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명 중심 처방·제조 편중·재고 불일치가 만든 '약국 뺑뺑이'공급망과 처방·조제 시스템의 결합적 개편 없이는 혼란 불가피필수약 공급난, 대책 못찾고 직역 갈등으로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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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주] 필수약 공급망은 흔들릴 때마다 위기 징후가 드러났지만 그때마다 '일시적 품절'로 봉합되며 근본 진단은 뒤로 밀렸다. 최근 몇 년 사이 채산성 악화, 위해성관리계획(RMP) 강화, 제조 기반 노후화, 원료 조달 불안이 한꺼번에 겹치며 민간 중심의 공급 구조가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현장은 이미 수술실·중환자실·희귀질환 치료 영역에서 대체약 공백을 체감하고 있다. 뉴데일리와 메디팜스투데이는 이를 국가 보건안보 체계의 균열로 보고 '왜 지금 필수약이 무너지고 있는가', '공공과 시장은 어떤 방식으로 다시 책임을 나눠야 하는가'를 구조적으로 점검했다. 또 공급망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정책적·산업적 해법을 연속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약 품절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한국의 처방·조제 시스템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동일 성분의 약이 시장에 충분히 존재해도 처방전의 특정 브랜드명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환자는 약을 받지 못하고 '약국 뺑뺑이'를 반복했다. 성분명 처방은 이 병목을 해소할 수 있는 장치로 주목받고 있지만 공급 기반 자체가 취약한 상황에서 한계가 있다.

    ◆ 폼절약 사태 연속 … 상품명 중심 구조의 취약성

    한국의 처방전은 특정 회사의 상품명을 기재하는 방식이 기본값이다.

    동일 성분이라도 제조사가 다르면 브랜드명은 모두 다르고, 의사가 어떤 브랜드명을 기재하느냐에 따라 약국의 조제 범위가 사실상 결정된다. 법적으로는 대체조제가 가능하다고 돼 있지만, 실무에서는 브랜드명이 강제력을 가지는 구조다.

    5세 아이의 고열로 병원을 찾은 서울 양천구 김모 씨는 처방전의 특정 브랜드 시럽제가 품절이라는 이유로 약국 세 곳에서 같은 답을 들었다.

    약사로부터 "동일 성분의 약은 있지만 바꿔드리기 어렵다. 병원에서 다시 처방을 받아와야 한다"는 안내를 들은 뒤 병원–약국을 되돌아가는 상황을 겪었다. 이는 개별 환자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적 현상이다.

    대체조제가 가능한 품목조차 처방전 브랜드명 때문에 조제가 막히고, 약국은 반복되는 품절·변경 요청을 하루에도 수차례 조율해야 한다. 경기도의 한 약사는 "같은 성분의 제품을 확보하고 있어도 브랜드명이 다르면 조제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답답하다"고 말했다.

    결국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논쟁이 아니라 지금 당장 복용할 약을 받을 수 있는 구조다.

    더 큰 문제는 필수의약품처럼 생산 기업이 소수에 불과한 경우다. 한 회사의 일시적 공급 중단만으로도 해당 브랜드가 시장에서 사라지고, 약국은 동일성분의 타사 제품을 보유하고 있어도 조제할 수 없다. 환자는 약국을 전전하다가 결국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재진료와 처방 변경을 받아야 한다.

    필수약 품절이 일어날 때마다 동일 성분의 약이 충분히 있음에도 처방전의 브랜드명이 없어서 약을 받지 못하는 모순이 반복돼 왔다. 소아·분만·수술·항암 영역의 위기와 연결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성분명 처방 논란… 본질은 '처방권 침해'가 아니라 '공급망 취약성'

    정부는 반복되는 조제 혼란을 줄이기 위해 성분명 처방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성분명으로 처방하면 약국이 즉시 동일성분 대체가 가능해져, 약국 전전·재진료·재처방 같은 2차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의사·약사 단체의 시각은 극명하게 갈린다.

    의료계는 성분명 처방이 의약분업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우려한다. 동일성분이라도 제형·첨가제·생체이용률에서 차이가 생기고 특정 제품을 택하는 데에는 의사의 임상적 판단이 개입돼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체조제 후 부작용이 발생하면 책임 소재가 모호해지는 점도 문제로 제기된다. 공급기반을 해결하지 않은 채 처방만 바꾸는 건 본질을 비켜간 것이라는 중론이다. 

    반면 약계는 환자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본다. 필수약 품절이 상시화된 상황에서 동일 성분의 대체를 신속히 허용해야 환자가 제때 약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성분명 처방은 처방권 침해가 아니라 품절 시 환자 피해를 줄이는 안전장치"라고 주장했다.

    두 단체의 충돌 너머에서 드러나는 본질은 하나다. 성분명 처방 논란은 '공급망 불안정'이 만들어낸 시스템 균열의 부산물이라는 점이다.

    ◆ 공급망이 흔들리면 성분명 처방도 '반쪽' …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

    성분명 처방의 장점은 분명하다. 품절 시 대체조제가 빨라지고, 재진료와 재처방이 줄며 특정 브랜드 과의존이 완화된다. 그러나 성분명 처방은 공급 중단 자체를 해결할 수 없다.

    공장이 멈추면 어떤 방식으로 처방하더라도 시장에 약 자체가 없다. 필수약 위기의 근본은 원료 의존도, 낮은 약가 구조, 생산시설 노후화 등 공급망의 취약성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성분 간 약효 차이와 부작용 발생 시 책임 분류, DUR·EMR 기반 이력 관리, 약국–도매 재고의 실시간 확인 체계 같은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져야 성분명 처방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결국 성분명 처방은 공급망 강화와 결합할 때만 실효성을 가지는 '보완 장치'이며 단독 정책으로는 품절 해결의 핵심이 될 수 없다.

    ◆ 해외는 왜 가능한가 … 성분명 조제 정착한 국가는 '신뢰 기반'이 달라

    영국은 NHS가 성분명(INN) 처방을 원칙으로 운영한다. 정부가 약효 동등성을 직접 보증해 대체조제가 일상적이다. 공급 불안이 생기면 국가 차원의 조정 시스템이 즉시 가동되는 점도 특징이다.

    호주는 성분명 처방과 대체조제가 널리 정착돼 있다. 반복된 품절 사태 이후 정부는 재고 의무·모니터링 체계를 강화했고 동일성분 간 대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환경을 구축했다.

    일본 역시 처방전 서식 개편, 제네릭 신뢰도 강화, 대체조제 기본값 전환 등 단계적 접근을 통해 성분명 기반 조제를 문화로 정착시켰다.

    세 나라 모두의 공통점은 단순하다. 대체조제를 가능하게 하는 '신뢰 기반 인프라'를 국가가 구축했고 약효 동등성을 정부가 책임진다.

    반면 한국은 상품명 처방이 관행화돼 있고, 사전통지 의무 등으로 형식적 허용에 그친다. 필수약이 끊기면 대체약이 있어도 환자가 약을 못 받는 구조는 이 문제에서 발생한다.

    성분명 처방 논란은 필수약 위기와 직접 연결됐다. 공급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상품명 중심 처방 구조는 조제 병목을 만들고 환자 이동·재진료·반복 처방이라는 비효율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분명 처방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생태계 변화가 필요하다. 

    논쟁의 핵심은 '누가 권한을 가지느냐'가 아니라, 품절 상황에서도 환자가 지금 당장 복용할 약을 받을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