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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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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개별 담화
오전 내내 작업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점심을 먹고 나서도 달래 채취사업은 계속됐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다리에 쥐가 나도 휴식은 오전·오후 15분씩 두 번, 단 30분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지원을 향해 곧장 걸어왔다. 순간 지원은 가슴이 철렁했다. 오전에 작업을 하다 먼 산을 바라본 것을 누군가 작업반장에게 고자질한 것이 분명했다. 지원은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곤 무릎을 꿇은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윤지원 동무!”
“죄송합니다, 작업반장 동무.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묘득(요령)을 부린 게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 제발.”
“동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예?”
“시간 없으니까, 날래 분주소의 담화실로 가보시오.”
“그게 무슨?”
“보위원 동지가 동무와 개별담화가 필요하다고 했소.”
“아, 예.”
“아, 참! 분주소에 도착하면 변소에서 대충 머리하고, 옷매무새 좀 정리하고 담화실에 들어가시오.”
“예, 작업반장 동무.”
담화실(談話室)은 분주소에 있었다. 거기엔 보위과장 아래로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직접 파견한 보위지도원 1명과 경제지도원 1명, 그리고 내부지도원 1명과 경비지도원 1명이 상주를 하며 정치범들을 관리·통제했다. 지금 승냥이처럼 찢어진 눈으로 지원을 매섭게 흘겨보는 작업반장조차도 담당보위원 앞에선 뭐 마려운 강아지였다. 5인 조장은 분조장에게, 분조장은 작업반장에게, 작업반장은 총감독에게 보고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위원은 총감독으로부터 정치범들의 모든 동향을 보고받았다. 물론 담배나 인민소비품(생활필수품)을 무기로 보위원은 심어놓은 정보원들을 활용해 총감독과 작업반장을 따로 감시했다.
“똑! 똑! 똑!”
“누구야, 들어와!”
“저, 작업반장 동무로부터 보위원 선생님이 담화실로 오라는 소리를 전해 듣고 왔습니다.”
“아, 그래. 마침 왔구만! 윤지원 동무.”
“예, 보위원 선생님.”
“너무 그렇게 겁먹은 얼굴 하지 말고 우선 저쪽에서 의자 하나 가져다가 책상 앞에 앉으라.”
“아닙니다, 보위원 선생님. 전 이게 편합니다.”
“뭐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토를 달아! 분주소야! 구류장(구치소) 한 번 구경하고 폐인이 되어 기어나갈래?”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앉겠습니다.”
“더 바짝 다가와 앉으라.”
“예.”
“나 성질 더러우니까 두 번 말하지 않게 하라, 알갔어?”
“예, 보위원 선생님.”
“내가 동무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동무와 오붓한 개별담화가 필요해서 불렀어. 먼저 이것부터 한 번 보라. 당과 공화국의 배려로 평양에서 제1고등중학교를 다녔으니까 글은 읽을 줄 알지?”
“예, 압니다.”
중위 계급장을 단 보위원은 포악한 악어의 눈빛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대뜸 보위원이 지원을 향해 종이 한 장을 신경질적으로 날렸다. 보위원의 몸짓으로 보아 내용을 읽고 수표(서명)를 하라는 의미가 분명했다. 그런데 지원이 종이를 받아들고 첫 줄을 읽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메말랐던 눈물샘이 다시 터졌다. 분명 아바지 윤일현의 이름이 첫 줄에 또렷이 적혀 있었다. 더구나 이름 바로 밑의 죄명이란 항목에는 국가전복죄와 반정부음모, 체제·제도 비난, 비밀자금 형성, 당의 명예훼손 등등 수십 가지가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엮여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지원은 윤일현의 죄를 가족인 자신이 당과 조국을 향한 열렬한 충성심으로 보답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수표까지 했다.
“그 누구보다 위대한 당과 조국의 정치적인 신임과 배려를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이 민족반역자가 누구지? 동무의 아바지인가?”
“아닙니다. 제 아바지는 인민을 가슴으로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지도자 동지 한 분뿐입니다. 여기에 적힌 윤일현은 우리 공화국의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원수라, 흠. 좋았어! 그럼 찍으라!”
“!”
“동무의 수표 옆에 손도장을 찍으라!”
“예, 보위원 선생님.”
“이 돼지년이 제법이구만. 다 했으면 이제 한번 일어나보라!”
“!”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야. 바지 한번 벗어보라! 내 말 안 들리나?”
“선생님, 죽을죄를 졌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이 더러운 돼지년이 벗으라면 벗지 그 돼지 주둥아리에서 사람의 말이 나와! 좋게 말할 때 빨리 벗으라!”
마음에서부터 비가 내렸다. 지원은 얼른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하지만 그것은 보위원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때 눈을 부릅뜬 보위원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황급히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가죽채찍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도끼처럼 매섭게 나무책상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책상이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순간 지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백지처럼 하얀 절규가 터져 나왔다. 독이 잔뜩 오른 보위원의 입가에선 아주 사악한 욕망의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는 그 미소가 채 식기도 전에 서랍 속에서 다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시멘트바닥에 긁히는 느낌부터가 아주 불길한 고문도구였다.
“내가 아까 말했지. 나는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고.”
“…….”
“이 돼지년이, 바지 안 벗어! 애비가 국가전복죄를 지어서 그런가, 그 피도 공화국에 반항적이라 이거니?”
“선생님,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내가 더러운 돼지년의 몸뚱아리가 보고 싶어 그러는 줄 아니. 나는 그 썩어빠진 사상성을 뜯어고쳐 탈선한 계급로선(계급노선)을 우리 공화국의 혁명과업에 맞게 개조해주려는 것뿐이야. 알간?”
“선생님, 제발…….”
“개소리 말라! 날래 벗으라!”
보위원은 발정기의 수컷처럼 난폭했다. 역시나 지원의 절규하는 애원소리도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아니, 세상의 모든 언어가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러다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으면 아바지처럼 누명을 쓰고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지원을 덮쳤다. 결국 지원은 잔인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또 하나 배웠다. 지원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끈을 풀고 바지를 내렸다. 그때 주먹만 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두 볼을 갈랐다.
“선생님, 저 이제 바지 입어도 되지요?”
“마저 벗으라!”
“예?”
“그것도 마저 벗으라! 내 말 안 들리나!”
“…….”
“어서!”
“…….”
“이 돼지년, 아랫도리가 제법 멋있어! 어른 뺨치는데!”
“닦으라!”
“예?”
“니 아랫도리로 내 구두에 앉은 먼지 좀 반들반들하게 닦으라!”
“어떻게…….”
“이 돼지년아, 그것도 못해?”
“…….”
“너 다른 돼지(남자 정치범)들 하고 지금까지 부화(浮華·간통) 몇 번이나 했어?”
“부화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정말 안 했어?”
“예, 안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화는 알아. 정말 혼나봐야 말 할래?”
“선생님, 믿어주십시오. 절대 안 했습니다. 전 단지 다른 정치범들이 말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알았을 뿐입니다.”
“정말이야?”
“예!”
“그럼 더 좋고.”
“!”
“위도 벗으라.”
“…….”
“시간 끌지 말고, 날래!”
“…….”
“이 돼지년 이거, 가슴도 제법 큰데. 손에 다 안 들어오잖아. 너 솔직히 불라! 분주소나 인민경비대에 너와 부화하는 놈 있지? 아니면 돼지들 중에 있던가?”
“선생님, 정말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런데 왜 다른 돼지들과 달리 너는 이렇게 얼굴이 뽀얗게 살이 올랐어, 응?”
보위원은 정말 집요했다. 거기다 지원의 비굴함과 두려움을 보며 희열까지 느꼈다. 하지만 지원은 숨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아무튼 보위원은 어미의 몸에서 떨어진 새끼 쇠고래를 사냥하는 범고래처럼 마냥 즐거워 보였다. 이제 보위원은 처음에 들었던 채찍을 다시 잡고는 나무로 된 손잡이를 자신의 무릎에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 마찰음은 흡사 음파를 이용해 사냥감을 수색하는 고래의 레이더 같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머릿속 한 귀퉁이에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걸 의식하는 순간 평소에는 도저히 연산조차 할 수 없던 어려운 문제들이 슈퍼컴퓨터처럼 단번에 그 해답을 찾아냈다. 지원은 아바지 윤일현이 하늘나라에서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바로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선봉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싶은 저의 충성심이 늘 가슴속에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뭐! 뭐라. 햐! 이 돼지년이. 이제 보니 보통이 아니네. 감히, 돼지년의 주둥아리에서 당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말이 나와. 우리 사회주의공화국은 너 같은 돼지들의 입에 함부로 오르내릴 만큼 그렇게 하찮은 존엄이 아니야. 알간?”
“…….”
“좋다! 네 년이 불지 않고 얼마나 배겨내나 보자!”
“!”
“야! 밖에 아무도 없나? 있으면 날래 들어오라!”
“예, 선생님!”
“확인원 동무, 이 돼지년을 의자에 앉혀 꽁꽁 묶으라!”
“알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아랫도리는 잘 보이게 다리를 활짝 벌리라! 내 직접 이 돼지년이 부화했다는 자백을 받아내야겠어.”
“!”
지원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딱딱한 나무의자에 묶였다. 순간 대책도 없이 객기를 부린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보위원은 이제 채찍의 가죽부분을 잡고 쥐불놀이하듯 손잡이를 허공에서 빙빙 돌렸다. 지원의 눈은 그 강한 구심력에 이끌려 소용돌이치듯 원을 그리며 차츰 초점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차가운 이물질이 번개처럼 지원의 아랫도리에 와 닿았다. 그 느낌은 늪에 빠진 것처럼 더럽고, 눅눅하며, 질척거렸다. 절망적이었다.
“으으으.”
“크크크.”
어느새 지원의 입안에서는 분노와 절규가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가 싶더니 핏덩이가 고이기 시작했다. 그런 지원의 결심이 더욱 독기를 품게 만들었는지 보위원의 눈에서 한 차례 불똥이 떨어졌다. 그리고 나무손잡이가 지원의 다리 사이로 천천히 밀어넣어졌다. 순간 수천 도의 불에 덴 것 같은 화끈거림과 거친 쓰라림이 지원의 영혼을 산산조각 냈다. 아니, 바람 부는 날의 산불처럼 거세게 일어나 순식간에 지원을 재로 만들었다. 보위원은 길을 내고 메우고 다시 내고 지우고. 마치 제집 안마당처럼 지원의 영혼을 유린했다. 이제 지원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자신의 죽음을 인정했다. 동시에 지원의 의식 속에서 이성의 가지들이 하나씩 뚝! 뚝! 끊어져 나갔다. 지원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핏빛이었다.
“이 돼지년이 부화를 한 번도 안 했다는 말이 생거짓말은 아니었군.”
“…….”
“어른이 된 느낌이 어때, 좋나?”
“으으으.”
“오늘 나랑 부화 한 번 할까? 어때 생각 있어?”
“…….”
“돼지년아, 좋으면 좋다고 대답을 하라! 쌍!”
“쾅!”
“!”
“동무, 담화실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과장 동지! 별일 아닙니다.”
“별일이 아니긴 뭐가 별일 아니라는 거야! 여기가 담화실이지 구류장이야?”
“이 돼지년은 관리소 내에서도 최악질 반동입니다. 그래서 구류장에 갈 필요도 없이 제가 직접 사상교육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으으으.”
“동무가 보기엔 이게 사상교육이야?”
“새로 오셔서 아직 적응이 잘 안 되실 겁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우리와 같은 일반사람이 아니라 공화국의 원수이며 인민의 적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상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도저히 저런 반당·반혁명적인 정치범들의 개조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저희가 적들에게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마침 잘됐군. 그렇잖아도 조금 전에 상부에서 관리자들의 사상검토를 지시해 누구를 먼저 검토할까 고민했는데 동무가 그 수고로움을 덜어주는군. 동무?”
“예, 과장 동지.”
“동무가 오늘 맨 먼저 나한테 사상검토를 받아야겠어.”
“예? 제가요?”
“왜, 두려운가?”
“아닙니다.”
“으으으.”
“야! 넌 뭐하고 있어. 얼른 밧줄을 풀지 않고!”
“아, 예. 과장 선생님.”
“이 여성 동무는 내방에 데려다 놔.”
“알겠습니다.”
“동무, 내가 분명히 경고하는데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사상검토를 구실로 삼아 동무의 그 탐욕스런 욕망을 채우려하지 마시오. 알겠소?”
“잘 알겠습니다, 과장 동지!”
“그거야말로 혁명의 변절자로 의심받기에 딱 좋은 건수라는 걸 가슴에 또렷이 새겨두시오.”
“예!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