리DB
    당장 물가가 비상이다. 일각에선 이번 사태 장기화가 스태그플레이션을 촉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24일 통계청이 내놓은 가계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4분기 전국 1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464만2000원으로, 1년 전보다 6.4% 증가했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물가 상승분을 고려한 실질소득은 2.8% 증가에 그쳤다. 고물가 여파로 4분기 월평균 소비지출은 1년 전보다 5.5% 늘었다. 실질소득에서 소비지출 비중을 따지는 평균소비성향은 67.3%로 나타났다. 100만원을 벌어 67만3000원을 썼다는 뜻이다. 4분기 기준으로 통계 작성 이래 최저치다. 에너지비용, 원자잿값 상승 등 대외변수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지갑은 닫히면서 내수가 위축되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성한경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번 사태로 우리 경제에 공급 충격이 세게 올 것"이라며 "사태가 장기화한다면 에너지가격이 오르면서 수입물가가 오를 것이다. (설상가상) 어제 환율도 8.8원이나 올라 물가 압력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또한 성 교수는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상승)에 (한은에서) 금리를 올리는 시기인데 전쟁 발발에 따른 경기 위축을 고려해 (한은이) 금리 인상을 주저할 수 있다"면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다음 달 금리를 올릴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번 사태로) 회의론이 제기되는 듯하다"고 덧붙였다. 수입물가 상승에 원화 강세, 금리 인상 지연까지 겹쳐 물가가 치솟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도 "우리나라는 천연가스를 배로 실어 오는 데다 셰일가스 등 대체 방안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에너지는 경제의 근본"이라면서 "사태가 장기화하면 과거 오일쇼크까진 아니어도 영향이 적잖을 것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위기 상황이 6개월 이상 길어지면 공급측면뿐 아니라 사후 회복에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