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판 '사면초가'…음악 통한 소통의 위대함 알리는 공익광고

  1915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한스 라이프(Hans Leip)라는 시인은 자신의 연인이었던 릴리 마를렌(Lili Marleen)을 그리워하며 시를 한 편 썼다. 한 젊은 초병이 연인인 릴리 마를렌과 밤마다 밀회하던 일을 추억하는 내용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조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1937년 이 시가 노래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당시 히틀러의 선전담당참모였던 요세프 괴벨스는 이 노래를 금지시킨다. 군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이유였다. 

  1941년, 세르비아 벨그라드에 주둔한 독일군 방송국이 폭격을 받았다. 폭격에 살아남은 몇 장 안 되는 음반 중에 ‘릴리 마를렌’이 있었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밤마다 방송됐다. 이내 이 애가는 전 유럽에 퍼졌고, 나치에 반대하던 독일의 영화배우 마를렌 디트리히가 새로 녹음한 버전 역시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영국군은 그 때부터 유럽대륙에 나가는 모든 병사들에게 ‘릴리 마를렌’을 독일어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심리전을 위해서였다. 


  •   비영리단체 ‘음악에겐 적이 없다(musichashoenemies.com)를 위해 미국의 광고대행사 라틴웍스(Latinworks)가 대행한 ‘음악에겐 적이 없다’ 시리즈 중 한 편은 바로 당시의 한 일화를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다. 

      진지에 혼자 남은 독일군 저격수가 영국군을 한 명씩, 한 명씩 총으로 쓰러뜨리고 있다. 영국군 나팔수는 생각한다. 저 녀석도 우리만큼이나 무섭고 외로울 거야. 나팔수는 트럼펫으로 릴리 마를렌을 연주한다. 이내 독일군 저격수가 울면서 투항한다. 한나라 건국 전에 생긴 고사 사면초가(四面楚歌)와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광고 속에서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조금 달라 보인다. ‘사면초가’가 적에게 둘러싸여 사기가 떨어지는 상황을 강조한다면, ‘릴리 마를렌’에선 내 이야기, 내 감정을 노래하는 사람들을 차마 죽일 수 없는 심정이 두드러진다. 음악이 위대하다고 하는 건 단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만이 아니다. 서로 다른 말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끼리 공감하고 교감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제 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미사일이나 무인 폭격기가 전투를 대행하는 지금, 적진에서 마주친 적군과 교감할 기회는 거의 없다. 그들도 같은 사람이란 걸 돌이켜 깨달을 기회가 없는 것이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 원인은 대량 살상무기의 파괴력뿐만 아니라 적군을 같은 인간으로 인식할 수 없는 현대전 방식에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 그저 음악이 또 다른 광기와 폭력을 조금이나마 억제할 예방약 역할이라도 해주지는 않을까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