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이어 효성까지… 대한민국 산업 발전 초석견리사의·기술 중시… 인재발굴과 육성에도 헌신
  • ▲ 고(故)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회장.ⓒ효성
    ▲ 고(故)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회장.ⓒ효성
    고(故)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회장의 기일을 맞아 그의 경영철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16일 재계에 따르면 이날은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회장이 타계한 지 40주기 되는 날이다. 그는 지난 1984년 1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스스로를 만우(晩愚)라 일컬었다. ‘늦되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나이 서른에야 대학을 졸업했고 마흔이 넘어 사업에 입문하였으며 쉰여섯이 되어서야 자신의 독자사업을 시작한 인생 여정을 에둘러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세계 500대 기업에 두 개의 기업을 올려놓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내는 경영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만우 조홍제 회장은 1906년 경남 함안군 군북면의 백이산 자락에서 태어나, 강직한 선비의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한학을 배우던 조 회장은 열아홉이 되어서야 중앙고보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 재학중이던 1926년 6월 10일 순종황제의 국장일을 기해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동하여 모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 유학해 호세이(法政)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한 뒤 고향친구 몇 사람과 자취를 하게 되었는데, 이 집에다 동방명성을 뜻하는 ‘동성사’란 이름을 붙이고, 식민지의 어둠을 밝히는 조국의 샛별이 되자는 뜻을 모은다. 이때부터 조홍제 회장은 기업을 육성해 국가와 민족에 이바지하며 기업가로서 정도를 걷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해방 직후 조 회장은 친구의 동생이었던 호암 이병철 회장과 동업으로 삼성물산을 경영하면서 기업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무역백과사전으로 통할 만큼 최신 지식을 쌓아가며, 발로 뛰었던 그의 활약에 힘입어 우리나라 무역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홍콩 상인들이 물건을 싣고 한국으로 들어와 물물거래를 하는 바터(barter) 무역이 고작이었던 당시, 홍콩에 직접 물건을 싣고 가 바이어를 찾아내어 직거래를 시작했다. 또한 우리나라 무역 사상 처음으로 영국과 홍콩을 잇는 삼각무역 거래방식을 통해 수출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그후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 설립을 주도하며 산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 ▲ 고(故)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회장.ⓒ효성
    ▲ 고(故)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회장.ⓒ효성
    1962년 조홍제 회장은 새로운 출발선에 선다. 효성물산을 모태로 독자사업을 시작해 조선제분, 한국타이어, 대전피혁 등 부실기업을 맡아 정상화시킨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산업을 물색한 끝에 1966년 동양나이론을 설립하게 된다. 오늘날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등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효성의 섬유 사업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자체 기술로 공장을 건설하지 못하고 외국의 기술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조 회장은 공장의 설계부터 시공까지 우리 기술진이 주도하에 공장을 짓도록 함으로써, 향후 자체설계를 통한 증설이 가능토록 하여 원가 경쟁력을 높이고 지속적으로 공정개선을 할 수 있게 했다. 

    이후 동양폴리에스터와 동양염공, 토프론 등 화학섬유 관련 계열사를 잇달아 설립하여 일관생산체제를 갖추고, 독자적인 기술개발 능력과 최고의 경쟁력으로 우리나라 화섬 산업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1975년에는 산업발전의 대동맥인 전력 송배전망 선진화를 위해 한영공업을 인수해 효성중공업으로 개편하는 등 중화학공업에 진출하여 20여개의 대기업군을 거느리게 된다. 오늘날 효성그룹은 섬유, 화학, 산업자재, 중공업, 건설, 무역, 정보통신 등 여러 산업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며 글로벌 시장에서도 위상을 높여나가고 있다. 또한 한국타이어는 국내 1위 및 세계 7위의 타이어메이커로서 품질과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1981년 포춘지가 뽑은 세계 500대 기업 속에는 삼성과 효성의 이름이 함께 들어있다. 조홍제 회장은 한 생애에 두 개의 기업을 세계 500대 기업 반열에 올려놓은 유일한 기업가로서 한국기업사에 빛나는 성공신화를 남긴 것이다. 
  • ▲ 고(故)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회장이 1962년 효성물산으로 독자사업을 시작할 무렵.ⓒ효성
    ▲ 고(故)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회장이 1962년 효성물산으로 독자사업을 시작할 무렵.ⓒ효성
    조 회장은 ‘빨리’ ‘크게’ 이윤을 내는 것만을 목표로 한 기업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기업에 대한 남다른 철학이 있었고, 그것이 그를 당대의 어떤 기업가와도 다른 존재가 되게 했다. 

    그는 항상 이익이 있을 때 그것이 의로운가를 먼저 생각했다. 설탕수입을 하던 시절, 설탕값이 폭등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두약속도 계약이라며 오르기 전 가격으로 거래한 일화는 그의 견리사의(見利思義) 정신을 잘 나타내 준다. 기술을 중시한 철학 또한 같은 맥락이다. 

    공장을 건설할 때도 외국 기술자에게 맡겨서 하는 쉬운 방법 보다 직원들을 해외로 보내 기술을 배워오게 했다. 1971년에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국내 민간기업 최초의 기술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당장 이익은 나지 않더라도 우리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국가경제발전을 위해 기업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조홍제 회장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에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다. 

    사업을 시작한 후 그는 전쟁으로 유실된 군북 초등학교의 교사를 지어 재건하고 영남 장학회를 만들어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배명학원 이사장을 맡아 후학들을 돌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배명학원 이사장 시절에는 동양나이론 건립으로 사업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위해 흔쾌히 신축건물을 지어주고 독일에서 들여온 과학기자재를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기업 경영에 있어서도 항상 ‘사람’을 강조했는데 젊은 인재를 등용해 중책을 맡기고 그들이 자리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도록 신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계 관계자는 "조홍제 회장은 조국의 어려운 운명 속에서 산업입국의 신념으로 기업을 육성하고 인재를 키우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면서 "그의 헌신적인 노력이 이뤄낸 고귀한 결실들은 오늘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