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금융위기 때도 자본시장법 개정 실패
  • 세계 금융시장이 혼란스러워진 탓에 종합금융투자사업자(IB) 육성을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표류할 가능성이 커졌다.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미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이번 위기를 가져온 미국식 모델을 굳이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적잖기 때문이다.

    증권노조와 정치권에서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금융시장 혼란을 부채질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세계 최대의 투자은행인 미국의 골드만삭스와 같은 IB를 육성하겠다는 금융당국의 목표가 달성되기 어려운 방향으로 여론이 형성되는 모양새다.

    ◇고조되는 반대 여론

    최근 자본시장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국증권산업노동조합 등 9개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법 개정안 내용이 기업에 안정적, 장기적으로 자금을 공급하는 자본시장의 본원적 역할과 배치된다며 입법예고 철회를 요구했다.

    이들은 특히 헤지펀드 도입을 반대했다.

    김경수 증권노조 정책국장은 "단기차익을 노리고 들어온 외국 헤지펀드가 국내 시장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토종 헤지펀드가 출범하더라도 외국계와 비슷한 방법으로 불안정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10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정치권에서도 이상기류가 포착됐다. 금융시장이 불안한 상황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박선숙 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헤지펀드나 대형 IB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실패한 것으로 드러난 미국 모델이다. 금융위기가 지속하면 자본시장법 개정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외국인 자금 유출입을 규제하는 방안을 논의해 자본시장법 개정안에 반영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헤지펀드가 단기 변동성을 키울 수 있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법 개정에 반대하기 어렵다. 다만, 시장을 뒤흔드는 외국계 자본을 규제하는 방향으로 포괄적인 논의를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상황 반복되나

    자본시장법 개정안의 좌초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은 과거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7월3일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당시만 해도 코스피가 2,000을 내다보고 있었고 IB 육성으로 증권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겠다는 정부의 의지도 강했다.

    하지만, 2009년 2월 시행을 불과 넉 달 남겨놓고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졌다. 그 결과 한국형 IB 육성방안은 갈 곳을 잃었다. 정부 방안의 모델이었던 미국 월가의 투자은행들이 위기를 촉발한 `주범'으로 지목된 탓이다.

    리먼브라더스는 파산신청을 했고,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는 상업은행 업무도 동시에 취급하는 은행지주회사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는 정치권을 중심으로 자본시장법 시행을 반대하는 여론이 생겼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월가 모델을 그대로 베껴놓은 금융선진화 방안에 대한 우려가 크다"며 자본시장통합법의 시행을 1년 연기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산업은행의 리먼브라더스 인수시도에 여당의 질타가 쏟아졌다.

    한국은행도 2008년 11월2일 '2008 하반기 금융안정 보고서'에서 자본시장법으로 금융기관의 대형화가 진전된다면 외부충격이 시스템 전체로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대형 IB에 대한 논의는 금융시장이 안정되고 나서야 재개될 수 있었고 당국은 지난달에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역사를 잘 기억하는 금융업계는 긴장하고 있다. 이달 들어 2008년과 유사한 금융시장 불안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증권사 관계자는 "개정안이 마무리될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는데, 갑작스런 위기에 당황이 된다. 그동안 준비한 것이 무산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