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을 어떻게 수행해 나갔을까? 그는 임진왜란 이후 민족최대의 위기인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았으나 40년간 독립운동을 통해 단련된 평정심을 잃지 않고, 국가지도자로서 취해야 될 조치를 의연하게 처리했다.
      그가 전쟁 초기 위급한 다급한 상황에서 대통령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국가수호를 위해 내린 조치는 크게 4가지이다.
      첫째,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이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장(場)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둘째, 한국민은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총력전을 펼치겠다. 셋째, 금번 북한의 불법남침을 남북통일의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겠다. 따라서 해방후 미ㆍ소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어진 38도선은 북한이 먼저 침범했기 때문에 이제 필요 없어졌다. 넷째, 이 위기를 타개하고 북진통일을 위해서는 미국과 유엔의 지원이 필요하다.
      이대통령의 이와 같은 판단과 조치는 전쟁발발 얼마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전쟁 발발 약 7시간 후인 1950년 6월 25일 오전 11시 35분 경무대에서 무초 미국대사의 방문을 받고 “한국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이 되었던 제2의 사라예보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이 위기를 이용하여 절호의 기회가 될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북한의 전면기습 남침이 신생 대한민국에게 최대의 위기임에 틀림없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국민이 돌멩이나 몽둥이라도 들고 나와 싸울 것이다”라며 총력전 의지를 밝혔다. 그는 이런 연장선상에서 이를 최대로 이용해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남북통일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했던 국가지도자였다. 범인(凡人)으로서는 전쟁이라는 위급한 시기에 생각지도 못할 이대통령의 이런 생각은 전쟁기간 동안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이대통령의 전쟁목표 내지는 그가 반드시 달성해야 될 국가과제로 여겼다.
      이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무초 대사와 회담을 마친 후 주미대사관의 한표욱 참사관과 장면 대사에게, “저놈들이 쳐들어왔어. 우리 국군은 용맹스럽게 싸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격퇴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결심과 각오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든 미국의 원조가 시급히 도착하도록 노력해야겠다”며 지시했다. 그의 지시를 받은 장면은 곧바로 미 국무부를 방문하고, 한국지원을 요청했다. 
      한편 전황이 악화되자 이대통령은 26일 새벽 3시에 맥아더 장군에게, “오늘 이사태가 벌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이요. 당신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더라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요.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요”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미국의 지원과 참전을 얻어내기 위해 워싱턴과 동경으로 전화하며 전시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북한군이 6월 27일, 서울 외곽까지 진출하고 주한 외국인들과 군사고문단이 철수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이대통령은 27일 새벽 1시에 주미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일이 맹랑하게 되어 가고 있다. 우리 국군이 용감히 싸우긴 하나 모자라는 것이 너무 많다. 즉각 장 대사를 모시고 트루먼을 만나 군사원조의 시급함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라”고 다시 지시했다.
      이에 장면 대사는 백악관으로 트루먼 대통령을 예방하고 이대통령의 뜻을 전달했다. 트루먼은 장면에게 “한국이 여러 가지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도 독립전쟁 때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프랑스의 라파예트 장군이 우리를 도와줬고, 1차대전때 유럽이 독일의 침공을 받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미국이 도와준 적이 있다”며 위로했다.
      그 당시 이대통령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미국의 참전이었다. 미국의 참전은 곧 유엔의 참전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대미 외교에 매진했다. 그 결과 트루먼은 6월 29일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격퇴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면서 미국의 참전의지와 전쟁정책을 밝혔다.
      미국은 이러한 전쟁정책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6월 25일과 2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 채택에 따라 해ㆍ공군을 파병했고, 이어 6월 30일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
      그러나 문제가 남아 있었다. 비록 미국이 이대통령의 뜻대로 참전은 했으나, 미국의 정책은 전쟁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38도선 회복’이었다. 미국은 한반도 통일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이대통령 특유의 기민성과 결단력이 나온다. 그는 미국이 참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북통일에 걸림돌이 될 38도선 폐지론을 주장했다. 혹여 38도선이 북진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그는 이를 위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북한 정권이 무력으로 38도선을 남침한 이상 더 이상 존속할 이유가 완전히 없어졌다. 따라서 전쟁 이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며 38도선 돌파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이에 트루먼도 9월 1일 기자회견 석상에서 “38도선 돌파는 유엔에 달려있다”고 화답했다. 이는 미국이 전쟁 초기 ‘전쟁이전 상태로의 복귀’라는 최초목표에서 ‘38도선 돌파 및 한국통일’이라는 새로운 목표로 전환하되 유엔의 테두리 내에서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대통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를 계속 이슈화시켰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이대통령은 통일의 의지를 다시 한 번 천명했다. 9월 20일 그는 인천상륙작전 경축대회에서 38도선 돌파를 주장하며, 압록강ㆍ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가 북진통일을 이루겠다고 연설했다. 그에게는 오직 통일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후 중앙청에서 거행된 서울 환도식이 끝나고 나서 이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지체 없이 북진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맥아더 장군이 “유엔이 38도선 돌파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며 반대했다. 이에 이대통령은 “유엔이 이 문제를 결정할 때까지 장군은 휘하부대를 데리고 기다릴 수가 있지만, 국군이 밀고 올라가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내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우리 국군은 북진할 것입니다”며 38도선 돌파를 시사했다. 그리고 그는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정일권 육군총장에게 북진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동해안에서 북진하던 국군 3사단 23연대가 10월 1일 마침내 이대통령의 북진명령을 받고 38도선을 돌파하게 됐다.
      이후 한반도 통일을 지향하는 이대통령의 북진통일은 그의 전쟁목표로 정립돼 전쟁동안 일관되게 추진됐다. 그는 이를 위해 국군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며 미국 및 유엔에 적극적인 협조를 보냈다. 통일을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지 양보할 의사가 있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북진통일에 의한 남북통일만이 존재했다. 이대통령의 이와 같은 북진통일 의지는 38도선 폐지론, 국군 단독의 38도선 돌파명령, 압록강 및 두만강으로의 진격, 국군의 유엔군에서 탈퇴 및 국군단독 북진 등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대통령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하나의 원칙을 지켰다. 그것은 아무리 전황이 불리해도 망명정부와 일본의 한국전 개입에 대한 반대였다. 그 원칙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전황이 불리해질 때마다 미국이 망명정부 내지는 정부의 제주도 이전을 입 밖에만 내도, 이대통령은 펄쩍 뛰었다. 한번은 무초 대사가 정부의 제주도 이전을 건의했다가 이대통령이 권총을 꺼내자 그는 기겁을 하며 다시는 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 대해서도 단호했다. 중공군 개입 이후 일본군 참전 문제가 나오자, “공산군에 앞서 먼저 일본군과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전시에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과 되지 않는 일을 가려서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어떠한 장애나 방해에도 구애받지 않고 이를 실천해 나가는 뚝심 있는 국가지도자였다.
      특히 이대통령은 이 전쟁의 주체는 대한민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과 유엔은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지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한국을 제외한 채 그들이 한국문제를 좌우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그는 미국이 이에 합당한 행동을 하면 이를 지지했으나, 그렇지 못하면 신랄한 비판과 함께 이를 행동으로 보여줬다. 유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쟁의 주체는 분명 한국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는 절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대통령의 지론이자 전쟁을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한국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은 미국과 유엔의 휴전정책에 대한 강력한 항의표시로 나온 것이 반공포로석방이었다. 이것은 국가이익에 바탕을 둔 이승만식 전쟁수행방식이자 원칙이었다. 그가 그렇게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결코 달성될 수 없었다.
      이대통령이 약소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전쟁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고뇌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프란체스카 여사에 의하면, 그는 국가위기 때마다 한 밤중에 침대에 엎드려, “하나님, 이 미련한 늙은이에게 보다 큰 능력을 허락하시어 고통 받는 내 민족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힘을 주소서!”하며 기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살려낸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누가 있어 그의 진정한 애국심을 알기나 할런지. 그때 그 자리에 그가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