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차주 설득 없는 일방통행모럴해저드 비판에 "따뜻한 마음으로 돕자"취임 3일만 쫓기듯 정책발표… 공감대 넓혀야
  • 평범한 직장인 A씨의 전세대출 이자는 다음달 20만원 가량 오른다. 계란 한 판이 만원에 육박해도, 휘발유값이 2000원을 넘어도 버텼는데 대출이자 상승은 체감이 다르다.

    식재료는 덜 먹으면 되고 유류비가 부담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겠지만 은행이자는 꼼짝없이 내야 한다. 어디 그 뿐일까. 금리는 계속 올린다는 말 뿐이다. 전세대출 만기 기준인 2년 새 이자가 2~3배 오른다는 말도 나온다.
  • ▲ 김주현 금융위원장ⓒ뉴데일리DB
    ▲ 김주현 금융위원장ⓒ뉴데일리DB
    고금리, 고물가에 서민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데 금융당국 수장인 김주현 금융위원장의 행보가 한가해 보인다. 정치권이 혼란한 틈을 타 인사청문회 없이 취임해서 그런걸까. 좀처럼 민심을 읽지 못하는 것 같다는 평가가 자주 들린다.

    금융위가 민생안정 금융대책을 발표한 건 지난 14일. 김 위원장 취임 3일 만이다. 9월 종료되는 코로나19 금융지원 후속 조치가 담겼다. 125조원을 투입해 소상공인·청년 등 취약층의 빚상환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내용이다.

    소상공인 손실보상을 담은 2차 추경이 39조원이었는데 갑자기 100조가 넘는 돈을 쏟아붓는 정책에 국민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원금 90% 탕감, 청년 신속 채무조정 등 자극적인 키워드가 언론에 오르내렸다. 벼락거지로 전락한 서민들이 "내가 낸 세금으로 영끌족 돕지말라"고 분통을 터뜨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금융위는 급히 진화에 나섰지만, 갈피를 잡진 못했다. 김 위원장은 "돈을 빌려 주식, 가상자산에 투자한 청년들이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붓는 말이었다. '누구는 투자할 줄 몰라 저축만 했느냐'는 말이 튀어나올 법 했다.

    갈팡질팡 해명은 주말 내내 계속됐다. 김 위원장은 "금융소외계층이 제도를 몰라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도록 홍보와 대국민 안내를 강화해달라"고 하더니 "조금만 도와주면 재기해 국가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분들을 파산하게 두는게 맞느냐"며 비판에 반박하기도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김 위원장은 급기야 기자실을 찾아와서는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마음 가지자"고 했다. 당장 전세난민에 몰려 월세살이를 걱정해야 하는 서민들의 공감을 얻긴 어려운 말이다.

    생활비를 쪼개 빚을 갚는 성실차주에게 취약차주를 돕는데 협조해 달라는 식의 정책은 금융당국의 대민 인식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과거 IMF 외환위기나 리먼브라더스 사태는 외부에서 몰아친 퍼펙트스톰이었다. 공동체 의식을 자극해 위기극복에 활용하는데 반발이 작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는 성격이 다르다. 위험신호가 곳곳에 나타났고, 대응가능한 지점이 있었다. 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막연히 취약차주를 돕자는 캠페인이 먹혀들리 만무하다. 성실차주와 금융권의 동의를 끌어내는 설득 과정이 선행됐어야 했다. 금융위원장 취임 3일 만에 실적에 쫓겨 불쑥 내놓을 정책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이명박정부 인수위원장이었던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은 뜬금없는 오렌지 발음으로 논란을 자초했다. 당장 먹고살기 급급한 국민들에게 '어륀지' 논란은 MB정부를 '고소영', '강부자' 비판에 시달리게 한 시작점이었다.

    금융위기 속에서 취약차주 구제는 꼭 필요한 과제다. 하지만 금융산업을 떠받치고 있는 건 언제나 성실하게 갚아나가는 이들이다. 이들의 눈높이를 벗어난다면 더 큰 위기를 각오해야 할테다. 김 위원장의 인식과 화법에서 '어륀지'가 떠오르는 게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