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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집권 가능성을 우려하는 세력들
자유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 방침이 세워졌는데도,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정부가 세워지게 되면 하지 중장은 이승만이 아닌 김규식을 권력의 자리에 앉힐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이승만의 집권을 반대한 사람들 가운데는 미 군정청의 고위 관리인 정일형 같은 흥사단 계통의 한국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승만이 독재자가 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집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지 장군을 움직여 이승만을 제압할 인물로 서재필(徐載弼) 박사를 미국으로부터 불러왔다. 그러나 서재필은 나이가 너무 많은데다가 미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그들이 바라던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미군정의 연장을 하지 장군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1947년 9월 5일 미군정의 고위층 한국관리들로 이루어진 ‘남조선 과도정부 정무위원회’는 미군정을 연장해야 한다고 미국 정부에 요청하는 서한을 비밀리에 보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여론의 지탄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비밀로 했다. 그 때문에 그것이 제출된 사실은 두 달 후인 11월 초에 가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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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3월 29일 선거인 등록이 시작되자 좌익은 남한 총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파업,시위,폭동,파괴 활동 등의 폭력행위를 벌였다. 선거인 등록을 방해하기 위해 선거사무소 습격과 방화, 선거위원과 입후보자 및 그 가족 살해, 경찰관 살해 등을 벌였다.
북한의 김일성도 남한총선거 반대 성명을 내고 군중집회를 개최함으로써 남한지역에서의 자유총선거 반대투쟁을 부채질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3월 12일 공동성명을 통해 남한만의 선거를 공식적으로 분명히 거부했다. 분단을 영구화시킬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중도파와 함께 총선거를 반대하는 ‘7거두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한 반대 운동에는 미군정의 고문자격으로 와 있던 서재필도 참여했다.
그 때문에 선거 일자가 5월 10일로 결정되었지만, 과연 선거를 치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남북협상파의 등장과 북한의 선거 지연 공작
남북협상은 이미 1947년 10월부터 중도파 정당들의 연합체인 각정당협의회에 의해 추진되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좌익들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채 중도파 정당들 속에 파고 들어가 있는 프락치들을 동원하여 남북협상을 제의하도록 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으로부터 온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들이 들어가 있던 신진당이었다.
1947년 12월, 남북협상 노선에 찬성하는 중도파 군소정당 14개가 연합하여 김규식을 의장으로하는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했다. 그것은 남한단정반대와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할 것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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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김규식은 좌익들의 ‘2.7구국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2월 16일에 남북협상을 제의하는 비밀서신을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냈다.
그러나 북한으로부터는 오랫 동안 회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3월 16일에야 회답을 보내왔다. 소규모의 남북지도자연석회의를 평양에서 열자는 것이었다.
두 김씨는 크게 고무되어 한독당,민족자주연맹,국민의회를 묶어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결성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김일성정권은 평양방송을 통해 4월 14일에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하니,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하자고 제의해 왔다.
그리고는 5 ·10 선거에 반대하는 남한의 17개 단체를 초청했다. 물론 이승만을 비롯해 우파는 북한에 초청되지 않았다.
북한의 제안은 남한의 선거를 미루기 위한 책략이었다. 남한에서 정부가 서지 못해 혼란에 빠지게 되면 혁명이나 무력남침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철수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철수를 소리 높여 요구했던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으로 가려고 하자, 이승만은 두 김씨가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적극 말렸다.
사실 두 김씨와 북한정권 사이에는 사전에 회의에 관한 아무런 협의가 없었기 때문에, 평양에 가더라도 성과는 불투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낸 ‘문화인 108명 연서 남북회담 지지성명’과 같은 것이 나오는 마당에, 두 김씨가 북한으로 가지 않겠다고 의사를 번복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결국 김구는 1948년 4월 19일 북한으로 떠났다. 김규식은 건강을 이유로 이틀을 미루다가 떠났다.
남한의 정부수립을 반대한 평양 4·30공동성명
1948년 4월 20일 김구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가 그 전날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회의는 남한측 핵심인물인 김구와 김규식이 도착하기도 전에 북한의 계획대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회의 일정에 관한 아무런 협의도 없었기 때문에, 김구는 회의 3일째인 4월 22일에 가서야 처음 참석해 축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회의는 다음 날 사실상 끝났다.
북한 마음대로 작성한 일정에 대해 불쾌하게 여긴 김규식은 아예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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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각본에 따라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때문에 남쪽의 참가자들은 당초 우려했던 대로 준비된 잔치에 참여만하는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김규식 일행은 남한에서 5⦁10선거로 세워질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된 이른바 ‘4 · 30 선언’에 서명했다.
그것은 미국과 유엔, 이승만과 김성수를 비난하면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남한 단독선거를 파탄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북한이 이른바 민주개혁을 통해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로 발전할 토대를 굳히고 있다고 찬양했다.
4월 30일에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모임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회담이라기 보다는 회식을 하면서 말을 주고 받는 가벼운 간담회였다.
두 김씨는 38선으로 물길이 끊긴 연백평야에 물을 다시 공급하고 전기도 계속 보내달라고 요구했고, 김일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인 5월 1일에는 노동절 열병식을 참관했다. 그것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까지 참여한 성대한 군사 퍼레이드였다. 그것은 놀랍도록 강해진 북한의 군사력을 남쪽 참가자들에게 보여주려는 전시 행사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5월 5일에 서울로 돌아온 두 김씨는 평양회의가 우리 민족도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성공적인 것이었다는 뜻밖의 주장을 했다.
또한 그들은 4⦁30공동성명이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했다고 찬양하는 동시에, 북한은 남한에 전기 공급을 계속하고 연백평야에 물을 원활히 공급해 줄 것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결코 민족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 것, 즉 북한에 의한 남침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선거 강행
그러자 두 김씨 세력과 좌파 세력이 참가하지 않는 상황에서 치르게 될 5⦁10 선거는 의미가 없다는 비판이 일어났다. 외국 언론도 동조했다.
그 때문에 또다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이 상황에서 과연 선거를 강행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긴급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결론은 선거를 취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거는 강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본격적인 선거 운동이 벌어졌다.
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좌익들의 유혈 테러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미 군정청이 자유로운 선거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이유로 감옥의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풀어준 것이 문제였다.
하지 중장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오기 전에도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테러 혐의로 체포된 669명의 공산주의자들을 사면한 바 있었다.
그런데도 5 · 10 선거를 앞두고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또다시 구속된 공산주의자들의 석방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요구에 응했던 것이다.
석방된 공산주의자들은 선전선행대나 인민유격대 같은 조직을 통해 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테러 활동을 벌였다. 그 때문에 선거 과정에서 100여명이 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