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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38> 거래
그로부터 일주일 후,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무실은 부서진 암석처럼 깨진 침묵과 고요만이 가득했다. 재국은 차가운 죽음의 세계에서 혼자 컴퓨터 속 자료파일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재국의 의식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강한 흡입력으로 가둔 건 LCD 모니터였다.
“어머! 재국 선배, 어제 밤샘 한 거예요?”
“어, 혹시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을요?”
“저쪽 팀은 어제도 한 건 했다고 하더라고.”
“아! 이제 이해가 된다. 그래서 오기가 발동했구나! 그렇죠?”
“…….”
“그나저나 조금 전까지 좋았던 입맛이 한꺼번에 싹 달아나네요. 그럼 이번 건도 남운영의 입을 통해서 나온 거예요?”
“최종 확인만. 현재 지방대학의 영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영화감독과 교사, 그리고 검찰 및 국세청 직원, 심지어 지방경찰청의 정보과 출신까지 포섭대상이었어.”
“정말 집요하고 무섭네요.”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고정간첩 남운영이 개성공단에서 의류제조업을 하는 처남 회사의 직원인 것처럼 방북신고서를 꾸며 충청 지역 도·시의원과 대학교수 150여 명을 방북시킨 사실도 드러났거든.”
“개성공단 출입 절차에 여전히 허점이 많은가 보군요. 검색을 대폭 강화해도 속속 구멍이 드러나니. 아무튼 이젠 나도 부러워요. 정말 부럽다!”
“뭐가 그렇게 또 부러워요, 유진 씨?”
“아, 팀장님.”
“땅만 사도 배가 아픈데 옆집은 로또로 대박을 맞았으니 어찌 안 부럽겠어요. 이건 1등만 당첨된 게 아니라 2등·3등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당첨되잖아요.”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신 우리 아버님이 그러시더라고. 무언가를 간절히 얻고 싶으면 가장 먼저 기다리는 법부터 배워라. 역사는 바로 그 기다림이 쌓여 지금 네 앞까지 흘러온 것이다.”
“팀장님, 어느 세월에요. 문제는 시간이잖습니까?”
“달처럼 작고 추운 위성도 언젠가 한 번은 태양처럼 뜨거울 때가 있다잖아. 믿어야지.”
“히~유!”
“재국 씨, 말레이시아 경찰에 지문검출과 관련해 문의한 것은 어떻게 됐어?”
“그게 글쎄, 예상과 달리 검출된 것이 없답니다.”
“와인파티까지 했는데 지문검출이 안 되다니요? 혹시 사건 당사국이 아니라고 일부러 그쪽 경찰이 우리에게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는 않을 거야. 사실 그 정도는 사건의 비중에 비해 숨길 사항도 아니잖아.”
“모니터의 사진들이 당시에 찍은 현장사진들인가?”
“예 맞습니다. 그쪽 경찰이 보내온 사진들인데 보시다시피 사건현장의 오염 정도가 너무 심합니다.”
“흠! 그런데 롯사나 시아피노가 머무른 호텔 객실은 며칠 동안 난잡한 파티를 벌인 장소치고는 너무 깨끗한 게 아닌가?”
“그러게요. 마치 말레이시아 경찰이 대신 청소라도 해준 것처럼 깨끗해요.”
“그러게.”
“중간 기착지는?”
“탑승한 항공기는 말레이시아항공으로 밝혀졌는데 중간 기착지는 없었답니다. 곧장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세 사람의 상상력과 가능성을 활용해서 사건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군.”
“맞습니다. 저희로선 아무래도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말레이시아 경찰 측에서도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이 시간의 경과로 모두 파기되어 더 이상의 정보제공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흠! 그들의 조직과 특성을 고려할 때 리재경의 살해는 롯사나 시아피노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요, 팀장님?”
“두 가지야. 첫째로 고모라는 돈이 되면 무엇이든 손을 댄다는 거야. 500~2,500%의 수익률을 보장하는 마약은 말할 것도 없고 환경유해물질의 처리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 한마디로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만 있다면 어느 곳에서건 합법적인 사업가로 변신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착복을 하거든. 그리고 두 번째는 이탈리아 정부가 비록 마피아와의 전쟁을 선포했더라도 박힌 뿌리가 워낙 깊고 단단해. 따라서 마에다 유주루보다는 훨씬 체포될 위험성이 적어 활동에 제약을 덜 받는다고도 볼 수 있지.”
“그러면 이 사건에서 마에다 유주루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내 추측이 맞다면 중개인일 가능성이 높아.”
“중개인요?”
“응, 북한과 고모라의 연결고리 말이야. 배후에서 북한을 대신해 리재경의 피살사건을 총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마에다 유주루가 북한으로부터 얻게 될 이득은 뭐죠?”
“현물.”
“현물이라면 혹시 조직을 확장하기 위한 마약과 위조달러 말씀인가요?”
“맞아.”
“그런 추론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롯사나 시아피노 혼자 호위총국 출신인 리재경의 제거가 가능하다는 게 논리적으로 설명돼야 하잖습니까?”
“물론 그녀 혼자라면 가능성이 희박하지. 하지만 고모라와 연결된 마약조직이 말레이시아 내에 있다면 그 가능성은 훨씬 높지 않을까?”
“그 말씀은 말레이시아 내의 마약조직과 연계해 리재경을 제거했다는 말씀이군요.”
“어쩌면 이용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런 추론이 가능한 건 리재경의 사망 원인이 ‘헤로인 과다투여’이기 때문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분명히 개인이 아닌 마약조직 차원에서 움직였을 테고. 만일 우발적인 단순사고라면 요즘 마약류 사범들이 많이 사용하는 향정신성의약품이 검출됐겠지. 예를 들면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이나 엑스터시·LSD·야바, GHB(물뽕) 등 말이야. 구태여 돈과 위험성이 큰 헤로인을 살인도구로 활용할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그럼 그 헤로인의 공급자가 북한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씀이군요.”
“현재로선.”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고모라의 대모를 움직이려면 그녀에게도 그만한 보상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고모라가 보기에 북한은 그 자체가 최대 이윤덩어리야. 한마디로 경제원칙인 최소 비용 최대 효과 원칙 그 자체라고 보면 돼.”
“가장 비상식적인 두 집단이 자본주의의 경제원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네요.”
“고모라는 이른바 시스템으로 통칭되는 전 세계 네트워크를 갖고 있지. 그것을 보다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확장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파트너가 있다면 그것은 북한이지 않을까. 더구나 북한은 단순한 폭력조직이 아니라 어쨌든 외형적으로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잖아. 때문에 고모라 측에는 북한에 장기적으로 현물과 더불어 인력(人力)까지도 요구했을 수도 있고.”
“인력이라면 북한 주민들의 값싼 노동력 말씀인가요?”
“그렇지! 비록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해야겠지만 그건 북한에게 있어서 제재도 아니지. 아무튼 북한으로선 무기수출로 막힌 외화벌이를 그나마 보충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으니까.”
“굶주린 북한 주민들이 이제는 정치적인 도구뿐만 아니라 착취의 대상이자 악의 근원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그저 슬프네요.”
“북한은 자신들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여러 나라에 판매루트를 확보하고 고모라 측은 돈 한 푼 안 들이고 세계적인 제조공장을 갖게 되는 셈이야. 따라서 양쪽은 서로 이득이라고 생각하겠지.”
“한마디로 경제적인 이윤 제일주의가 낳은 극악한 공생관계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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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심가의 대형 백화점. 세일기간이라 고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때 한 사내가 막 뽑은 자판기 커피를 들고 주차장에서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사내의 얼굴은 낙엽처럼 푸석푸석했다. 그리고 인파에 좌초된 난파선처럼 우울해보였다. 사내가 커피를 들이켰다. 그러자 마치 한 스푼의 사향(麝香)을 먹은 것처럼 눈빛이 다시 맑아졌다. 현우였다. 그러고 보니 현우가 물류팀으로 갑작스럽게 인사발령이 난 것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인사발령이 나던 날 백 전무는 털 없는 개처럼 흉측한 눈빛으로 현우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지수 씨는 지금 뭘 할까. 화원에서 새로 얼굴을 내민 아기꽃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 속에 흠뻑 빠져 있을까. 윽! 누구지?”
[팀장님!]
“어, 동해 씨. 무슨 일로?”
[일주일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전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아직 흐른 시간이 짧아서 그럴지도 몰라. 시간만 넉넉하다면 세상살이에 이해 못할 게 어디 있겠어. 안 그래?”
[그건 성인들 얘기죠.]
“그나마 다행인 건 홍 대리와 동해 씨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다는 거야.”
[아니, 지금 팀장님 코가 석자인데 저희들 걱정을 하십니까? 그나저나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인사발령을 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최고 경영진의 눈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부분이 보일 수도 있잖아. 그게 아니라면 미숙하게 보였던가.”
[그것도 백 전무님라인의 장윤석 부장님 밑으로 인사발령을 냈다는 건 직설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란 소리와 뭐가 다르냔 말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팀장님!]
“왜? 내가 포식자에게 던져진 먹잇감처럼 초라하게 보여?”
[당연하죠. 우리 감사팀은 부정을 저지른 직원과는 영원한 적이잖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팀장님에게 무슨 불이익이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동해 씨 말대로 나에게 힘든 시기인 건 분명해. 하지만 좋게 생각하자고. 어쩌면 난 동료들이 꿈도 못 꾸는 휴식을 얻은 것일 수도 있잖아.”
[휴식요? 세상에 그런 억울한 휴식이 어디 있습니까? 전 그런 씁쓸한 휴식은 정말 싫습니다.]
“어쨌든 요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무언가 놓친 것이 있나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중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도 편하고.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주변의 고마움이 너무 잘 보이네. 사실 결과가 이럴 거라는 것을 전혀 예상 못했던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아직 기회가 나를 버렸다고 속단하기도 이르고. 아무튼 난 이번 기회에 석공(石工)이 돼 볼 참이야.”
[석공요? 돌을 깎으신다는 말입니까?]
“그래, 돌도 의미가 없는 그냥 돌이 아니라 정의의 돌이지. 혹시 또 알아? 잘만 깎으면 간사함을 제거하고 악을 없앨 수 있는 신물(神物) 사인검(四寅劍)이라도 만들게 될지. 후후후.”
[사인검요! 그건 단지 벽사용(邪用) 부적(符籍)의 성격이 짙다고 알고 있는데요. 더구나 사인검은 그런 특별한 용도 때문에 적을 베는 날카로운 칼날이 없잖습니까?]
“상징과 주술로 그 죄만 명확히 물으면 되지 사람까지 상하게 할 필요는 없잖아.”
[하여간 우리 팀장님은 정말 속도 좋다니까요.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 어떠세요?]
“오늘 저녁?”
[예, 제가 위로주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요. 홍 대리님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은 고마운데 오늘은 안 되겠어.”
[아니, 왜요?]
“지금 대구에 내려와 있거든.”
[예~에? 그럼 혹시 팀장님이 직접 물류이동을 하고 계신 겁니까?]
“바쁜데 아무나 하면 어때.”
[아니, 아무나 하다니요. 물류팀에는 물류이동만 전담하는 담당 직원이 있잖습니까. 그런데 팀장님에게 물류이동을 맡기다니요. 이 사람들 정말 해도 너무하네요! 아무튼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팀장님의 보직변경은 문책성 인사임이 분명합니다.]
“흥분하지 마. 사실 신입사원이나 다름없잖아. 물류팀엔 나도 처음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이번 기회에 물류팀 업무도 배우고 좋지 뭐. 사실 회사 동료라도 필요할 때 업무협조를 요청하려면 약간 껄끄러운 면도 있잖아.”
[아무튼 그나마 다행입니다. 사실 홍 대리님과 저는 내심 걱정 많이 했습니다.]
“난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것처럼 세상의 끝에 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첫발을 내디딘 거야. 알겠어?”
진정한 석공은 단순히 돌을 깎아 모양을 만드는 데 집착하지 않는다. 돌의 숨결을 따라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고 본래의 모습을 찾는데 공(功)을 들인다. 결국 늙은 석공이 돌에서 찾아낸 얼굴은 자신이 닮고 싶은 얼굴이며 정은 자신의 모난 마음을 깎는 도구다. 그리고 고집스런 눈빛은 바로 진실에 대한 직시(直視)다. 이제 현우의 눈빛은 맑고 투명했다.
“손님, S/S시즌의 신상품입니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손님처럼 패션리더들에게는 필수품이죠. 한마디로 자존심이라고나 할까요. 이태리에서 핸드메이드로 제작한 것입니다. 이 하이힐의 도발적인 바디라인 좀 보세요. 예술이죠?”
“훗! 나중에요.”
회전문을 통해 백화점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지원은 현실의 아름다움에 놀랐다. 마치 클레오파트라의 보물창고에 들어온 것 같았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마주하는 색채에 불가사의한 힘마저 느껴졌다. 분명 상상속의 이상도시는 현실에 있었다. 그래서 흑백필름이던 지원의 감성이 순식간에 컬러필름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지원은 엉성한 듯 보이는 자본주의의 힘이 다양함에서 만들어지는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을 증명해준 건 그곳을 이용하는 고객들의 얼굴에 뿌려진 행복바이러스였다. 아무튼 지원은 자신을 붙잡는 손길마다 가벼운 눈웃음으로 자신이 백화점에 온 목적을 분명히 했다.
“아바지, 여기가 어디야?”
“여기! 글쎄 어딜까. 우리 공주님이 한 번 맞춰 봐?”
“가만! 우리 반의 황진호가 지난주에 아바지와 오마니랑 장난감이 아주아주 많은 곳엘 갔다 왔다고 자랑했는데 거기가 어디였더라. 아, 맞다! 백화점이라고 했어. 그럼 여기가 백화점이구나. 아바지 맞지?”
“호, 우리 공주님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바지, 봐봐. 저기에 ‘4·15명절 기념’이라고 크게 쓰여 있잖아. 여기가 4·15 백화점 맞지?”
“뭐, 4·15 백화점? 하하하. 역시 우리 공주님은 너무 똑똑 하다니까. 그러고 보니까 우리 지원이가 말한 4·15 백화점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하하.”
“틀렸나! 그럼 뭐지? 그런데 아바지, 여긴 왜 왔어?”
“궁금해?”
“응.”
“우리 공주님이 제일 좋아하는 예쁜 토끼인형 사주려고 왔지!”
“정말?”
“그럼!”
“아이 좋아라!”
사실 그 백화점은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9층짜리 제일백화점이었다. 그리고 고객들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여기저기 붙어 있던 ‘4·15명절’은 김일성이 출생했다는 의미였다. 아무튼 제일백화점에서 물건을 파는 매대(매장)는 1층부터 5층까지였다. 그런데 제일백화점은 대한민국의 여느 백화점과 다른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상품진열 공간보다 통로면적이 훨씬 더 넓다는 점이다. 물론 각층의 매대는 폐업점포처럼 썰렁함과 을씨년스러움이 감돌았다. 하지만 어린 지원에게는 그것조차도 흥미로웠다.
“자, 이제 4층에 다 왔다. 지원아, 우리 내리자.”
“아바지, 여기서 인형을 팔아?”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지금까지 지원이가 보지도 못한 인형들이 아주 많이 있지.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마음대로 사도 돼. 오늘은 아바지가 다 사줄게.”
“정말이지, 아바지?”
“그~럼! 아바지는 우리 지원이가 좋아하는 거면 뭐든지 다 사주고 싶어.”
“그러면 지원이가 아바지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네. 내가 아바지를 행복하게 해주니까.”
“뭐! 하하하.”
그즈음 김일성광장, 인민대학습당, 만수대예술극장, 평양학생소년궁전 등 평양 시내의 주요 건물에선 ‘4·15명절’ 행사가 성대하게 벌어졌다. 때문에 백화점 안은 텅 빈 포구처럼 손님 하나 없이 썰렁했다. 지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서움이 처음에 가졌던 기대감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바지 윤일현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아바지의 행복이니까.’ 두 사람이 붉은 꽃으로 장식된 축하트리를 돌아들자 인형을 파는 매대가 시야에 반쯤 들어왔다. 그런데 지원이 좋아서 달려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세상의 빛이 두 사람을 광활한 우주공간에 던져버리고 사라졌다.
“우리 지원이 많이 무섭지?”
“아니, 안 무서워. 아바지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잖아.”
“우리 공화국의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서 그래.”
“전력? 아바지, 그게 뭔데?”
“불 켜는 것 말이야.”
“아~! 그걸 전력이라고 하는구나. 그런데 아바지가 꼭 얼굴 없는 달 같다!”
“얼굴 없는 달?”
“오마니가 말해줬는데 얼굴이 없는 달은 슬픈 달이래.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지만 얼굴이 없는 달은 우리가 잠들었을 때 몰래 나타나 비를 뿌려주고 곡식들도 무럭무럭 자라게 노래도 불러준다고 했어.”
“그래?”
“응. 아참! 아바지도 옆집의 철국 오라버니 알지?”
“철국이! 아, 인민학교 2학년짜리 꼬마. 알지! 그 꼬마가 왜?”
“남조선 괴뢰놈들은 불쌍한 어린이들을 꾀어서 미제를 비롯한 자본주의 나라들에 팔아먹는다는 말이 사실이야?”
“!”
“오라버니가 배우는 2학년 사회주의 도덕교과서에 그렇게 나온다고 하던데.”
“그래?”
“응. 아바지도 몰랐어?”
“아~니, 알고 있었어.”
“그게 정말이었구나! 남조선에도 우리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대원수님이 계셨다면 미국놈들을 땅크(탱크)로 단번에 쳐부술 텐데. 그치, 아바지?”
“그래, 맞아.”
“앗! 불이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라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빛줄기는 가시처럼 아팠다. 지원이 손등으로 눈을 대충 비벼 빛줄기를 가늘고 순하게 만들자 마침내 인형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형매대는 인민소모품매대 맞은편에 있었다. 그리고 매대 천장에는 “세상에 부럼(부러움) 없어라!”라는 선전문구가 매달려 있었다. 잠시 후 목에 빨간 목수건(스카프)을 두른 커다란 토끼인형을 끌어안고 나오는 지원의 얼굴에는 남조선 괴뢰놈들과 미제놈들을 향한 용광로 같은 복수심으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지원을 데리고 오림책(스크랩북)을 사러가는 윤일현의 발걸음은 끌신(슬리퍼)을 신은 듯 질질 끌렸다. 바로 그때였다. 입구부터 형형색색의 네모 아크릴판으로 장식돼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명품관이 지원의 눈에서 주변의 다른 매장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레이스한 손님,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에요.”
“혹시 누구에게 선물하실 건가요.”
“예.”
“그럼, 마음에 드시는 상품이 있나 한번 골라보시죠.”
사랑에 빠진 여인은 누구나 아름답다. 그런데 마음까지도 햇살처럼 화사하게 곱다면 그녀는 여신처럼 보인다. 매장의 주요 상품들은 그 가치를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i)의 명화들을 활용해 다이내믹하게 표현했다. 거기다가 컬러와 소재의 특성에 맞게 각각의 상품들은 아주 재미있는 구성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재킷과 셔츠는 사람의 얼굴모양으로, 벨트는 코브라형상으로, 손수건은 책에서 떨어져 나온 종이로, 구두는 전자책으로, 만년필은 담배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흠! 모두 사고 싶어서 쉽게 결정하기가 힘들군요.”
“다들 그러세요. 하지만 저희 제품을 선물 받으신 분은 그 순간 자긍심이 생길 겁니다.”
“여기 제품이 그렇게 인기가 있나요?”
“물론입니다. 더구나 그레이스한 손님들에게 저희 제품만큼 손님의 우아함을 극대화시켜 줄 수 있는 제품도 없을 겁니다.”
“저거 주세요.”
지원이 가리킨 것은 아크릴판 위에 전시되어 있는 상품이었다. 비록 선명함과 화려함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다른 그림들에 비해 추상성은 덜했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그림 속 대상이 쉽게 지원에게 다가왔다. 지원이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회색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부풀어 오르기만 했을 뿐 아직 터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