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제자리 … 민간 의존 구조의 한계 드러나보고·TF·미봉·재품절의 10년 순환 … 생산기반 복원이 핵심 과제 부상공공개입·원료 국산화·데이터 통합 없인 필수약 공급난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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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필수약 공급망은 흔들릴 때마다 위기 징후가 드러났지만 그때마다 '일시적 품절'로 봉합되며 근본 진단은 뒤로 밀렸다. 최근 몇 년 사이 채산성 악화, 위해성관리계획(RMP) 강화, 제조 기반 노후화, 원료 조달 불안이 한꺼번에 겹치며 민간 중심의 공급 구조가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현장은 이미 수술실·중환자실·희귀질환 치료 영역에서 대체약 공백을 체감하고 있다. 뉴데일리와 메디팜스투데이는 이를 국가 보건안보 체계의 균열로 보고 '왜 지금 필수약이 무너지고 있는가', '공공과 시장은 어떤 방식으로 다시 책임을 나눠야 하는가'를 구조적으로 점검했다. 또 공급망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정책적·산업적 해법을 연속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한국의 필수약 정책은 정권마다 출발점은 달랐지만 결과는 놀라울 만큼 비슷했다. 박근혜 정부는 필수약 지정제를 도입했고 문재인 정부는 안정공급 협의회를 확장했으며 현 정부는 필수약 공급망 안정화를 국정과제로 격상했다. 그러나 흐름을 구조적으로 정리하면 '정책 발표 → TF 운영 → 보고제 강화 → 대체 가능 품목 논의 → 제한적 약가 인상 → 공급난 재발'이라는 일정한 패턴으로 귀결돼 왔다.이 과정에서 정책은 대개 '관리·보고 중심의 미세조정' 단계에서 멈췄고 정작 생산기반을 복원하거나 지속성을 확보하는 조치는 뒤로 밀렸다. 결국 근본 구조가 바뀌지 않은 채 정책만 반복되는 프레임이 고착됐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李 정부 약가개선 드라이브 … 한계점 노출정부는 최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를 통해 퇴장방지의약품 지정 기준 상향, 원가 보전 기준 현실화, 국가필수의약품 약가 우대 확대 등 개선안을 내놨다. 겉으로 보면 제도적 기반이 한 단계 전진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장의 시각은 정반대로 흐른다.제도 자체가 공급안정의 '방파제' 역할을 하지 못해온 구조적 한계가 이미 수차례 확인됐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제네릭(복제약) 40%대로 가격 조정 여파는 약가인하를 기반으로 제약산업 생태계를 옥죄는 형태여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진단이다.본질적으로 퇴장방지의약품은 환자 진료에 필수적이지만 경제성이 없어 원가 보전이 필요한 약이고 국가필수의약품은 시장 기능만으로 공급이 어려운 품목을 정부가 지정·관리하는 체계다. 그러나 이 제도들이 작동하는 동안에도 필수약 공급난은 반복됐다.지난 정권에서도 공급 불안을 줄이기 위해 민관협의체를 17차례 이상 열었지만 실효성은 없었다. 식약처·복지부·질병청·심평원·제약계·약계가 모두 참여했음에도 권한이 분산된 구조에서는 실제 조정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회의는 반복됐지만 생산 포기 위험이 있는 품목은 늘었고 원료 수입 불안은 심화됐다.'품절 이후의 상황을 정리하는 역할'에 머무르며 생산 기반을 복구하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 같은 구조적 공백은 필수약 정책이 왜 현장 변화를 이끌지 못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결국 지금의 공급난은 정책 실패라기보다 애초 설계된 구조의 한계라는 평가에 가깝다. 원료의약품의 해외 의존도는 90%를 넘고 구형 설비 기반의 생산 공장은 대부분 중소 제약사가 부담해왔다. 이들 기업은 수익성이 낮은 품목에서 생산을 유지하기 어렵고 원료 가격 변동이나 GMP 규제 강화가 발생할 때 가장 먼저 충격을 받는다.민간 기업의 '선의'와 '의지'에 의존해온 체계로는 필수약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수차례 확인됐다. 현장이 "지금의 위기는 일시적 품절이 아니라 민간 중심 구조가 도달한 자연스러운 한계"라고 진단하는 이유다.◆ 해외는 이미 '공공 개입' 전제로 … 필수약은 국가가 책임지는 기반시설미국·EU·일본은 필수약을 보건안보 자산으로 규정하고 국가 주도의 개입을 제도화하고 있다. 미국은 비상시 생산라인을 동원할 수 있는 법적 틀을 갖추고 공공·병원·민간이 공동 출자한 준공공 제약사를 통해 필수약을 장기 고정가격으로 공급한다.EU·프랑스는 공공펀드로 생산설비를 개선하고 원료·중간체·완제품을 잇는 국가 단위 공급망을 조성한다. 일본은 원료 국산화 프로젝트를 정부가 직접 운영하며 일부 필수약은 공공 위탁생산을 통해 생산 중단 자체를 제도적으로 차단한다.이들 국가는 공통적으로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구간을 정부가 책임지는 구조를 택하고 있다. 필수약 공급을 단순 시장 기능에 맡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과의 구조적 차이가 드러난다.◆ 한국형 공공생산·유통 네트워크 … 실효성이 담보돼야약가 개편으론 필수약 공급난을 대응하기 어렵다. 중소제약사들은 제네릭 40%대 조정이라는 악재로 인해 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결국 공공개입을 전제로 한 생태계 조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26~2030년을 목표로 한국형 공공생산·유통 네트워크 구축을 추진 중이다. 긴급도입 필수약 40개 품목 중 약 25%를 공공 위탁생산 체계로 전환하고 원료·중간체·완제품을 잇는 국산화 로드맵을 제시했으며 재고·유통 데이터의 단일 플랫폼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이 체계가 현장에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반이 선행돼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가장 핵심은 필수약 생산을 지속할 수 있도록 경제적 기반을 재설계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현재 중소·중견 제약사가 감당하는 생산비는 시장가격으로 회수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에 생산을 이어가도록 보장하는 조달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또한 원료 단계부터 완제품까지 이어지는 공급 기반의 복원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원료 의존도가 높은 품목은 글로벌 변동성이 곧바로 국내 품절로 이어져 원료→중간체→완제품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생산 역량을 국가가 전략적으로 구축하는 바람직하다.여기에 노후화된 설비를 현대화할 수 있는 기술·재정 지원, 그리고 재고·유통 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데이터 기반이 결합돼야 한다.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제약사·도매·약국 간 재고가 일치하지 않아 정부의 조정 기능이 뒤늦게 작동하는 사례가 반복돼 왔다. 공급망 개편은 이 지점을 전면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공공생산체계는 특정 정부의 사업 아냐 … '보건안보 인프라' 재정의필수약 공급난은 특정 품목에서 발생한 단발성 문제가 아니다. 팬데믹, 지정학적 위험, 원료 수급 난항, 낮은 약가 구조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장기적 위기다. 단기 처방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며, 민간 기업의 자발적 생산에 의존하던 방식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한국형 공공생산체계는 필수약을 시장의 변동성에서 분리해 국가가 지속성을 보장하는 첫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반대로 이번에도 정책이 중간 단계에서 멈춘다면, 정권마다 반복됐던 과거의 실패는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공공생산체계는 특정 정권의 의제가 아니라 향후 10년 한국 의료체계의 안전성과 직결된 기반시설이다. 필수약 공급망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는 보건안보의 수준을 결정하는 문제이며 공공과 민간의 역할을 어떤 방식으로 재정의하느냐가 한국 필수약 정책의 성패를 가르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