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74> 전투


    “부조장 동무, 전투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은혁 동무, 건물 내 휴대전화의 수신장애는 가능하겠소?”
    “저희가 가진 러시아산 재밍(전파교란)장비가 휴대용이라 교란범위는 작아도 일시적인 장애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알겠소.”
    “전투개시와 더불어 외부와 연결된 모든 통신망과 전산망도 차단시키겠습니다.”
    “아니오, 전산시스템의 장애는 지금 발생시키시오. 감시대상을 줄이는 것도 우리에겐 유리한 일이오.”
    “알겠습니다. 데이터를 폭증시켜 호스트 콤피터가 장애를 일으키도록 하겠습니다.”
    “좋소. 홍화 동무는?”
    “저 역시 성공적인 전투수행을 위한 공격목표물의 모든 상황파악을 끝냈습니다.”
    “동무, 저들은 괴뢰 역적패당들이오.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찰나의 주저함도 없어야 하오. 숨통을 단호히 끊어버릴 멸적의 각오로 임하시오.”
    “걱정하지 마세요. 자비는 내게 있어 정의가 아니라 단지 기호품일 뿐이에요.”
    “그럼 홍화 동무가 출입구 쪽의 여성 청원경찰을 맡으시오.”
    “예.”
    “좋소! 만단(萬端)의 결전진입태세를 갖춘 동무들을 보니 안심이 되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 전투는 강한 집중력이 필요하오. 따라서 전투행동계획에서 벗어난 독단적인 행동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좋소! 그럼 이제 공격을 시작하겠소.”
    피오기는 공격을 지휘하는 공격자와 공격대상을 직접 공격하는 에이전트(전투원), 그리고 그 에이전트를 관리하는 마스터(소유자)까지 1인 3역을 담당했다. 공격전투를 능숙하게 주도하는 피오기의 전략과 전술에는 은혁과 홍화를 압도하는 고도의 군사적 정밀함까지 있었다. 그래서 은혁과 홍화도 피오기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피오기가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시더니 다시금 내쉬었다. 용기와 투쟁심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의식 같았다. 그는 곧장 차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벌써부터 피냄새가 강하게 느껴지는군요.”
    “이건 피냄새가 아니라 북조선을 위한 희망의 냄새요.”
    승합차에서 거침없이 뛰어내린 피오기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작업복 차림이 아닌 등산복 차림이었다. 더구나 여든은 족히 됐음직한 노인의 얼굴까지 하고 있었다. 뒤이어 곡괭이 모양의 날이 달린 등산용 피켈(Pickel)을 든 홍화가 내렸다. 역시나 홍화도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한 블록 앞에 있는 국민은행 ◯◯지점이었다.



  • “저, 할머니?”
    “나 말이오?”
    “예.”
    “그런데 왜 불렀수?”
    “아, 예. 다름이 아니고요. 오늘 은행에 전산장애가 발생해 용무가 급하시면 다른 지점을 이용하시라고요.”
    “무척 친절한 경찰 아가씨네. 그런데 아가씨?”
    “왜요 할머니?”
    “혹시 표범한테 등을 물리면 어떤지 아시오?”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럼 알려줄까?”
    “헉!”
    예상대로 전산시스템이 원인 모를 이유로 다운되자 사고원인을 파악하느라 영업장 안쪽의 은행직원들이 허둥대고 있었다. 그때 청원경찰이 상황설명을 위해 두 사람에게 다가온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뭔가가 청원경찰의 왼쪽 겨드랑이를 빛의 속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얼음처럼 서늘한 차가움이었다. 하지만 청원경찰의 뇌가 위협을 인지하는 것보다 홍화의 동물적 공격이 훨씬 빨랐다. 고통스런 죽음을 맞은 청원경찰의 왼쪽 가슴에는 얼음을 찍기 위해 전체를 톱니로 만든 피크(Pick)가 절반 가까이나 박혀 있었다. 순간 피오기가 배낭에서 민첩하게 AK-74를 꺼내들었다.
    “팅! 팅! 팅! 팅!”
    “여러분! 엎드리세요. 어서요!”
    “글쎄.”
    “팅! 팅!”
    “으악!”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피오기는 먼저 객장과 영업장의 모든 CCTV부터 파괴시켰다. 그것도 한 발에 하나씩 모두 네 개를 순식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리곤 곧바로 피오기와 눈이 마주친 남자직원의 미간을 총탄으로 정확히 관통시켰다. 그때 옆에서 동료직원이 죽자 끔직한 공포감을 느낀 여직원이 비명과 함께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피오기의 눈빛에선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피오기는 조준선도 무시한 채 마구잡이로 총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무자비한 총기난사였다.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유탄과 파편을 피해 객장의 의자와 은행업무가 이루어지는 카운터 밑에 납작 엎드렸다. 피오기는 마치 군부대 사격장에서 총기테스트를 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 비이성적이기까지 했다. 결국 눈 깜짝할 사이에 다수의 희생자가 나왔다.
    “으으으.”
    하지만 생존한 사람들도 피오기의 총구를 피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숨을 죽이고 피오기의 살육이 어서 멈추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냉각기관이 없는 자동차 같던 피오기는 30발들이 탄창이 거의 소진되자 비로소 사격을 멈췄다. 은행의 객장과 영업장은 메케한 화약냄새와 바닥에 떨어진 수많은 탄피들로 폭격을 맞은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속함과 무소음 사격으로 은행 인근에 있는 사람들은 무장괴한의 침입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 사이 홍화는 잽싸게 셔터를 내려 현금자동인출기(ATM)가 있는 공간과 객장을 완전히 분리했다.
    “모두 조용히 하고 내 지시에 따르오. 그렇지 않으면 내 총구가 이성을 잃고 광분할 것이오. 우선 영업장 안의 직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손을 머리 위로 올린 다음 천천히 밖으로 나오시오.”
    “으으으.”
    “3번 창구 아가씨.”
    “저 말인가요?”
    “그렇소. 아가씨는 자리에 그냥 남아 있으시오.”
    “아, 예. 알겠습니다.”
    “자, 다 나왔으면 바닥에 납작 엎드리시오. 그리고 큰대자로 팔과 다리를 벌리시오. 더! 다 벌렸소?”
    “예.”
    “좋소. 잠깐 그 상태로 기다리시오. 만약 누구 한 사람 허튼수작을 부리면, 그 즉시 직원 모두의 심장에 총탄을 박아 넣겠소.”
    “케이블타이(Cable Ties) 여기 있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묶는 동안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대로 처리하시오.”
    “예,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갖고 있는 휴대전화부터 꺼내 놓으시오. 어서!”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여기도요.”
    “어이, 거기 아줌마. 지금 일어나서 뭐하는 거야. 죽고 싶어? 지금 죽여줄까?”
    “아, 아닙니다.”
    “죽기 싫으면 바닥에 엎드려 꼼짝하지 말란 말이야!”
    “제발 살려주세요. 전 지금 병원에 가서 인슐린주사를 맞아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기진맥진해져서 쓰러질지도 몰라요.”
    “아직도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미시리가 여기에 있었군. 이건 당신이 결정한 운명이야.”
    “헉! 살려주세요. 제 딸이 다음 달에 결혼을 해요.”
    “이미 늦었어.”
    “팅! 팅! 팅!”
    “으으으.”
    “자, 봤지! 이제 다리 사이에 머리를 깊숙이 처박아! 만약 머리를 쳐드는 사람이 있으면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바로 처단하겠어. 알겠어!”
    “윽!”
    홍화는 사망자의 죽음을 의식조차 안 했다. 정신적 외상을 심하게 입은 고객들은 공포에 질려 침묵했다. 그 사이 피오기는 잽싸게 남자직원들을 포승하고 돌아왔다. 피오기는 홍화에게서 총을 건네받자마자 잡은 먹이가 달아나는 광경을 목격한 야수처럼 창구 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입가에 여유를 묻힌 채 창구에 혼자남아 얼음처럼 굳은 여직원에게 다가갔다. 마치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 같았다.
    “아가씨, 이 지점에 대여금고 있지?”
    “예.”
    “그 책임자가 누구요?”
    “그건, 저희 은행의 전문 프라이빗 뱅커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프라이빗 뱅커! 그게 뭐요?”
    “쉽게 설명하면 고객의 자산을 종합적으로 관리해 주는 거래관리자입니다.”
    “한마디로 극소수 부자들의 뒤를 봐주는 집사로군.”
    “그렇습니다.”
    “그래, 당신들 중에 프라이빗 뱅커가 누구요?”
    “접니다.”
    “좋소,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보시오. 백강호 팀장이라. 왠지 이름에서 강인함이 느껴지는군. 아무튼 좋소. 포승을 풀어줄 테니 당신이 앞장을 서시오.”
    “어디로 말입니까?”
    “여기 있소. 이게 내가 내용물을 확인하려는 대여금고의 번호요.”
    “B2645. 이 대여금고가 본인이 계약한 것 맞습니까?”
    “그게 내 것이라면 당신에게 열어달라고 이렇게 부탁할 이유가 없지. 아니 그렇소?”
    “은행은 예금자 등 은행이용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고객이 저희 은행을 믿고 보관한 물품은 원칙적으로 물어볼 수도, 열어볼 수도 없습니다.”
    “백강호 팀장, 그건 당신네가 정한 까다로운 규칙이고. 지금 내가 정한 규칙은 그것과 많이 달라. 난 보다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을 말하는 거야. 알아듣겠어?”
    “하지만…….”
    “융통성이 전혀 없는 친구로군. 그래서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난 처음부터 기분이 안 좋았어. 이런 이름은 꼭 피를 부르거든.”
    “팅! 팅! 팅!”
    “헉! 으으으.”
    “한 발은 내 자제력을 시험한 죄, 또 한 발은 날 기만한 죄,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은 내 더럽혀진 기분을 위로하는 것이오. 이젠 어쩐다, 할 수 없군. 거기, 예쁜 아가씨?”
    “헉! 저 말인가요?”
    “그렇소.”
    “…….”
    “보았다시피 난 성질이 매우 난폭하고 잔인하오. 거기다 막 뭔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소. 이럴 땐 나도 나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소.”
    “!”
    “두 번 말하지 않겠소. 이 번호의 대여금고를 열 수 있소, 없소?”
    “못 열면 저도 죽일 건가요?”
    “물론이오. 상황은 언제나 쓸모 있는 인간을 원하거든.”
    “대여금고는 제 담당업무가 아니라서…….”
    “할 수 없군. 내 안의 폭력성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거든.”
    “하, 하지만 금고실의 안전문을 여는 키와 비밀번호는 알고 있습니다.”
    “좋소, 그럼 아가씨가 안내하시오.”
    피오기와 거래를 끝낸 여직원이 지하 1층 금고실에 있는 대여금고로 그를 안내했다. 홍화는 1층에 남아 직원과 고객들의 감시업무를 맡았다. 여직원의 설명대로 금고실의 출입은 부속된 별도의 출입구를 통해서만 독립적으로 통행이 가능했다. 그리고 보안을 위해 철근콘크리트로 벽, 바닥, 천장을 빈틈없이 마감한 구조였다. 마침내 도착한 금고실도 안전장치가 완벽했다. 하지만 안전문 바로 옆의 사물함에서 찾아낸 마스터키와 여직원이 외우고 있는 비밀번호로 쉽게 출입승인이 떨어졌다. 그런데 여직원이 대여부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 머뭇거렸다.
    “왜 그러시오. 무슨 일이라도 있소?”
    “제가 열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뭐요!”
    “저희는 대여금고의 비밀번호를 알지 못합니다.”
    “그럼 대여금고의 비밀번호를 누가 안다는 말이오?”
    “대여금고의 비밀번호는 사용고객만이 알고 있습니다. 담당자가 금고실을 열어주면 고객이 저기 보이는 별도의 부스에서 금고번호와 비밀번호를 누릅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고객의 대여금고만 별도의 부스로 이동합니다.”
    “알겠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어떻게…….”
    “방법은 여러 가지요. 하지만 난 간단하고 단순한 방법이 가장 좋소.”
    말을 마친 피오기가 금고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곤 대여금고 앞에 섰다. 대여금고는 스테인리스로 도어마다 전면에 개별 디지털 잠금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 피오기는 곧바로 총열을 디지털 잠금장치와 나란히 맞추고 사격자세를 취했다. 곧이어 총구가 성난 화염방사기처럼 불을 내뿜었다. 그러자 디지털 장금장치는 순식간에 나무 위에서 떨어진 홍시가 됐다. 피오기의 얼굴에서 구름이 걷히고 맑은 햇살이 한 줌 쏟아졌다.
    “어떻소. 내 방법이 제법 쓸 만하지 않소?”
    “!”
    하지만 막상 문이 열리고 내부를 확인한 피오기는 예상과 다른 상황이 벌어지자 적잖이 당황했다. 분명 있어야 할 수표나 예금통장, 그것도 아니라면 유가증권이나 귀금속이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우주처럼 텅 빈 공간에 있는 건 오로지 책 한 권이 전부였다. 잠시 후 피오기가 일그러진 얼굴로 꺼내든 책은 영국소설가 서머셋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의 단편집이었다. 그때 책갈피처럼 꽂혀 있는 하얀 종이가 피오기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피오기의 눈가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하얀 종이는 『더 레드(The Red)』의 첫 장에 꽂혀 있었다.
    “‘사랑의 비극은 잘못된 운명에서 시작되고, 인생의 비극은 밑 빠진 탐욕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북한의 가장 큰 불행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됐는가. 답은 주민의 삶에 희망의 불꽃이 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희망의 불꽃은 영원히 되살릴 수 없는가. 아니다. 아직도 희미하지만 살아 있다. 이제 묻겠다. 오늘 당신이 여기에 온 건 밝아올 아침이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어둠을 더 짙게 만들기 위함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길고 지루한 밤을 종식시킬 환희의 새벽을 만들기 위함인가. 돌아가기 전에 그 답을 남겨놓길 바란다.’ 뭬야! 내 대답은 바로 이거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강렬한 열망이 확신으로 변했다. 그런데 그 확신이 한순간에 무너져 산산조각이 났다. 거기다 전투의 실패로 군부의 쿠데타전략인 반정부군 육성정책에 암운까지 드리웠다. 전혀 예상치 못한 참담한 결과였다. 더욱 비참한 건 자신을 농락한 대상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피오기는 본능적으로 상대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아주 위협적인 존재임을 직감했다. 순간 피오기에게 극도의 불안감이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