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 위기로... 호암과 아산 ‘실패에서 교훈 얻다’
  • ▲ 호암 이병철과 아산 정주영이 1985년 아산 고희연에서 환담하고 있다ⓒ
    ▲ 호암 이병철과 아산 정주영이 1985년 아산 고희연에서 환담하고 있다ⓒ

    ‘나는 실패한 적이 없다. 어떤 어려움을 만났을 때 거기서 멈추면 실패가 되지만, 끝까지 밀고나가 성공하면 실패가 아닌 것이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마쓰시타전기그룹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는 누구나 실패했을 때, 그 실패를 철저히 반성하고 교훈을 얻어 다시 뛰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선대회장 역시 ‘실패’를 성공으로 가는 과정으로 진단했다. ‘실패’에 대한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견해와 호암, 아산의 시각은 마치 서로 입을 맞춘 것처럼 유사하다.

     

    호암은 최선을 다했으나 결과가 미진하거나 실패로 귀결돼 사기가 저하된 임직원들에게 종종 ‘실패와 좌절에서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산은 ‘실패를 거울 삼아 다시 도전하면 오히려 더 큰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며 절대긍정의 자세를 주문했다.  

     

    미국, 유럽의 경영학계에서도 ‘아시아적 가치를 토대로 세계적 기업으로 키운 경영자들’로 칭송받고 있는 마쓰시타, 호암, 아산은 창업해 승승장구하다 여러차례 악몽의 나락까지 치달은 상황에서 재기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업하는 과정에서 여러차례 처절한 실패를 겪었지만, 실패 그 자체 만을 부정적으로 곱씹거나, 실패에 머물지 않고, 성공을 위한 밑거름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파죽지세로 사업 확장... 하루 아침에 파탄나다 

     

    이병철은 일본 와세대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수년간 서울을 오가며 방황하다 26세 때 부친으로부터 300석분의 토지를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김정수 등 2명과 1만원씩 총 3만원을 출자하는 방식으로 동업해 도정업을 시작했다. 벼를 사다가 껍질을 벗겨 쌀을 만드는 일이었다. 첫 해에는 적자를 냈지만, 다음해에는 3만원의 출자금을 빼고도 2만원의 이익을 냈다.

     

    이병철은 정미소 경영을 통해 얻은 이익금으로 운수사업에도 손을 대 쏠쏠하게 이익을 봤다.
     
    ‘사업이 생각보다 쉽구만!’ 이라고 생각한 이병철은 또 다른 사업에 손을 댔다. 토지를 구입하기로 생각한 것이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땅을 사들인 뒤 소작을 맡겨 농사를 짓게 한 뒤, 쌀을 팔면 은행이자를 갚고도 이익이 된다는 계산이었다.

     

    은행자금을 활용한 사업은 기대이상으로 잘 되어 사업을 시작한지 불과 1년 만에 이병철은 200만평의 대지주가 됐다. 약관 20대에 경남 일대에서는 최대의 지주가 된 것이다. 토지매입도 김해평야에서만 그치지 않고 부산, 대구 등지까지 뻗혀 나갔다.
     
    거침없을 것 같은 그는 그러나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느닷없이 중일전쟁이 터진 것이다. 1937년 3월 터진 중일전쟁으로 일본정부는 은행의 대출을 중단하는 비상조치를 취했다.

     

    이병철은 그 때의 일을 청천벽력, 즉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표현했다.

     

  • ▲ 호암 이병철이 토지사업으로 파탄난 후 재기한 대구의 삼성상회ⓒ
    ▲ 호암 이병철이 토지사업으로 파탄난 후 재기한 대구의 삼성상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일으켜 놓았던 정미소와 운수회사마저 날려 버리게 됐다. 사업이 잘 되어 돈을 많이 벌고 있을 때에는 귀찮을 정도로 몰려들었던 친구들마저도 그가 사업에 실패하자 한사람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평생에 처음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을 겪었다. 그리고 소중한 교훈을 얻는다.

     

    그가 얻은 교훈은 첫째 사업할 때는 국내외 정세를 정확하게 볼 것, 둘째 과욕을 버릴 것, 셋째 요행을 바라지 말 것, 넷째 대비책을 강구할 것, 다섯째 실패라고 판단되면 미련을 버릴 것이었고, 평생의 교훈으로 뼈에 새겼다.

     

    그는 이후 1938년 3월께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하며 ‘별표국수’ 사업에 나섰다.

     

    호암은 아내, 아이들과 함께 공장 모퉁이 아주 작은 방에서 생활하며, 24시간 돌아가는 국수기계 옆을 떠나지 않고 매진한 끝에 재기에 성공한다.

     

    ▶정치와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교훈 뼈에 새기다

      

    한국전쟁 중 미군부대 발주공사로 재미를 본 정주영은 전쟁 후 정부가 발주하는 복구공사에 적극 뛰어들기로 했다. 이듬해 따낸 것이 낙동강의 ‘고령교’ 공사였다.

     

    1954년 4월 수주한 고령교 공사는 그때까지 정부가 발주한 공사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대구와 거창을 잇는 이 다리는 지리산에 숨어 있는 빨치산 토벌을 위해 정부가 복구를 서두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현대가 수주했으나, 물살이 빨라 착공 후 1년이 지났는데도 교각 하나도 제대로 박아 넣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착공 때 700환으로 책정한 기름 단가가 2,300환으로 급등했다.

     

    회사 재정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일당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사무실은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돈을 갚으라고 아우성이었다.

     

    정주영은 눈 앞이 캄캄했지만 신용을 지키기 위해 고령교 어떻게든 공사를 완공시키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친·인척들과 동업자들의 집을 팔아 추가 자금을 마련했다. 1955년 5월 악몽의 고령교가 완공됐다. 계약 금액이 5,478만환이었는데, 적자가 6,500만환이었다. 2년 동안 이루말할 수 없는 고생 끝에 자기돈 6,500만환을 고스란히 털어먹은 꼴이다.

     

    자기 돈 내놓으라는 빚쟁이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정주영은 고령교 공사로 진 빚의 잔금을 갚는 데만 20년이 걸렸다. 수업료 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인플레가 이렇게 심할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건설 현장에서 장비의 중요성도 이 때 막대한 수업료를 내고 깨달았다.

     

  • ▲ 호암 이병철이 토지사업으로 파탄난 후 재기한 대구의 삼성상회ⓒ

    정주영은 그러나 이 때 정부로부터 ‘신용’을 얻었고, 그 신용을 바탕으로 한강 인도교 공사를 수주하며 재기할 수 있었다.

     

    호암과 아산은 특히 평생에 걸쳐 정치와 관계를 맺으며 큰 도움도 받은 적이 많았지만, 엄청난 곤경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들은 결국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게 됐다.

     

    혼신을 다해 세운 한국비료를 사카린 밀수사건 때문에 고스란히 정부에 넘겨야 했던 호암. ‘사실은 대통령이 이런 약속을...’ 하며 모든 것을 국민들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평생 정치인들로부터 당하다가 ‘아예 내가 대통령이 되면 치사하게 살 필요 없을 것’이라며 대통령에 도전했던 아산은 대선 패선 이후 김영삼 정부로부터 현대그룹 계열사 고강도 세무조사, 검찰 조사를 비롯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죽기살기로 도전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소신은 사업에는 통했지만, 정치는 전혀 다른 무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