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대반격! 평결 주도한 배심원장 '자격 문제' 거론벨빈 호건, 삼성 협력사와 소송 벌이다 패소한 전력 숨겨
  • "삼성전자 제품과 애플의 제품들은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 모양으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앞면이 평평한 점도 비슷하구요."

    삼성전자와 애플의 미국 특허소송전에서 평결을 주도한 배심원장은 양사 제품 디자인의 유사성을 거론한 뒤 삼성전자가 의도적으로 애플의 디자인 특허를 침해했다고 단정지었다.

    '모서리가 둥글고 직사각형'이라는 광의적이고 모호한 설명이었지만, 별다른 전문지식이 없던 배심원들은 배심원장의 '일방적 주장'에 동조, 애플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 현지시각으로 8월 24일 캘리포니아 연방북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과 애플의 특허소송 '1심 평결심'에서 9명의 배심원들은 애플이 제기한 7건의 침해주장 중 한 건을 제외한 6건을 인정했다. 반면 삼성이 제기한 5건의 통신특허 침해 주장은 모두 기각했다.

    배심원단이 정한 배상액은 약 1조1,910억원(한화). 약소국가의 1년치 예산과도 맞먹는 수준이다.

    이날 평결에 참여한 배심원 중엔 벨빈 호건(배심원장)처럼 소프트웨어 전문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전거상 직원이나 가정주부, 사회복지사 같은, IT 업계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전문성이 떨어지는 평범한 시민들이 기업의 '생사'를 가늠하는 중차대한 평결을 맡은 셈이다.

    이에 따라 업계 일각에선 이번 재판을 두고 "미국 배심원 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며 볼멘 소리를 감추지 않고 있다.

    한 국내 법조계 관계자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일들이 세계 최고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미국 재판부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믿겠느냐"며 국수주의에 기댄 美법조계를 맹비난했다.

    "막대한 개발비를 쏟아부은 첨단기술제품의 '생명 연장' 여부를, 자전거가게 직원과 건설사 회사원, 보험사 직원들이 이러쿵 저러쿵 의견을 내놓으며 결정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 기막힌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게 미국 법조계의 현실이죠."

    별 다른 기술적 검토 없이 '복잡다난한 사안'을 고작 22시간 만에 마무리 지은 점도 논란거리다.

    현지에서도 이번 배심원 평결은 700여 개에 달하는 질문 사항을 일일히 검토해야 하는 만큼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전망됐었다. 하지만 "애플이 피해자"라는 결론은, 하루도 안되는 짧은 시간 만에 처리되고 말았다.

    이와 관련, 배심원 중 한 명인 '마뉴엘 라간'은 미국 현지 IT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증언을 한 바 있다.

    그는 "평의가 열린 첫 날 배심원간 이견차가 발생해 열띤 논쟁이 벌어졌는데 배심원장이 선행 기술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배심원들에게 설명하자 이후의 평의가 아주 쉽게 풀렸다"고 밝혔다.

  • ▲ 벨빈 호건  [사진 = 조선일보DB]
    ▲ 벨빈 호건 [사진 = 조선일보DB]

    현지 보도에 따르면 당시 배심원장 벨빈 호건은 배심원단이 애플 특허가 유효한 것으로 판단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배심원단은 삼성전자의 제품들이 애플의 어떤 특허를 침해했는지를 평가하는 순서를 밟았다. 사실상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평결을 내렸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25일(현지시각) 금융정보전문지 <톰슨로이터>가 이번 특허전의 최대변수가 될 수도 있는 '놀라운 사실'을 타전했다.

    배심원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실질적으로 평결을 주도한 벨빈 호건이 과거 삼성과 협력을 맺고 있는 회사로부터 소송을 당해 파산당한 사실을 감춰왔다는 것.

    <톰슨로이터>는 삼성전자가 최근 미국 법원에 '평결불복법률심리(JMOL)' 신청서를 제출한 사실을 거론하며 "이 서류에는 벨빈 호건이 삼성전자와 우호적 협력관계를 맺은 시게이트와 소송을 벌여 진 사실을 담당 판사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폭로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월 하드디스크(HDD) 사업부문을 시게이트에 매각하고 시게이트 지분 9.6%를 인수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보도에 따르면 호건은 1980년대 시게이트사에 취직한 뒤 콜로라도주에서 캘리포니아주로 이사를 했는데, 당시 콜로라도 자택에 대한 부동산 담보대출금을 시게이트와 분담하기로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호건이 1990년대에 해고되자 시게이트는 호건을 상대로 "시게이트사에 부동산 담보대출금 분담 비용을 갚으라"는 요구사항을 내걸어, 양측간 골이 깊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양측은 맞소송을 냈는데 그 과정에서 호건은 개인파산을 신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문제는 호건이 이번 삼성 vs. 애플의 특허 소송에 배심원으로 선정될 당시, 이같은 과거 전력을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호건은 루시 고 판사가 진행한 배심원 심문선서에서, 2008년 한 프로그래머가 소프트웨어 소유권을 주장하며 자신을 고소했던 사실은 밝혔지만 1993년 있었던 시게이트와의 소송건에 대해선 일절 말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호건은 <톰슨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행적 모두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아 당시 소송건을 밝히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 법조계 전문가는 "보도 내역이 사실일 경우, 정황상 배심원장이 삼성전자에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평결에 임했다고 의심해 볼 수도 있다"며 "종전에 나온 배심원 판결이 무효로 뒤집힐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전망했다.

    애플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제기한 특허침해 본안소송은 판사의 결정만 남긴 채 모두 마무리된 상태다.

    하지만 재판부가 호건의 행위를 '배심원의 비행(misconduct)'으로 간주, 배심원 평결을 무효 처리할 경우 이번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공산이 높다. 때에 따라서 배심원장 호건을 심문하는 '증거 청문회' 등 새로운 재판이 열릴 가능성도 있다.

    삼성전자는 '평결불복법률심리' 신청서를 제출, 법원에 '새 재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