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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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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지하 공간
화원의 뒷마당은 제철이 아닌 꽃나무와 분재들로 꽉 차 있었다. 지수는 숲길처럼 난 화분들 사이의 통로를 나비처럼 빠져나갔다. 그러자 그 끝에 제법 규모가 큰 또 다른 시설물 하나가 피라미드처럼 눈부시게 서 있었다. 피라미드형 시설물은 3단의 아파트형 구조로 각종 재배시설을 갖춘 최첨단 온실이었다. 대부분 산과 들에서 직접 채종해 발아시킨 350여 종의 야생화들로 가득 찬 온실은 그야말로 미니식물원 같았다. 지수는 조경용 넝쿨로 마감 처리된 온실의 맞은편 벽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는 점프수트의 바지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넝쿨 속에 쑤욱 집어넣었다.
“찰칵!”
“멍! 멍! 멍!”
“달래야, 쉿!”
“끄으응…….”
“그렇지, 우리 달래는 역시 똑똑해.”
지금까지 외부인에게 단 한 번도 노출된 적 없는 은밀한 비밀세계였다. 지수는 LED 전구가 내뿜는 하얀 불빛을 따라 유령처럼 철제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계단 밑에선 지수임을 알아본 달래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지수는 달래를 끌어안고 머리를 몇 차례 쓰다듬었다. 실체가 드러난 지하 공간은 마치 고대 왕들이 내세를 위해 만든 돌무덤 속을 연상시켰다. 삶의 고됨과 환희를 표현해주는 그 어떤 화려한 색도 없었다. 지수는 달래를 남겨둔 채 다시 천장에 깔린 난방용 파이프라인을 따라 걸어갔다. 이번엔 통로를 따라 칸을 막은 작은 크기의 밀폐공간이 나타났다. 격벽(隔壁)으로 구분된 밀폐공간은 흡사 중세 이단자들을 격리수용하던 지하감옥 같았다. 지수는 건조한 시선으로 바닥에서 나무의자를 집어 제자리에 놓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아직 우울증이나 불면증도 겪지 않고. 거기다 지난번과 달리 눈에서 독기도 보이지 않네.”
“!”
“나를 속이기 위한 기만이니? 아니면 정말 탈출을 포기한 거니?”
“미친 사람처럼 하루 종일 벽만 쳐다보며 혼잣말을 하다보니까 이젠 내가 비참하다는 사실조차 잊었어.”
“너도 이젠 절망을 배웠구나. 그래, 허망한 꿈일 뿐이지.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욱 옥죄는 현실의 그물.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그 그물을 벗어날 수 없더라. 난 잘못도 없이 하루아침에 인간의 자식에서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고 멸시하는 짐승으로 전락했어. 난 그때 이미 절망을 배웠다. 지수야?”
“지수! 그게 내 이름이었던가. 난 내 이름이 ‘당과 조국의 반역자’, ‘인민의 배신자’인 줄 알았어. 크크크. 내 이름을 부르는 이유가 뭐지?”
“이유?”
“그래, 불안과 공포로 나 스스로 갈기갈기 찢기길 바라는 건가?”
“글쎄, 최소한 그 정도는 돼야 내 아픔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기적이군.”
“하지만 내가 터득한 생존기술이라는 말이 보다 더 정확할 거다.”
“언니?”
“그러고 보니 나도 그 언니라는 단어를 아주 오랜 시간 잊고 살았구나. 아니지, 이젠 그 말만 들어도 비단뱀이 온몸을 조여 뼈를 으스러뜨리듯 부서진 뼛조각들이 심장을 파고들어 고통스럽다.”
“…….”
“하지만 그 고통도 살아 있을 때 느끼는 거다. 난 이미 몸과 마음이 죽어서 그런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아!”
“나 너무 끔찍하고 무서워.”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바뀌었어. 밤은 희망이 자라는 시간이 아닌 온갖 악몽을 읽는 사실적인 텍스트였지. 그런데 말이다. 버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막연한 희망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이고 잔인한 것임을 깨달았어.”
“우리가 어쩌다, 흑! 흑!”
“네 앞에 있는 난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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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감춰졌던 어둡고 무서운 진실이었다.
현우가 알고 있는 지수는 진짜가 아닌 그녀의 일란성 쌍둥이 언니 지원이었다.
지원의 경멸적인 말투에선 평소와 달리 피냄새가 진동했다. 분명 증오와 적개심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돋아 피부를 파고드는 따가운 말투였다. 지원은 점령군처럼 험악하게 동생의 의식을 유린했고 지수는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지수의 모습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긴 파마머리는 풀어져 넝쿨처럼 제멋대로 엉켜 있고 불안정한 시선은 끊임없이 주위를 방황했다. 그리고 감옥 내부의 환경도 끔찍하다 못해 참혹했다. 일반인 같으면 지하 공간 특유의 음습한 공기 때문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자살하기에 딱 좋은 그런 분위기였다.
“미, 안, 해.”
“미안하다고? 단지 그 한마디뿐이야?”
“…….”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 5국 소속의 직파간첩, 그것이 현재 지원의 신원정보였다.
언제부턴가 지원은 지수를 위선덩어리처럼 가증스럽게 쳐다보았다. 지원이 철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지수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동생 지수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몸을 축 늘어뜨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것은 마치 지원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몸짓이었다. 아무튼 얼굴 형태만으로는 다른 사람이 도저히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둘은 똑같았다.
“2002년 3월 5일. 그날 정오에 사복 차림의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이 우리 반에 들이닥쳤다. 그 거친 말투와 무식한 행동. 거기다 그들의 가슴에 달린 배지가 만수대창작사의 1호작품 미술가가 만든 군상(軍像·김일성의 군복 입은 모습)이었다. 난 그때의 일을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피에 굶주린 들개들의 눈빛, 그 알 수 없는 싸늘한 비웃음. 요원들은 내 숨통을 조이고 온몸을 단단히 결박했다. 마치 거미의 저장용 먹이처럼 말이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나는 두 번 다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됐다. 그때 손가락의 신경 하나가 끊어졌거든.”
“…….”
버려진 건물처럼 철골 뼈대만 남은 냉소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원은 그때의 몸서리쳐지는 공포가 머릿속에 떠오르는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성혜경과 지수가 망명하던 날, 지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양 제1중학교의 4학년 3반 교실에서 꿈 많은 소녀로 수업을 받고 있었다. 평양 제1중학교는 평양시 보통강구역의 신원동에 있는 북한의 대표적인 영재 양성 중학교다. 하지만 3월 5일은 맑고 파랗기만 하던 하늘이 뿌옇고 검은 잿빛 하늘로 바뀐 날이었다.
“그때 난 깨달았다. 아름다운 인간의 목소리가 때론 불타는 지옥처럼 잔인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떨지 않으려고 모지름(모질음)을 쓰며 죄수용 유개차(지붕차)에 올랐다. 그리곤 속으로 외쳤다. ‘동무들은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거야. 우리 아바지가 누군지 알아? 우리 아바지는 당과 조국이 인정하는 위대한 혁명일꾼이라고.’ 그런데 그날 오후였다. 한순간에 세상은 핏빛으로 물들었으며 태양은 검게 변했다. 국가안전보위부 예심국(조사국)에서 아바지가 미제 놈의 고용간첩이었다는 소리를 들었거든. 그런데 정작 나를 충격의 늪에 빠트린 건 아바지의 반역이 아니었다. 뭔 줄 아니?”
“…….”
“바로 혈붙이(피붙이)를 버린 오마니와 너였다. 그래서 다시 태어났다. 단지 복수만을 위해. 분노와 적개심으로 목숨을 이어가며 난 내가 느끼고 아파한 그 배신감과 절망감을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었거든. 아! 물론 너와 오마니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내 삶의 의지와 목표가 된 것만은 틀림없어.”
“언니, 흐흐.”
“인간관계라는 거 참 덧없더라. 한낱 미물인 개나 꽃보다도 못한 존재들이 바로 인간이더라고. 겉으론 사탕발림으로 소중한 척하다가도 뒤돌아서면 거짓과 기만으로 이용하려고만 하고. 하긴, 오마니와 너도 그런 부류겠지?”
“아, 니, 야.”
“이제 와서 부정한다고 이미 벌어진 상황이 달라지진 않아. 오히려 그 가식으로 인해 내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오마니처럼.”
“오마니?”
“그래, 몰랐어? 넌 생각보다 머리가 상당히 둔하구나. 오마니는 아바지를 대신해서 내가 처단한 거야.”
“헉!”
비인간적인 환경과 반복된 학습으로 인해 지원은 거짓과 기만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남을 아끼고 위하는 사랑마저 재생이 불가능할 만큼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듯 보였다. 이제 지원의 눈빛에는 먹이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심지어 아주 익숙한 노련미까지 엿보였다.
화원의 작업실에서는 피오기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다인용 소파에 남녀 세 명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보수 계열 잡지기자 문상원이었다. 그리고 맞은편엔 깎아내린 듯한 관능미와 뇌쇄적인 눈빛을 갖고 있는 꽃꽂이 강사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육감적인 섹시미는 단순하게 보이는 자극이 아닌 보이지 않는 흥분과 희열까지 만들어냈다. 그 옆에는 강은혁이 앉아 있었다.
“피 선생, 요즘도 산속비트(산속 비밀아지트)를 옮겨 다니며 압축송수신을 합니까?”
“그렇소.”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듣자하니 국정원의 감청팀이 뭔가 낌새를 챈 것 같습니다.”
“명심하겠소. 그래서 요즘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탈출로가 확보될 때까지 도피할 수 있는 비밀아지트를 하나 물색 중이오.”
“거기가 어딥니까?”
“현재 알아보는 중이오. 비트가 준비되면 차차 말하겠소. 그런데 문 선생?”
“뭡니까?”
“다른 정보는 또 없소? 요즘 듣자하니 어느 방위산업체에서 스텔스 기술을 적용한 무기들을 탐지하는 레이더기술을 개발 중이라던데.”
“TBD(Track before detect) 말이군요?”
“티, 비, 디.”
“일반 레이더는 일정 크기 이하의 반사파를 처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스텔스기술이 적용되어 상대적으로 반사파가 극히 적게 반사되는 최첨단무기들은 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TBD는 일반적인 레이더가 무시하는 아주 작은 반사파까지도 정보처리하기 때문에 스텔스기술이 적용된 최첨단무기도 탐지가 가능합니다.”
“그럼 그 레이더기술만 손에 넣으면 조국의 영공과 영해를 제집처럼 넘나들며 스파이 행위를 일삼고 있는 미제국주의 놈들의 최첨단무기들을 단번에 박살낼 수 있겠군.”
“거야 물론입니다. 하지만 보안이 철저해 시제품이나 연구성과물을 본 적은 없습니다. 더구나 아직까지 개발을 완료했다는 소리도…….”
“어찌 되었건 문 선생이 한번 알아봐주시오. 적어도 우리 공화국엔 꼭 필요한 기술인 것 같으니까.”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고맙소, 문 선생. 당과 조국은 결코 문 선생의 인민을 위한 투쟁정신을 잊지 않을 것이오.”
어느새 담배를 피워 문 여인은 여전히 피오기와 문상원 사이의 대화를 그저 남의 일처럼 무심히 흘려들었다. 그녀는 노란색의 시스루룩 니트 속에 심플한 디자인의 블랙컬러 브라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레오퍼드 패턴이 프린팅된 미니스커트와 여전사나 신을 법한 브라운 앵클부츠까지 신어 상당히 도발적인 모습이었다. 얇은 니트는 그녀의 탄력 있는 근육질의 속살이 더욱 위험하게 보이도록 하는 매개체였다.
“부조장 동무, 그런데 저 에미나이는 언제까지 저렇게 둘 거죠? 지하감옥에 가둔 지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잖습니까.”
“그러게요. 저도 그게 몹시 궁금했습니다.”
“이젠 국정원에서도 조장 동무를 저 에미나이로 착각하는 것 같으니 그만 거추장스러운 짐은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 아직은 아니오.”
“아니, 왜 아직은 아니라는 거죠?”
“동무, 그건 아직 저 에미나이가 이용가치가 남아 있기 때문이오.”
“그 이용가치라는 것이 도대체 뭐죠?”
“애초 지원 동무를 남조선에 안전하게 잠입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까?”
“그건 차차 알게 될 것이오. 하지만 우리 공화국이 강성대국(强盛大國)의 문을 활짝 여는 데 아주 중요한 도구인 것만은 말해줄 수 있소. 그러니까 홍화 동무도 섣불리 행동하지 마시오. 이건 내 지시가 아니라 위대한 당과 조국이 내린 지령이오.”
“…….”
리홍화, 피를 먹고 자라는 붉은 꽃.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암살자였다. 강렬한 눈빛 속에 녹아든 카리스마와 잠재되어 있는 추악한 본능을 통제하며 게임을 즐기는 그녀다. 게다가 암살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자극적인 몸매는 목표물을 파멸로 이끄는 최고의 공격무기였다. 분명 그러한 특징들은 그녀가 평범한 여성이 아님을 설명했다. 북한인권회복위원회 임권희 위원장과 중견 방위산업체의 부사장 마재성은 모두 그녀의 희생물이었다. 그녀의 원초적 아름다움에 감춰진 날카로운 이빨은 그만큼 매섭고 섬뜩했다.
홍화와 상원, 그리고 은혁은 피오기의 지시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