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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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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헤드헌터(Head Hunter)
와인 셀러에는 활짝 핀 꽃의 꽃술처럼 세계 각국의 와인 450여 종이 촘촘히 꽂혀 있었다. 실내 인테리어는 짙푸른 바탕에 황금색 가루를 흩뿌려놓은 것 같은 대리석 위에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어 궁전처럼 우아했다. 홀 천장도 중세풍의 오렌지색 프랑스산 샹들리에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신사동 가로수길의 정통 와인바였다. 그리고 DJ부스까지 설치되어 가볍게 술기운을 풀어낼 수 있는 1층과 달리 2층은 정말로 와인을 좋아하는 마니아들만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예약제로 운영되어 나비가 없는 꽃처럼 비교적 한산했다. 그곳에 수술의 꽃가루를 기다리는 암술처럼 럭셔리한 글래머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여자 손님은 소믈리에의 도움을 받아 와인리스트를 살펴보고 있었다.
“혹시 저를 아시나요?”
“아, 아닙니다. 오늘 여기서 처음 뵈었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저를…….”
“미국 여배우와 너무나 닮아서 와인바에 들어올 때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최고의 악녀 블레어 월더프로 출연한 레이튼 미스터라고…….”
“레이튼 미스터!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데요.”
“아주 영리하고 사악한 캐릭터지만 정말 아름다운 여배우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를 수는 있지만 제가 아는 분들은 안젤리나 졸리를 닮았다고 하던걸요.”
“물론 저도 처음 봤을 때는 도톰한 입술과 섹시한 보디라인, 그리고 당당한 걸음걸이가 졸리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레이튼 미스터를 더 닮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나 말할 때 입주위에 번지는 도도하면서도 차가운 미소와 그 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은…….”
“훗! 아무려면 어때요. 전 영화 속의 가공인물이 아니라 현실 속의 실존인물이잖아요.”
“무례한 청이 아니라면 아가씨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습니다.”
“저를요?”
“예. 아니 솔직히 고백하면 아가씨에게 저에 대한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
이제 사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숨에 여자의 테이블로 건너왔다. 그러나 여자는 빤한 스토리의 구성대로 움직이는 사내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와인잔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곤 스템(Stem)을 잡고 45도 정도 기울이더니 와인잔이 튕겨내는 신비로운 불빛을 몽롱한 시선으로 감상했다. 잠시 후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여자는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와인잔의 스템을 따라 위아래로 연신 오르내렸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자 테이블에 닿은 베이스(Base) 가장자리를 검지 끝으로 따라가며 동그라미를 그렸다.
“때가 되신 것 같은데 혹시 결혼은 하셨나요?”
“월·화·수·목·금·토·토가 저희 생활이라서 아직…….”
“그럼 애인은 있으세요?”
“애인이 있었으면 아마 퇴근하자마자 그녀를 만나러 갔을 겁니다.”
“그럼 좋아요! 판단을 하려면 우선 상대를 좀 더 알아야겠죠?”
“당연하신 말씀.”
“첫 만남의 오프닝을 겸해서 우리 건배 한번 하죠?”
“정말입니까?”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술친구가 있으면 더 좋겠죠.”
“대신 오늘 술값은 제가 화끈하게 쏘겠습니다.”
“전 꽃꽂이 강사 곽세희예요.”
“저는 모기업체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변성일입니다.”
“세희 씨는 평소 어떤 남자가 섹시하다고 생각하세요? 참고로 전 얼굴은 레이튼 미스터, 몸매는 캣우먼의 할리 베리. 그리고 긴 생머리에 가슴은 D컵. 마치 지금 제 앞에 계신 세희 씨처럼 말입니다.”
“그거야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여자의 생식능력에 올인하는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본능적인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훨씬 더 복잡해요. 그냥 접대용 멘트로 말하면 열심히 일하는 남자 정도로 하겠죠. 하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면 훌륭한 유전자를 대변하는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는 필수사항이고, 거기다가 학벌과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하는 경제적인 능력, 집안환경과 더 나아가 부모님의 재산, 그리고 요즘은 사회적인 레벨도 무시할 수 없는 큰 비중을 차지하죠. 저 역시도 그런 남자가 섹시하구요.”
“그렇구나. ‘섹시한 남자는 섹스보다 섹시하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었구나!”
내세보다는 현세에 존재하는 에탄올로 구성된 술의 정령(精靈)이 두 사람의 동공에 깃들기 시작했다. 성일의 간절한 눈빛을 홍화는 장난치듯 손톱으로 가볍게 튕겼다. 하지만 이따금 아이라인으로 눈 끝을 길게 그린 홍화가 눈꼬리에 아스라하게 매달린 깜찍함과 새침함을 가벼운 애교로 털어냈다. 그러면 성일의 눈은 금방 깊은 산속의 반딧불이처럼 반짝거렸다. 최음제에 취한 성일의 빈 의식에는 홍화에 대한 환상이 채워지고 있었다.
“세희 씨, 혹시 운명적인 사랑을 믿으세요?”
“눈빛을 보니 성일 씨는 사랑이 영원하다고 믿는군요?”
“유치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렇습니다. 세희 씨처럼 완벽하게 세상에서 저 자신을 지운 사람은 처음입니다. 걷잡을 수 없는 내 운명이 나에게 이토록 난폭하게 군 적도 없었습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받아주신다면 세희 씨를 향한 제 뜨거운 심장을 드리겠습니다.”
“아주 용감하시군요. 낭만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무모하고.”
“진심입니다.”
“아무래도 자리를 옮길 때가 된 것 같네요.”
“거절입니까?”
“그렇게 보였어요?”
“아니면?”
“오늘밤 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줄 테니까 사랑을 보여달라는 의미예요. 물론 저도 성일 씨가 저의 유일한 남자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고요.”
“그럼,…….”
“답답해요. 우리 바람이나 쐬러 나갈까요?”
볼가에 수줍은 듯 붉은빛이 감도는 홍화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처럼 꽉 찬 달빛 아래서 더욱 처연하게 빛났다. 금방이라도 또르르 굴러 내릴 것처럼 탱탱하게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감성이 터지는 순간 자유로운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순우리말로 ‘잇꽃’으로도 불리는 홍화(紅花). 우리나라 전역에서 자생하며 국화과에 속하는 홍화는 장미처럼 줄기가 아닌 꽃잎 끝이 가시처럼 생겼다는 것을 성일은 알지 못했다.
“성일 씨는 친구도 한 명 없으세요?”
“아니요. 제 주변에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만나고 시간이 꽤 흐르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휴대전화가 한 번도 울리지 않았죠?”
“아, 그거요. 실은 제가 세희 씨가 계신 테이블로 건너가기 전에 미리 꺼두었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역시 처음 느낌대로 젠틀하시네요.”
“가끔 사내 여직원들한테 그런 소리를 듣곤 합니다.”
“아까 듣기에는 오늘 중요한 약속이 펑크가 나셨다고 하는 것 같던데 걱정되지는 않으세요?”
“처음부터 그 중국계 헤드헌터를 백 퍼센트 믿었던 것은 아니라서 그렇게 실망스럽지도 않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조건이 너무 좋았거든요. 그런데 아까 다시금 찬찬히 생각해보니까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조건이 너무 좋으면 또 다른 무언가가 희생되기 마련이잖아요.”
서울을 떼어놓고 무작정 달린 지 1시간 반이 흘렀다. 차는 강화 본섬의 서쪽 끝 외포리 포구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저 멀리 검게 보이는 석모도의 석포리 선착장까지는 1.5㎞. 파도가 해안가에서 하얗게 포말로 부서졌다. 그리고 선착장엔 불 꺼진 자동차 몇 대가 어둠 속에서 섬처럼 있었다. 예상대로 성일의 시선도 페르몬의 유혹에 중독된 듯 끈적끈적하게 변해갔다. 그때 핸들을 잡고 있던 성일의 손 위로 홍화의 손이 살며시 얹혀졌다. 순간 성일은 당황했다. 차마 말은 못했지만 출발할 때부터 계산에 넣어둔 꼼수였다.
“여기가 좋겠네요. 편히 쉬기에 아늑하지 않아요?”
“그러게요. 사실 외포리에 자주 왔어도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오늘밤 우리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을 시작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훗! 좋다니 다행이네요.”
“세희 씨.”
“제가 그렇게 좋으세요?”
“물론입니다. 처음 보는 순간 제 목숨보다 더 사랑할 자신이 생겼습니다.”
“!”
성일은 이미 이성이 모두 파도에 씻겨나가고 최고조에 달한 동물적인 욕망만이 바위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즐거움과 원초적인 쾌락에 대한 강한 기대감이 성일 스스로를 활활 태우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홍화는 새로울 것이 없다는 듯 다소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성일을 바라보다가 이내 석양을 지워나가는 어둠처럼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성일은 그런 홍화의 무장 해제된 마음이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홍화의 매력을 동물적인 본능으로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언제 다가왔는지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성일의 뒤에서 두 사람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감겨 있던 홍화의 눈이 전기충격기에 감전된 것처럼 활짝 열리며 확장된 동공에서 시퍼런 빛이 뚝뚝 떨어졌다.
“세희 씨, 왜 이러십니까?”
“날 사랑한다고 했죠?”
“물론입니다. 우선 이 섬뜩한 나이프부터 먼저 좀 치워주세요.”
“성일 씨의 뜨거운 심장을 가지라고 했죠?”
“예, 했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가질게요.”
“예!”
“제가 가진다고요.”
“그게 무슨…….”
“변성일. 나이 35세. 한국형 TBD(Track before detect) 개발팀장. 기혼자. 부양가족은 결혼 3년차인 아내와 딸 하나. 바람둥이. 평소 회사의 인사기준과 연구원의 열악한 처우에 대해 불만 가득. 이것이 바로 내가 가진 성일 씨의 신원정보입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당신 대체 누굽니까?”
“나 말인가요? 당신과 만나기로 약속한 헤드헌터예요. 물론 약속은 안전을 고려해 사전에 기획한 거고요. 전 보기보다 조심성이 많거든요.”
순간 열린 창문을 통해 달빛에 섞여 들어온 그림자 하나가 우악스럽게 운전석의 도어핸들을 안쪽으로 당겨 차문을 열었다. 은혁이었다. 은혁은 성일을 밖으로 끌어내 두툼하고 커다란 손으로 약점만을 찾아 공격했다. 순간 성일의 입에서 절규에 가까운 신음이 터졌다. 그때 홍화가 성일에게 다가와 손바닥을 펴보였다. 홍화는 성일에게서 건네받은 USB를 들고 도도하게 차가 있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고양이의 우아한 밤나들이였다.
“제가 2년간 피땀 흘린 연구물도 줬잖습니까.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예?”
“그건 내 권한 밖의 일이야.”
“틀림없이 약속한 파일들입니다.”
“지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바로 이것뿐이야.”
“윽! 악!” -
홍화는 핑크색 미니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마치 보석감정사처럼 달빛을 눈에 끼고 USB에 담긴 내용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USB에 담긴 연구파일은 총 44개였다. 임의대로 몇 개를 골라 파일을 열어본 홍화가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텁텁함을 느낀 은혁이 혀를 말아 사탕을 굴리듯 입안을 한차례 훑었다. 뒤이어 그동안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모든 극한의 살인방법들을 복습하기 시작했다. 은혁의 주먹에는 애초부터 예(禮)나 자비(慈悲)란 개념이 없었다. 오로지 고통과 신음만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은혁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성일을 끌고 어딘가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체념의 절벽이었다. 은혁은 주저 없이 실용성이 극대화된 옆차기로 다시 성일의 횡경막 바로 위를 정통으로 타격했다. 순간 늑골이 산산조각 난 성일이 허공에 긴 눈물자국을 뿌리며 절벽 아래의 짙은 어둠 속으로 힘없이 빨려 들어갔다.
“은혁 씨, 우리가 준비한 것도 차에 넣어둬요.”
“필적감정을 하면 변성일의 필체와 다르다는 사실이 금방 밝혀질 텐데 괜찮겠습니까?”
“대한민국 경찰이 그 정도로 치밀하지 않다는 건 이미 충분히 경험했잖아요.”
“경찰은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는 국정원이 의심을 하면.”
“국정원도 거기까지는 냄새를 맡지 못할 거예요.”
“무슨 근거로?”
“우선 변성일은 국책연구기관이 아닌 일반 대기업의 책임연구원이잖아요. 그리고 또 우리가 사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변성일이 다니는 회사에 중국의 헤드헌터가 연구원들에게 고액연봉을 미끼로 스카우트하려 한다고 공작도 했고요. 때문에 만약 필체가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최소한 우리와의 연관성은 수사 초기부터 완전히 배제시킬 수 있을 거예요.”
“내일 남조선 신문 1면은 변성일의 쁘락지 행위로 도배되겠군요.”
“아마도. 자, 이제 상황이 깨끗하게 정리되었으니 우리의 흔적도 지우죠?”
은혁은 성일이 타고 온 차량의 콘솔박스를 열고 제일 위 칸에 자신들이 만든 가짜유서를 남기고 창문을 모두 닫았다. 그리곤 서둘러 자기 차에 올랐다. 이제 홍화와 은혁이 탄 차량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 긴 빛의 꼬리를 흔들며 서울로 곧장 달려가기 시작했다. 홍화는 클러치백에서 담배를 꺼내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은혁이 보기에 홍화의 눈에는 회상이 가득했다. 하지만 홍화가 무엇을 회상하고 있는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저 달려가는 차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바람결에 불어오는 홍화의 탁한 담배연기만이 그녀가 차에 타고 있음을 말할 뿐이었다.
은혁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습관처럼 거실로 뚜벅뚜벅 걸어가 냉장고문을 열었다. 그리곤 러시아의 프리미엄 보드카인 스톨리치나야 레드를 꺼냈다. 보드카에 먹고 남은 주스와 얼음을 섞자 간단한 칵테일이 만들어졌다. 은혁은 시음을 하듯 칵테일에 살짝 혀끝을 담갔다. 그러자 알코올이 혀끝을 마비시키며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은혁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지 보드카잔을 흔들며 소파로 걸어와 몸을 깊숙이 묻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홍화도 보드카를 꺼내 움켜쥐었다. 새콤달콤한 향이 나 평소 그녀가 즐겨마시던 스톨리치나야 라즈베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홍화는 음료수를 마시듯 단숨에 독한 보드카를 쏟아부었다. 오렌지색상의 입술부터 입천장, 그리고 식도를 지나 심장까지 금방 불이 붙어 활활 타올랐다.
“쾅!”
홍화는 자신의 방에 들어오자 방문에 등을 기대고 풀어진 시선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그리고 미니오디오 앞으로 걸어가 빠른 템포의 댄스곡을 튼 다음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손바닥 크기의 속옷이 거칠게 내려지고 차갑던 변기가 보드카로 달아오른 체온으로 덥혀졌다. 홍화는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찾아 물었다. 그리곤 그때까지 허벅지를 파먹고 있던 속옷을 다리에서 완전히 벗겨내 침대를 향해 집어던졌다. 속옷은 얼마 날아가지 못하고 비에 젖은 낙엽처럼 힘없이 침실바닥에 떨어졌다. 홍화는 다시 보드카의 주둥이를 입에 물고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샤워부스로 걸어가 샤워기의 핸들을 돌렸다. 홍화는 누가 부른지도 모르는 댄스곡에 맞추어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유혹하듯 춤을 추었다. 하지만 홍화의 춤은 흥겨운 것이 아니라 처절했다.
“쏴~아~아!”
그사이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하듯 한꺼번에 쏟아지는 물줄기가 머리부터 얼굴, 가슴, 다리, 발끝까지 게걸스럽게 핥아나갔다. 하지만 타들어가는 갈증만큼은 여전했다. 홍화는 쏟아지는 물줄기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뒤로 넘겼다. 그러자 물줄기가 더욱 거세게 홍화의 얼굴을 때렸다. 물기를 머금은 원피스는 홍화의 실루엣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오는가 싶더니 물기를 머금은 타일 위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홍화는 본능적으로 욕실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반쯤 감긴 눈으로 전등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전등이 발효된 빵처럼 부풀어 올라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언가 둔탁한 것이 그녀의 머리를 아주 강하게 때렸다. 홍화는 자신의 머리가 밀가루반죽처럼 말랑말랑 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전원이 나간 가전제품처럼 머릿속의 감정들이 시야에서 모두 지워졌다.
“!”
소파에 드러누워 막 잠의 곁가지 하나를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2층에서 난 날카로운 파열음을 듣고 은혁은 황급히 꿈길에서 발을 뺐다. 그리곤 백 미터 육상선수처럼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방문 앞에서 홍화를 불렀지만 사납고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순간 불길한 물소리가 은혁의 의식을 파먹었다. 은혁은 그 불길함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듯 방문을 부서져라 박찼다. 역시나 홍화가 욕실에서 물소리에 뜯어 먹히고 있었다.
“홍화 동무, 정신 좀 차려보세요. 제 말이 들립니까?”
“…….”
“흠, 맥박이 정상인 걸 보니 잠시 정신만 잃은 것 같군. 홍화 동무!”
“으으으, 너무 그렇게 흔들지 말아요. 아직 나 죽지 않았어요.”
“히유! 이제 정신이 좀 돌아옵니까?”
“보드카를 너무 많이 마셨나보네요.”
“홍화 동무. 이대로 가만히 있으세요. 제가 얼른 1층에 내려가서 얼음주머니 좀 만들어 오겠습니다.”
“으으으. 아니, 됐어요. 은혁 씨, 그냥 내 옆에 잠시만 있어줘요.”
“홍화 동무,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래요. 은혁 씨, 잠깐 다리 좀 빌려줘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은혁 씨, 오늘 나 너무 추해보이지 않아요?”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른 아침 물안개 속에서 핀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훗!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정말입니다. 거기다가 홍화 동무는 공화국에서도 최고의 여전사입니다.”
“그게 정말 내 모습일까요?”
“그게 무슨…….”
“돌이켜보면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이제는 이런 모습이 정말 나처럼 느껴져서 하는 소리예요.”
“두렵습니까?”
“글쎄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언제나 곁에서 지켜주겠습니다.”
“은혁 씨, 고마워요.”
“웁!”
“왜 그러죠. 내 입술이 싫은가요?”
“이러지 마십시오. 난 혁명과업을 함께 하는 여성 동무와는 부화(간통)하지 않습니다.”
“내가 모란꽃소대 출신이라서 그런 건가요?”
“그런 게 결코 아닙니다. 그건 공화국의 위대한 혁명전사를 모독하는 발언입니다.”
“쉿! 그러면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제가 어떻게 감히 홍화 동무를…….”
“그냥 꿈이라고 생각해요. 영원히 우리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오늘밤 우리는 아주 멀리 그것도 지금까지 그 누구도 듣도 보도 못한 미지의 세계로 드라이브를 떠나는 거예요. 이 드라이브가 끝나면 혁명완수를 위한 에너지가 충전돼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에잇!”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우리는 어차피 결과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애쓰지 말아요. 꿈틀거리는 본능처럼 그냥 물길을 따라 흘러가면 그뿐이에요. 물 밖의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요. 바다가 나올 때까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