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테너를 창조했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재능 가운데 테너의 목소리가 어떤 악기가 내는 음악보다 시대와 세대를 망라해 으뜸의 감동을 준다는 점을 단적으로 시사해주는 말이다.

     

    유럽에서 오페라가 시작된 17세기 이후 무대를 빛낸 빼어난 테너들이 적지 않았다. 도니제티, 베르디, 푸치니 등 세계적인 작곡가들이 만든 아리아들은 당대의 성악가들이 거뜬히 소화할 정도의 난이도에 맞춘 것들이다. 하지만 녹음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오페라가 만개했던 18~19세기 당시 테너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엔리코 카루소(1873-1921)는 축음기 발명으로 성악가들의 목소리가 녹음되기 시작한 이후 최고의 연주력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첫 사례로 손꼽힌다. 아울러 녹음된 그의 목소리 만으로도 100여년 가까이 ‘오페라의 황제’ ‘테너의 제왕’ ‘성악 발성의 교과서’라는 신화가 깨지지 않고 있다.

     

    그의 위대함은 완벽한 발성에 있다. 중저음은 마치 바리톤, 베이스가 연주하듯 풍성한 소리를, 고음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파워풀한 소리를 분출한다. 그가 남긴 녹음 가운데 오페라 일트로바토레의 만리코 아리아 Di Quella Pira(저 타는 불꽃을 보라) 중 중간 부분에서 하이C를 20초 동안 끄는 부분이 나온다. 단적으로 이 부분만 놓고 평가한다면 100년 동안 이를 흉내낸 테너조차 없는 상황이다.​

  • 카루소를 이어 ‘테너의 2대 제왕’으로 평가받고 있는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는 대중 멀티미디어시대에 오페라를 확산시킨, 20세기 후반 최고의 성악가로 손꼽힌다. 그는 클래식만을 고집하지 않고 대중가수들과 함께 호흡하며 크로스오버 시대를 여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카루소가 ‘발성의 교과서’라면 파바로티는 화려한 고음으로 전세계인들을 사로잡으며 ‘인류 음악사에 성악을 만개시킨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두 사람은 모두 이탈리아 출신이요, 악보를 제대로 읽지 못했지만 두세 번의 연습으로 음을 정확하게 암보한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

     

    다른 점을 찾는다면 카루소의 목소리가 낮은G부터 하이C까지 전 음역에 걸쳐 스핀토(Spinto)한 성질(聲質)의 음악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비해, 파바로티는 저음에서 극고음까지 감성적, 서정적이면서도 강한 음질의 리릭(Lylic)한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두 연주자의 하이C를 비교한다면 카루소는 거대한 대포 소리에, 파바로티는 날렵하게 날아가는 로켓 소리에 비교된다고 할 수 있다.

     

    ▶성악계의 영원한 ‘북극성’ 엔리코 카루소

     

  • 엔리코 카루소는 1873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가난한 집안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카루소가 기술자가 되라고 권했지만, 카루소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창고 인부였던 그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10세부터 공장에 나가야 했던 카루소는 저녁시간에 몰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카루소는 15세부터 베루지네라는 성악코치로부터 정식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베루지네는 처음 카루소의 목소리를 들어보고는 ‘자네는 성악보다는 다른 일을 해보는게 낫겠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카루소는 오페라 가수의 꿈을 접을 수 없었고, 죽기살기로 매달렸다. 카루소의 실력은 점차 급상승했고 소리는 흠 잡을데 없을 만큼 매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카루소는 나폴리 테아트로 누오보에 데뷔하게 된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지휘자 빈센초 롬바르디는 카루소에게 많은 베리스모(사실주의) 오페라 무대를 내줬다. 그는 무대를 탁월하게 소화해냈다.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낸 카루소에게 베리스모 오페라는 체질적으로 잘 맞았던 것이다.

     

    1898년은 카루소에게 음악인으로서 삶의 대전환을 가져온 해였다. 밀라노 라 스칼라 시즌 개막작은 ‘안드레아 셰니에’의 작곡가인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페도라’였다. 이 초연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은 소프라노와 테너는 부부였는데 갑작스럽게 테너가 세상을 떠났고, 카루소가 급히 대타로 섭외됐다. 무대에 선 카루소는 아리아 ‘Amor ti vieta’를 불렀고 관객들의 끊이지 않는 박수에 앙코르로 다시 한 번 불러야 했다. 이어 1901년 라 스칼라의 ‘사랑의 묘약’을 통해 카루소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카루소는 30세가 되던 190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데뷔한 이후 절정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04년에 녹음된 음반은 레코딩의 역사를 바꿔놓는등 인기가 파죽지세로 치솟았다.

     

    하지만 최고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그의 삶을 앞당기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당시 음악가들 가운데 ‘황제’의 위치에 오른 그의 개런티는 치솟았으며, 그는 최고의 몸값에 걸맞는 연주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리게 됐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시즌에 대부분의 주역을 도맡았다. 방대한 레퍼토리를 소화해야 했던 그는 무대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진출해 1921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626회의 메트 공연 기록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그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 소진으로 인해 일찍 쓰러지게 된다.

     

    카루소는 건강 악화로 47세가 되던 1920년에 은퇴했지만 만성 지병이 된 늑막염이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이듬해 세계인의 애도 속에 타계했다.

     

    그의 위대함은 테너 연주자로서 뿐만 아니라 동료 음악인들과 함께 최고의 무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데 있다.

     

  • 1916년 필라델피아에서 메트로폴리탄오페라가 ‘라보엠’을 무대에 올렸을 때의 일이다. 당시 베이스 안드레스 세구롤라가 Coat Song(Vecchia Zimmara)을 부르기로 돼 있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카루소는 ‘무대에서 립싱크만 하면 된다’고 안심시킨 후 무대 뒤에서 세구롤라 연주부분을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관객들은 갈채를 보냈고 아무도 카루소가 대신 부른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성악가로서 그의 최고의 장점은 가벼운 벨칸토 레퍼토리에서 무거운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오페라의 주역 아리아를 다 소화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레제로, 리리코, 스핀토, 드라마티코 등 그가 부를 수 없는 음역대는 없었다.

     

    다만 몸의 일부 만을 악기로 주로 사용하면서 오랫동안 연주한 일부 성악가들과 달리, 카루소는 호흡과 발성에 있어 몸 전체를 공명강으로 이용하는 바람에 삶을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카루소의 노래는 그의 짧은 삶과 맞바꾼 음악인 셈이다.

     

    ▶성악을 전세계에 대중화시킨 루치아노 파바로티

     

    1935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12살이 되던 1947년 고향 모데나극장에서 테너 베냐미노 질리를 통해 성악가로서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된다.

     

    그는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를 뿌리치고 어머니의 격려를 바탕으로 성악가의 길을 택하게 된다. 1955년 파바로티의 소리를 들은 아리고 폴라는 그의 재능과 성실성을 보고 제자로 삼아 2년 동안 무료로 레슨하며 성악가의 토대를 다져줬다.

     

    또 다른 스승인 캄포 갈리아니는 오페라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 스승이었다. 캄포 갈리아니는 4년동안 파바로티에게 작품의 정신세계에 대한 암시와 가수의 상상력을 자극해 곡 해석에 관한 세련된 조언을 해줬다.

     

  • 그는 1961년 이탈리아의 레조 에밀리아에서 열린 ‘아킬레 페리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본격적인 성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음악인으로서 그는 ‘대타’로 출발했다. 1961년 4월 29일 레조 에밀리아 극장에서 ‘라 보엠’오페라의 테너가 갑자기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자 파바로티를 무대에 세우게 됐고, 파바로티는 이 무대의 성공을 토대로 라보엠의 미국 연주까지 거머쥐게 된다. 196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에 데뷔한 파바로티는 1971년부터 주역 오페라가수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1972년 도니제티 작곡 ‘연대의 아가씨’의 토니오 배역 중 Ah mes amis(오늘은 기쁜 날)은 파바로티에게 ‘하이C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안겨줬다. 하이C가 9번이나 나오는 이 죽음의 아리아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테너는 파바로티 이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그는 17번의 커튼콜을 받았다.​
     

  •                                                            
    50세도 되기 전에 타계한 카루소와 달리 파바로티는 철저한 자기 관리로 40년 이상의 오랜 기간을 현역 성악가로 활동했는데, 이는 그가 12세 때 심각한 병에 걸렸다가 기사회생한 경험으로 인해 늘 건강에 철저하게 대비했기 때문이다.

     

    파바로티는 오페라 무대 뿐만 아니라 개인 콘서트와 음반 발표, TV 출연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전 세계에 걸쳐 열성 팬들을 광범위하게 확보했다.

     

    특히 1990년 플라치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시작한 ‘쓰리테너 콘서트’와 대중 스타와 함께 만든 ‘파바로티와 친구들’을 통해 세대를 넘나드는 음악의 아이콘이 됐다.

     

    그는 음악회 역사상 가장 많은 커튼콜을 받은 음악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1988년 2월 24일 베를린의 도이치오퍼에서 사랑의 묘약을 공연할 때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른 파바로티는 무려 167번의 커튼콜을 받아 무대에 나와 인사해야 했다. 박수시간만 1시간이 넘었다. 이날 공연은 ‘열광의 도가니’였다는 표현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 기록은 성악가로서 최다 기록이다.(도밍고는 101회였다.)

  • 파바로티는 2006년 2월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Nessun Dorma(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른 것을 마지막으로, 같은해 7월 뉴욕에서 악성 췌장암 수술을 받았고 다음해 9월 파란만장했던 음악 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탈세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무수한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말년에는(2003년) 35세나 차이가 나는 개인비서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는 등 호색한의 기질을 보여 주기도 했지만 21세기 최고의 음악가 중 한 명이라는데 이견을 제기하는 전문가는 없다.

     

    생전에 만난 적은 없지만, 파바로티는 루치오 달라와 함께 부른 ‘카루소(Caruso)’를 통해 카루소에 대한 존경심을 담기도 했다.

     

    60년 간격을 두고 태어났다가 불멸의 자취를 남기고 사라진 카루소와 파바로티. 두 제왕의 음악은 녹음과 함께 세계 음악사에 길이 기록되고 있다.   /뉴데일리경제 박정규 대표·음악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