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회장 취임 후 별다른 메시지 아직 없어글로벌 패권전쟁 핵심 반도체 넘어 새 성장동력 절실취임 후 첫 장기 해외출장… '바이오·AI반도체·전기차' CEO 회동전면 내건 메시지 대신 '현장 경영행보'로 미래 중점 사업 제시 분석도
  •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021년 11월 미국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 본사를 찾아 누바 아페얀 모더나 공동 설립자 겸 이사회 의장과 만난 모습. ⓒ삼성전자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021년 11월 미국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 본사를 찾아 누바 아페얀 모더나 공동 설립자 겸 이사회 의장과 만난 모습. ⓒ삼성전자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 이후 이재용 회장이 내놓을 삼성의 미래 청사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해 10월 회장 자리에 오른 이 회장은 취임 이후 아직까진 공식적인 메시지 없이 현안을 돌아보는데 집중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과 미래산업 육성에 속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 회장이 빠른 시일 내에 '제2의 신경영 선언'으로 삼성의 미래를 밝힐 필요성이 대두된다.

    지난 7일은 삼성전자에게 의미 깊은 날이었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표현하며 삼성의 대대적인 변화를 촉구한 '신경영 선언'을 한지 3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국내 1위' 기업이라는 자만에 빠진 삼성에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주문한 선대회장 덕에 지난 30년 간 삼성은 글로벌 넘버원(No.1)으로 도약하는 성공을 맛봤다.

    그만큼 신경영 선언은 현재의 삼성이 탄생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창립기념일 수준으로 여겨진다. 그런 까닭에 특히나 30주년을 맞는 이번 신경영 선언 기념일에는 지난해 새롭게 회장 자리에 오른 이재용 회장이 '뉴삼성'의 근간이 되는 메시지를 전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삼성은 이날 특별한 행사 없이 조용히 보냈다. 기대됐던 이 회장의 새로운 경영 메시지도 없었다. 이 회장은 선대회장이 오랜 기간 병석에 있었던 탓에 사실상 삼성을 이어 받아 이끌게 된지 오래지만 지난해 10월에야 비로소 공식 회장으로 취임해 현재까지도 조용히 현장 경영 행보만 이어오고 있다. 수년만에 공식 회장으로 앉으면서 취임식도 진행하지 않았을 정도다.

    이 회장이 취임후 반년이 넘도록 공식적인 경영 메시지나 비전을 내놓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보여주기식으로 비전을 앞세우기 보다는 현재 삼성이 직면한 위기와 현안들을 면밀히 둘러보고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 대비하기 위해 신중함을 기하는 모습이다.

    더구나 이 회장이 마주한 최근의 경영 현실은 과거 선대회장이 신경영 선언을 할 때 이상으로 더 복잡해졌고 위기 상황도 더 첨예하게 펼쳐지고 있다. 팬데믹 이후 글로벌 경제는 불안정한 상태를 지속하고 있고 미래시장을 먼저 내다보고 선점하기 위해 글로벌 기업들이 경쟁에 더 속도를 내는 현실이다. 과거보다 훨씬 더 다이내믹하게 돌아가는 경영 환경에 불확실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 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이 같은 위기 상황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삼성의 주력 사업으로 자리 잡은 반도체 산업이 예상보다 심각한 다운턴으로 고전하는 가운데 글로벌 경쟁자들에 앞서 미래 먹거리를 선점해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커진 상황이다. 선대회장의 갑작스런 타계 이후 해결되지 못한 지배구조 개편 이슈도 삼성과 이 회장에게 남은 숙제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패권주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이 회장의 고민은 더 깊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 상당부분을 점하고 있는 반도체 시장 최강자 중 한 곳이라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다툼에 직접 영향권에 있다. 삼성이라는 최대 반도체 회사를 자국으로 유치하기 위한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 러브콜이 쏟아지지만 동시에 그만큼 투자에 대한 압박도 강해졌고 투자에 따른 실익과 글로벌 정세를 감안한 셈법도 복잡하다.

    얼마 전 미국이 자국 투자 기업에 보조금과 인센티비를 지급하는 '반도체 지원법(일명 칩스법, CHIPS Act)' 시행을 앞두고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조항들만 봐도 삼성의 고민이 얼마나 깊을지 가늠할 수 있다. 미국 정부는 기업들이 보조금을 받기 위해선 자국 생산공장에서 나온 초과이익을 공유해야 한다거나 첨단 기술이나 생선설비 관련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미국에 새로운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삼성 입장에선 보조금이 절실하지만 그 대가가 어떤 수준까지 될 것인지에 대해 불확실성이 너무도 높은 상황이다.

    그만큼 반도체 산업은 미래 사회에도 여전히 중요할 것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회장도 이미 회장 취임 전부터 메모리 중심의 반도체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시스템반도체 2030' 비전을 이루자는 의지를 밝혔고 그 비전 공개를 기점으로 파운드리 분야를 중심으로 삼성의 시스템반도체 육성 전략에 속도가 나고 있다.
  • ▲ 왼쪽부터 칸 부디라지(Karn Budhiraj) 테슬라 부사장, 앤드류 바글리노(Andrew Baglino) 테슬라 CTO,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경계현 삼성전자 DS부문장 사장, 최시영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장 사장, 한진만 삼성전자 DSA 부사장 ⓒ삼성전자
    ▲ 왼쪽부터 칸 부디라지(Karn Budhiraj) 테슬라 부사장, 앤드류 바글리노(Andrew Baglino) 테슬라 CTO,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경계현 삼성전자 DS부문장 사장, 최시영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장 사장, 한진만 삼성전자 DSA 부사장 ⓒ삼성전자
    이 회장이 취임 전 시스템반도체 분야 육성에 힘을 실었다면 취임 이후에는 현장 경영 행보를 통해서 시스템반도체와 같은 삼성의 미래 중점 사업을 발굴하고 투자하는데 힘을 쏟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행보가 지난 4월 무려 22일 간의 미국 출장 일정이었는데, 이 회장은 이 장기 출장에서 인공지능(AI), 차량용 반도체에 더불어 바이오 분야 핵심 인물들을 만나며 삼성의 미래 사업 비전을 한 눈에 보여줬다는 평가다.

    이 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일정에 동행하며 미국으로 장기 출장을 시작했다. 이 때 이 회장의 동선이나 만난 인물들이 모두 공개되진 않았지만 크게 보면 AI와 반도체, 바이오 분야에서 글로벌 경제 핵심 인물들을 중점적으로 만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중 이 회장이 남달리 관심을 표한 분야가 '바이오'다. 삼성은 현재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중심으로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사업을 진행하며 비교적 짧은 기간에 글로벌 1위 달성에 성공했다. 반도체와 비슷한 생산과 투자 구조라는 점을 활용해 바이오 사업을 '제 2의 반도체 신화'로 만드는데 어느 정도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를 확장, 발전시키기 위해 출장 기간에 미국 제약업계 주요 파트너사들을 두루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AI 반도체로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와 전기차 기업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를 만난 점도 이 회장이 현재 공을 들이는 분야가 어디인지 알게끔 한다. 엔비디아와 테슬라 모두 삼성 파운드리의 과거 고객사이자 앞으로의 고객사이기도 하다. 파운드리업계 최대 고객사를 유치하기 위한 이 회장의 발 빠른 리더십이 돋보인 순간이었다.

    재계에선 이 회장이 뉴삼성의 비전을 밝힐 시점에 대해 다양한 예상을 내놓고 있다. 삼성이 미국 테일러에 짓고 있는 제 2 파운드리 공장 관련 행사나 국내 용인에 300조 원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가운데 열리는 행사 중 하나에 참석해 비전 선언 기회를 만들 것이라는 추측에 힘이 실린다. 다만 이 같은 주요 행사들이 빨라도 올해 말이나 내년께 열릴 것으로 보여 뉴삼성의 새 비전이 공식화되기까진 다소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