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국회서 "한미 외교 문제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대응"5개월 간 대응 사실상 전무…그사이 쿠팡은 美 정계에 전방위 로비美 백악관‧하원, 韓 향해 "쿠팡은 李정부에 의해 표적" 노골적 압박연구원 출신 배경훈, 정치‧외교 경험 없어 중대 사안 대처 능력 한계민관합동조사단 조사 당시 쿠팡이 자체 조사 발표하는 황당한 일도
  • ▲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뉴시스
    ▲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뉴시스
    "한미 외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가 철저하게 대응할 방침입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 2월 11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쿠팡 관련 질의가 이어지자 이렇게 답했다.

    그러나 5개월이 지난 지금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건은 미국 백악관과 의회가 동시에 한국 정부를 공개 비판하는 외교 현안으로 비화했고 한미 동맹에도 부담을 주는 사안으로 번졌다. 

    정작 쿠팡 조사와 대응을 총괄했던 배 부총리와 과기부는 전면에서 사실상 모습을 감춘 채 외교부와 대통령실이 수습에 나서는 모양새다. 정치권에서는 민간 AI 연구원 출신인 배 부총리가 기술 정책에는 전문성이 있지만 외교·통상·정치가 복합적으로 얽힌 초대형 현안에서는 한계를 드러낸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14일 정치권과 외신 등을 종합하면 미국 조야의 움직임은 갈수록 강경해지고 있다. 미 하원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 1일 '경쟁 차단: 미국인 소유 기업에 대한 한국의 차별적 공격'이라는 제목의 35쪽 분량 보고서를 공개했다. 공화당 소속 짐 조던 법사위원장과 스콧 피츠제럴드 반독점소위원장이 주도한 이 보고서는 해럴드 로저스 쿠팡 한국법인 임시대표의 증언과 쿠팡 제출 자료를 토대로 작성됐다.

    보고서는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을 차별적으로 규제하고 있으며 강압적 조사와 과도한 규제로 미국 기업의 경쟁을 제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한국의 규제가 미국에 5250억달러, 한국에는 4690억달러 규모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으며 한미 무역합의에도 위배된다고 강조했다.

    외교부는 "쿠팡 측 주장만 일방적으로 반영된 사실과 다른 내용"이라며 유감을 표명했지만, 이튿날 백악관이 "쿠팡은 이재명 정부에 의해 표적이 되고 있다"는 취지의 성명을 내면서 논란은 한층 커졌다.

    백악관이 우리 정부 입장을 사실상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쿠팡 사태는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넘어 통상·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양상이다.

    한미 갈등이 확산되자 외교부도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외교부에 따르면 강경화 주미한국대사는 조현 외교부 장관 지시에 따라 15일 일시 귀국해 쿠팡 문제를 비롯해 대미 투자, 한미 안보협의 등 주요 현안을 관계 부처와 논의한다. 주미대사가 현안 협의를 위해 장관 지시로 귀국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한미 현안 관리가 긴박한 상황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한미 간 주요 현안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올해 초 시작될 예정이던 한미 안보협의는 쿠팡 문제와 대미 투자 이행 지연에 대한 미국 측 불만 등이 겹치며 당초 계획보다 수개월 늦은 6월에야 첫 회의를 열었다. 최근에는 미국이 한국의 대미 투자 이행이 더디다는 이유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불만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양국 간 현안이 복합적으로 얽히고 있다는 평가다.
  • ▲ 쿠팡 본사. ⓒ뉴시스
    ▲ 쿠팡 본사. ⓒ뉴시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작 쿠팡 조사를 총괄했던 배 부총리와 과기부의 존재감은 찾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신에 따르면 쿠팡은 올해 1분기 미 의회와 국무부, 재무부, 상무부, 미국무역대표부(USTR), 중소기업청 등을 상대로 총 109만달러(약 17억원)의 로비 자금을 집행했다.

    정치권에서는 "쿠팡이 미국 행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전방위 로비를 펼치는 동안 우리 정부는 어떤 대응 전략을 세웠는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배 부총리는 광운대 전자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LG AI연구원장을 지냈으며 대통령 직속 국가AI위원회 민간위원과 한국인공지능·소프트웨어산업협회(KOSA) AI정책협력위원장을 역임한 AI 전문가다.

    이 같은 전문성을 인정받아 이재명 정부 초대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에 발탁됐지만 정치와 외교가 얽힌 대형 현안에서는 다른 역량이 요구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과기부는 지난해 11월 3367만명 개인정보 유출 사고와 관련해 민관합동조사단을 꾸렸지만 조사 과정에서도 허점을 드러냈다.

    쿠팡은 조사가 진행 중이던 지난해 12월 자체 조사 결과를 먼저 발표하며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지만 실제 저장된 정보는 3000여건이며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다"고 주장했다. 수사 대상이 사실상 자체 수사 결과를 먼저 공개한 셈이었다.

    더욱이 쿠팡은 정보 유출자인 전직 중국인 직원을 직접 접촉해 그가 버렸다는 노트북을 회수하고 자체 포렌식까지 진행했다. 과기부는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뒤 증거인멸 여부를 조사하는 등 초기 대응에서도 허점을 노출했다.

    배 부총리는 지난 2월 국회에서 "외교 및 통상 차원에서도 필요한 대응을 하고 있고 미국 정부와도 계속 소통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과기부 차원의 가시적인 후속 대응은 사실상 없었다. 결국 미국의 압박이 거세지자 대응의 중심은 대통령실과 외교부로 옮겨갔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3일 브리핑에서 "쿠팡에 대한 조사는 모두 국내법상 적법 절차에 따라 비차별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특정 기업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라고 직접 해명했다.

    강경화 주미대사도 이례적으로 귀국해 관계 부처 협의에 나서지만, 정작 쿠팡 조사와 미국 측 대응을 총괄했던 배 부총리는 공개적인 설명이나 별도 대응에 나서지 않고 있다.

    과기부 관계자는 '지난 2월 이후 배 부총리가 쿠팡 사태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느냐'는 질문에 "정부는 계속 노력하고 있다"고만 답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사태가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넘어 한미 통상·외교 갈등으로 확산한 만큼 과기부의 역할과 리더십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과기부 장관이 부총리로 격상된 것은 단순한 기술 정책을 넘어 국가 전략산업과 대외 현안까지 책임지라는 의미"라며 "AI 전문가라는 경력만으로는 부족하고 외교·통상·정무 감각과 위기관리 능력까지 갖춘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