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63> 비밀의 열쇠

     
    “쏴~아~아!”
    열린 창문은 하늘의 짙푸른 색채를 침실로 끌어들였다. 맑고 고운 햇살이 침실을 가득 채운 눈부신 아침이었다. 오늘 아침은 피오기를 밤마다 희생자를 찾던 전문사냥꾼에서 로맨티스트로 변신시켜 놓았다. 동시에 승리의 터치다운을 통해 더욱 강해지고 성숙해졌음도 느꼈다. 그때 문득 손끝으로 만졌던 꿈과 희망이 어렴풋하게 되살아났다. 홍화의 몸매는 와인보다 더 달콤하고 갈등구조가 치밀한 흥분덩어리였다. 그리고 투명한 유리 화병에 담긴 노란색 장미처럼 손길이 닿을 때마다 주문에 걸린 듯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그런데 갑자기 풍광처럼 귀에 익숙하던 폭포소리가 뚝 끊겼다. 순간 피오기는 피리소리에 반응하는 코브라처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
    “등 뒤에서 강한 눈빛이 느껴지는 걸 보니 이젠 깼나보군요.”
    “벌써 일어난 거요?”
    “간밤에 제가 공들여 부조장 동무에게 심은 환상을 빨리 깰 수는 없잖아요.”
    “피곤하지 않소?”
    “암울하던 세상이 바뀐 건 알겠는데 피곤한 건 모르겠네요.”
    “나도 그렇소. 태어나 세상에서 느낀 가장 큰 전율이었소.”
    “알아요. 짐작은 했지만 진실은 훨씬 더 단순했거든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음, 오늘은 바깥 날씨마저 아름답군.”
    “거울 앞에 선 제 뒷모습이 어떤가요?”
    “!”
    “어떤 말을 해도 괜찮아요. 우린 이제 운명적 동지잖아요. 맞죠?”
    “운명적 동지라, 정말 그렇군. 솔직히 숨겨진 비밀을 몰래 훔쳐보는 느낌이요. 마치 한 번도 본 적 없는 달의 반대편을 보는 느낌이랄까.”
    “! 그럼 첫사랑을 읽는 소녀처럼 설레겠군요?”
    “그렇소.”
    “사실 제가 느낀 동무의 품도 육아낭처럼 따뜻했어요. 아참! 그러고 보니 깜박했네요.”
    “뭘 말이오?”
    “이거요.”
    “!”
    “왜요, 한 번의 입맞춤으로는 부족한가요?”
    “아, 아니오. 충분하오.”
    “귀여운 악마.”
    홍화의 미소가 길고 풍성한 속눈썹 끝에서 노란 꽃가루처럼 흩날렸다. 목소리도 무기질이 풍부한 부드러운 미사(微砂)처럼 피오기의 마음을 비옥하게 만들었다. 홍화는 고급스러운 자수가 수놓아진 작은 속옷 하나만 걸치고 스윙거울 앞에 태연히 서 있었다. 그때 홍화가 피오기의 정면에서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물기를 대충 털어낸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돌돌 말기 시작했다. 자신의 관능미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피오기의 야만성과 소유욕은 아직도 피곤이 덜 풀린 듯했다.
    “!”

  • 피오기는 상황을 정리하고 재구성할 시간이 필요해 다시 침대에 쓰러져 눈을 감았다. 그러자 현실보다 풍만하게 보이던 거울 속 홍화에 대한 잔상들도 하얀 모래알로 부서지며 수면의 파도에 쓸려가기 시작했다. 들뜬 마음이 어느 정도 잦아들 즈음 피오기는 불현듯 깨닫는 게 있었다. 살갗을 송곳처럼 날카롭게 파고들던 차가움이 언제부턴가 의식의 언저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피오기는 릴(감개)을 풀듯 손을 침대 밖으로 휙 던졌다. 그리곤 침대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훑기 시작했다. 침대시트는 세탁물처럼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 시트를 움켜잡는 손가락 끝에 무언가가 걸리어 떨어지며 문 쪽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부조장 동무, 뭐예요?”
    “!”
    “옷에서 떨어진 단추면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세요.”
    “그런 게 아니오.”
    “그럼 뭐죠?”
    “이건 음성신호를 고주파 전류로 바꾸어 원거리까지 전송하는 초소형 무선송신기 같소.”
    “무선송신기요! 그럼 도청장치라는 말씀이세요?”
    “그렇소.”
    “아니, 그런 게 왜 내 방에……. 손가락말(수화)로 할까요?”
    “이미 짓부수어 기능을 상실시켰소.”
    “혹시 남조선의 국정원 반동들이 벌써 여기까지 마수를…….”
    “흠! 국정원이라. 국정원이 무선송신기를 설치했다면 문제가 심각하오. 그것은 남조선 적들이 홍화 동무뿐만 아니라 우리 공작조의 전체 규모와 조원들의 신상파악을 이미 끝냈다는 소리니까.”
    “동시에 우리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됐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맞소! 하지만 현재까지 조장 동무를 비롯하여 조원들이 위험에 노출됐다는 징후를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소.”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이 무선송신기를 하필 홍화 동무의 방에 설치했느냐 하는 점이오.”
    “그거야 당연히 나를 통해 우리 공작조의 활동감시와 조원들에 대한 정보수집을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무선송신기는 거실이나 화원 같은 공동생활구역에서 발견됐어야 보다 설득력이 있소. 그렇다면 아마도 적은 처음부터 홍화 동무 개인을 표적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소.”
    “그 말은 그동안 제가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완벽하지 못했다는 소리인가요?”
    “그보다는 확인되지 않은 적이 특정 목적을 갖고 있다는 의미겠지. 이제부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하오.”
    “비로소 실감하겠네요.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악어들이 우글거리는 늪지라는 사실을요.”
    “그렇소, 무풍지대는 끝났소. 이제 우리는 폭풍의 중심을 지나가야 하오. 어쩌면 공작조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오.”
    “그럼 이제부터 뭘 하죠? 우리도 원수의 가슴에 복수의 날창(대검)을 박는 건가요?”
    “그러기 위해선 먼저 무선전파수신기를 찾는 것이 급선무요. 현재로선 무선전파송신기를 설치한 원수가 누군지에 대한 답이 수신기에 있으니까 말이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라야 말이죠.”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찾아야 하오. 그리고 홍화 동무?”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은밀하게 추진하던 비밀공작의 진행속도를 좀 더 올려야 할 것 같소. 이 송신기야말로 적들의 위험이 우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반역자들이 숨긴 비밀자금을 찾아내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할게요.”
    “경각성을 고도로 높여 최대한 날력하게(재빠르고 세차게) 서두르시오. 자칫하다간 비밀과업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소. 그렇다고 오구탕을 쳐선(야단법석을 떨어선) 절대 아니 되오. 만일의 정황을 가정해 조원들도 짬수(눈치)를 채지 못하게 행동하시오.”
    “그래도 부조장 동무에겐 보고를 해야겠죠. 우리는 운명적 동지잖아요.”
    “물론이오. 그런데 홍화 동무!”
    “!”
    “강은혁 동무에 대해 어케 생각하시오?”
    “부조장 동무가 남자로서의 강은혁 동무를 묻는 건 아닐 테고. 왜죠? 혹시 은혁 동무의 주변에서 이상한 분위기라도 감지됐나요?”
    “딱히 그런 건 아니오. 단지 혁명전투에 대한 열성과 혁명적 불길의 세참이 예전만 못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오.”
    “아, 알겠다! 남조선을 해방시키려는 영웅의 소심함이군요. 맞죠?”
    “흠! 그건 오해요.”
    “하지만 은혁 동무의 돌출행동을 이해 못할 것도 없잖아요. 부주석을 지낸 혁명원로의 외손자로서 출세하고 싶은 격렬한 욕망 말이에요. 그런데 공작조가 사분오열되면 그 꿈이 한순간에 날아가잖아요. 가뜩이나 잘나가는 혁명 2세대 아바지를 둔 까투리(젊은 당정치일꾼)들에 대한 질투도 크던데. 어쩌면 은혁 동무의 도덕의리심과 신념이 그만큼 크다는 건 나쁜 쪽보다 좋은 쪽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혁명투쟁에 대한 충직성과 혁명적 진군을 이어갈 힘이 아직도 남았다는 결정적 담보 같은 거 말이에요.”
    “그런가? 하여간 우리는 숨을 쉬는 매순간이 삶과 죽음의 경계요. 그나저나 하룻밤의 열정으로 은혁 동무와 너무 많은 걸 쌓은 건 아니오?”
    “!”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니 내가 잘못 본 건 아니었군. 하긴 동무의 도발적인 행동은 거부할 수 없는 사슬이지. 그건 어젯밤 내가 이끌렸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고.”
    “! 동무의 그 말은 제가 매혹적이라는 소리로 이해할게요. 그런데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설마 또 잠자는 본능, 욕망과 쾌락 뭐, 기딴.”
    “, 아니에요. 아바지에게는 직접적으로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부조장 동무에게 묻는 거예요.”
    “아바지에게는 물어볼 수 없는 궁금한 사항이라. 그런데 그 답을 내가 알고 있다? 가만! 혹시, 비밀자금의 관리를 담당했던 큰아바지의 죽음과 관련된 사항이오?”
    “역시 제 짐작이 맞았군요. 아바지가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면 분명 큰아바지의 죽음과도 어떤 형태로든 관련됐을 거라고 짐작했거든요.”
    “그래, 궁금한 게 도대체 뭐요. 몸통이오. 아니면 전체 밑그림이오?”
    “저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어요. 큰아바지의 살해를 지시한 장본인이 아바지라는 사실 말이에요.”
    “시작과 끝을 모두 알고 있었군. 그럼 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한 번 맞춰보시오?”
    “현장에서 실질적인 암살공작을 지휘하지 않았을까 하는…….”
    “맞소, 큰아바지 리재경의 죽음을 최종적으로 결정지은 게 바로 나요.”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왜 비밀자금이 남조선으로 송금됐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요. 첫 번째 이유는 자살한 윤일현이란 반동 때문이오.”
    “윤일현요?”
    “그렇소.”
    “그 반동이 비밀자금을 남조선으로 송금했다고 실토했나요?”
    “아니오. 하지만 윤일현은 큰아바지 리재경의 딱친구로 평소 반동적이고 반인민적인 사상문화를 갖고 있었소. 또한 윤일현은 가족 일부를 남조선으로 도주시키기까지 했소.”
    “그러니까 윤일현의 가족에게 비밀자금이 송금됐을 거라는 의혹을 갖는 거군요. 혹시, 그 윤일현이 바로…….”
    “그렇소. 조장 동무의 아바지요.”
    “가족의 비밀이 충격적이네요.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뭐죠?”
    “두 사람의 소지품에서 똑같이 ‘천사’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구가 나왔기 때문이오.”
    “‘천사’요?”
    “상장 동지와 나는 ‘천사’라는 단어가 비밀자금의 행방과 깊은 관련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소.”
    “그렇다면 그 ‘천사’가 지하감옥에 감금된 윤지수?”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가장 높소.”
    “그래서 부조장 동무가 버리는 카드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버리지 못했군요.”
    “최소한 빨리 버려야 할 만큼 안 좋은 패는 아니라고 판단했소. 그게 아니면 비밀자금의 행방을 아는 제3의 인물이 그녀에게 접근할 가능성도 있고.”
    “그럼 조장 동무를 남파한 이유가 윤지수를 회유와 설득하기 위한 목적이었군요?”
    “물론이오. 최소한 윤지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조장 동무니까. 쌍둥이는 감정도 공유한다고 하잖소.”
    “그렇다면 조장 동무는 비밀자금을 찾기 위한 소모품이네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오.”
    “하지만 이미 여러 번 메트라졸(소련이 심문에 사용하던 약물)을 사용했잖아요. 그래도 우리가 윤지수에게서 얻어낸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다면 윤지수가 비밀자금과 관련 없는 건 아닐까요?”
    “내 생각은 다르오. 비밀자금의 가장 완벽한 운용처로 남조선만큼 최적의 나라도 없소. 그야말로 공화국의 허를 찌르는 곳이니까. 그리고 리재경이 남조선과 연결될 수 있는 끈은 윤지수가 유일하오.”
    “문제는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잖아요.”
    “아무튼 우리는 비밀자금을 찾아내 꼭 회수해야 하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김정은에게 막강한 힘을 과시하는 강력한 군사조직을 건설할 수 있소.”
    “듣고 보니 처음부터 모든 게 계획된 것이었다는 소리군요.”
    “나도 그 계획의 일부일 뿐이오.”
    “그럼 저 역시 마찬가지겠네요. 아무튼 진실을 들으니 흥분수위가 빠르게 상승하는데요.”
    “그 말은 홍화 동무가 가진 의혹이 비로소 해소됐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아요. 사실 전 아바지가 자신의 입지와 권력유지를 위해 사사로이 비밀자금을 찾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갈등했고요. 그런데 정황은 잔인하지만 저의 오해였군요.”
    “상장 동지는 조국과 인민을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오.”
    “맞아요. 배고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인민들을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어요. 그래서 너무 기뻐요. 오늘 비로소 아바지의 정의와 희망을 봤거든요.”
    “홍화 동무, 잊지 마시오. 동무는 영광스런 시간에 영광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걸.”
    “물론이죠. 아! 이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졌어요. 목적도 방향도 그리고 제가 짊어져야 할 운명까지도.”
    “임무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홍화 동무는 벌써 전리품부터 챙긴 것 같소.”
    “!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