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예산 1.3조… 보조금 '0'원총선 앞둔 정치권 '반도체 테마' 띄우기클러스터 조성 곳곳 난제… 세액공제도 하세월
  • ▲ 윤석열 대통령이 2월 15일 경기도 수원 장안구 성균관대학교에서 자연과학캠퍼스 반도체관에서 '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 주제로 열린 세 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마무리 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 윤석열 대통령이 2월 15일 경기도 수원 장안구 성균관대학교에서 자연과학캠퍼스 반도체관에서 '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 주제로 열린 세 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마무리 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편집자주]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총성없는 ‘기술 패권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중국발 공급망 리스크가 불러온 반도체 경쟁은 미국에 이어 동맹국가들의 참전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전쟁터가 되고 있다. 자본주의체제에서 굳건히 지켜진 자유무역 기조마저 위협받으며 반도체판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고 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거센 파고에 직면해 있다. 지난 40여년 동안 숱한 고행을 거친 '베테랑'이지만 위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하다. 더이상 기업 대 기업의 경쟁이 아닌 국가대항전으로 확전된데다 AI(인공지능) 도래로 새로운 격변기를 맞이하며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이에 한국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현주소를 짚어봤다. 

    주요 경쟁국들이 반도체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앞다퉈 천문학적인 지원을 발표하는 가운데 국내 정부의 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 차원의 실질적인 대응이 필요하지만, 민간 투자에 의존하면서 '말로만' 반도체 총력전이라는 목소리다.

    ◆ 정부 "반도체 예산, 전 정권보다 2배 늘어" 자화자찬
    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올해 한국 정부의 반도체 관련 예산은 1조 3000억 원에 불과하다. 정부가 이달 중 발표할 '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종합 지원방안'에도 '반도체 보조금 지원'은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중국·일본 등 주요 경쟁국이 수조 원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지난 1월 정부는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 방안을 발표했지만, 구체적인 반도체 인프라 지원 예산은 공개하지 않았다. 지난해 반도체 인프라 지원은 1000억 원에 그친 바 있다.

    이규봉 산업통상자원부 반도체과 과장은 "1조 3000억 원의 반도체 예산은 기술 개발, 인프라 지원 등에 필요한 예산이 모두 포함됐고 세부 내역은 공개가 어렵다"면서 "보조금이 아니더라도 세액공제 등 다른 인센티브를 지원하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지난 정부 말기와 비교했을 때 두 배 이상 증가한 규모로 재정적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 지속 노력할 예정이다"고 부연했다.

    정부는 대표적인 반도체 지원 대책으로 세액공제를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투자 후 세금을 깎아주는 것으로 반도체 경쟁력 차원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성패 여부는 '양산' 속도 싸움으로, 지난해 수조 원의 천문학적 적자를 기록한 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할 때 정부의 보조금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신산업실 부연구위원은 "일본은 자국 반도체 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고, 미국은 투자 시 세액공제에 직접 보조금을 더해 약 50% 지원하는 상황이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세액공제는 'K-칩스법'으로 불리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에 따른 지원인데, 해당 법안의 일몰기한은 올해로 끝나지만, 야권의 '대기업 특혜' 비판에 연장 방안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 ▲ 정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방안. ⓒ산업통상자원부
    ▲ 정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방안. ⓒ산업통상자원부
    ◆ 투자는 '민간'이 생색은 '정부'가
    지난 1월 발표된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 방안에 따르면 2047년까지 662조 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 혁명의 퍼스트 무버가 되기 위한 속도전을 펴야 한다"며 청사진을 밝혔다. 다만, 정부의 발표 내용을 살펴보면 기존에 발표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투자 계획을 총정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는 경기 평택, 화성, 용인, 성남 판교, 수원 등 경기 남부에 밀집된 반도체 기업과 생산단지를 하나의 생태계로 조성하는 개념이다. 

    조성 방안에 따르면 회사별 투자액은 삼성전자 ▲360조 원(용인 파운드리) ▲120조 원(평택 시스템+파운드리) ▲20조 원(기흥 R&D단지 증설) 등 총 500조 원, SK하이닉스 122조 원(용인 메모리) 등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평택에 여섯 개의 반도체 팹을 계획했고 현재 3개를 가동 중이다"며 "1, 2기 준공 당시 각각 30조 원을 투자했다는데 물가 상승, 산업 발전 속도 등을 감안해 정부가 1기당 투자비를 40조 원으로 상향 조정한 것 같다"고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022년 기흥 연구개발(R&D) 센터에서 발표한 '연구단지 20조 원 투자 계획'도 정부 방안에 포함됐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의원실 관계자는 "반도체 지원금 관련 논의를 했을 때 정부 측 관계자는 '어차피 기업의 투자 계획이 있는데 정부가 나서서 중복 투자를 해줘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논리였다"고 했다.
  • ▲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공급 MOU 체결식. ⓒ연합뉴스
    ▲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공급 MOU 체결식. ⓒ연합뉴스
    ◆ 전력·용수 MOU 착착… 문제는 '지역 민원'
    정부는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위해 전력·용수 등 대규모 인프라 구축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산업부는 지난달 27일 한국전력공사와 발전 공기업,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전력·용수 관련 공기업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킥오프 회의를 열기도 했다. 

    정부는 경기 용인·평택, 경북 구미, 충북 청주 등 7곳에 조성할 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에 총 15기가와트(GW) 이상의 전력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용인 특화단지에서 발생하는 예상 전력 수요만 10GW가 넘어 산업부는 2036년까지 액화천연가스(LNG)로 3기가와트(GW) 규모의 전력을 공급한다. 2037년 이후에는 서해안 초고압 직류망 등 장거리 송전선로를 활용해 7GW 이상의 전력을 끌어올 예정이다.

    당장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에 필수적인 전력 송전망을 빠르게 구축하려면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이 제정돼야 한다. 대규모 송전망이 지나는 지역 주민의 건설 공사 동의도 필수다.

    필요한 물의 양도 상당하다. 2050년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서만 하루 76만 4000톤의 물이 필요하다. 인근 팔당댐에선 추가 공급이 어려워 강원 화천댐의 물을 끌어다 써야 맞출 수 있다. 일반산단까지 포함하면 매일 110만 8000톤의 물이 사용된다.

    적기에 송전망과 공업용수 관로를 설치하기 위해선 지역 주민의 동의가 필요한데, 정부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설지 미지수다. 앞서 용인 SK하이닉스 공장은 2019년 사업계획 발표 뒤 수차례 착공이 연기됐다. 해당 공장은 내년 착공 예정으로 사업계획 발표부터 첫 삽을 뜨는 데까지 7년의 세월이 걸렸다. TSMC가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공장설립을 20개월 만에 끝낸 것과 비교된다.

    지역 주민의 민원 및 토지 보상이 가장 큰 지연 사유로 꼽힌다. 여주시는 '여주→이천→용인'을 잇는 공업용수 관로 때문에 피해가 상당하다며 SK하이닉스에 지원을 요구했다. 여주 시민도 "국가 기간산업이라도 상생 방안 없이는 취수를 허가하지 말라"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지난 2013년 삼성전자의 평택 사업장은 경기 안성시 원곡면 주민이 산간 1.5km 구간 송전탑 건설에 문제가 있다며 송전선을 땅에 묻어달라 요구하자 약 750억 원을 추가로 들여 송전선 지중화 공사를 진행했다. 한국전력과 전력 공급 협약까지 체결했지만, 지역 주민의 민원으로 추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이규복 전 반도체공학학회장은 "일본처럼 정부가 기업을 대신해 지자체, 지역 주민과 적극적으로 협상해야 빠르게 진행할 수 있다"면서 "정부가 보상 문제를 '기업의 역량'으로 치부한 채 방관하면 계획보다 늦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편 내달 총선을 앞두고 반도체가 핵심 테마로 부상하면서 정부와 정치권은 적극적으로 관련 지원 정책을 내놓고 있다. 다만, 일각에선 표심을 노린 단발성 포퓰리즘성 공약이라는 우려다.

    업계 관계자는 "정치권에서 반도체 산업 지원에 관심을 갖고 여러 대책을 제안하는 것은 큰 힘이 된다"면서 "여야의 각종 공약이 정치권의 단순 표심잡기 수단이 되지 않도록 업계에서 실제적 지원의 필요성을 적극 강조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