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시30분 부산항 출발~다음날 오전 10시30분 상해 도착가로 눕힌 에펠탑 크기, 적재 컨테이너 총길이 79km이희교 선장 "우리(배)는 쉬지않고 달린다"
  • ▲ 항해 중에 선교(브릿지)에서 바라본 현대리스펙트호 선미.ⓒ엄주연 뉴데일리경제 기자
    ▲ 항해 중에 선교(브릿지)에서 바라본 현대리스펙트호 선미.ⓒ엄주연 뉴데일리경제 기자
    "standby all station, all station all standby"

    출항 1시간 전. 선내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12시 30분. 선장과 3항사는 선교(브릿지)에 오르고, 1항사와 2항사는 홋줄(선박을 부두와 연결하는 밧줄)을 풀기 위해 각각 선수와 선미로 이동한다. 출항을 앞둔 긴장감에도 모든 과정이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항해사들의 질서있는 움직임에 맞춰 커다란 배도 천천히 항구을 떠날 준비를 했다. 

    지난 14일 깜깜한 어둠 속에서 컨테이너 선적 작업이 한창인 현대리스펙트호에 올랐다. 15일 출항을 생생하게 경험하기 위해 하루 먼저 배에 올랐다.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크기의 철골 구조물 내부로 들어가니, 계단이며 엘레베이터며 딱딱하고 차가운 이질감이 가장 먼저 온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이내 질서정연한 분위기 속에 안정감이 생겼다. 밤새 귓가에 머물던  컨테이너 작업 소리가 잦아들고, 해가 밝자 가장 기다렸던 출항의 순간이 눈앞에 있었다. 

    현대리스펙트호는 현대상선 컨테이너선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2012년 현대삼호중공업에서 건조한 이 선박은 길이 366m, 너비 48m, 높이 68m로 선박을 세웠을 경우 에펠탑(300m)보다 크다. 선박에는 최대 1만31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를 실을 수 있다. 적재된 컨테이너를 일렬로 세우면 서울에서 평택시 거리(약 70km)보다 긴 79km에 달한다.
  • ▲ 배에 올라온 도선사와 의논 중인 선장(왼쪽), 배를 끌어당기고 있는 타거보트(오른쪽).ⓒ엄주연 뉴데일리경제 기자
    ▲ 배에 올라온 도선사와 의논 중인 선장(왼쪽), 배를 끌어당기고 있는 타거보트(오른쪽).ⓒ엄주연 뉴데일리경제 기자
    출항에는 이 배의 선원뿐만 아니라 외부의 조력자, 도선사(파일럿)가 필요하다. 도선사는 보통 30년 이상 경력자가 대부분이다. 배를 가장 잘 아는 건 선장이지만, 각 항구의 특성을 제집처럼 훤히 꿰고 있는 사람은 도선사다. 이 배에도 1시경 도선사가 올라왔다. 올라온 직후 선장과 배를 어떻게 출항시킬지 의견을 교환한다. 배가 크다보니 선석에서 빠져나가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모든 과정은 정확한 시간과 용어로 일지에 기록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배가 출항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배도 필요하다. 이 배를 터그보트라고 부른다. 선박은 옆으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배를 선석에서 빼내 항구를 빠져나가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보면, 일반 어선처럼 크기가 작지만 힘은 엄청나다. 배를 둘러싼 타이어를 큰 선박에 밀착해 밀어주기도, 배와 줄을 연결해 끌어당기기도 한다. 터거보트의 도움으로 이 배도 선미부터 180도 터닝에 성공했다. 

    도선사가 이 배를 떠난 시각은 2시경. 이로써 출항 과정도 1시간 30분 만에 끝이났다. 상해까지는 앞으로 약 30시간, 이제 현대리스펙트호만의 고독한 항해가 시작됐다.

    이희교 현대리스펙트호 선장은 이번 항로에 대해 "항로 특성상 중국 쪽에 어선이 많아 그 부분을 염두에 둬야 한다"면서 "현대상선에서 현재 운항하는 배 가운데 가장 큰 선박인 만큼, 조정에도 신경을 써야한다"고 말했다. 특히 배를 돌릴때는 온 신경이 집중된다. 이 선장은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곳의 크기는 똑같은데, 큰 배가 여기에 맞추려니 신경이 더 쓰일 수 밖에 없다"며 "큰 배일수록 둔해 방향을 틀 때 조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 선교에서 배를 운항하고 있는 이희교 현대리스펙트호 선장.ⓒ엄주연 뉴데일리경제 기자
    ▲ 선교에서 배를 운항하고 있는 이희교 현대리스펙트호 선장.ⓒ엄주연 뉴데일리경제 기자
    부산항에서 출발한 현대리스펙트호에는 8700TEU의 컨테이너가 실렸다. 이 배의 화물 적재량이 1만3000TEU인 점을 감안하면 66% 정도가 채워진 것이다. 컨테이너 개수로 따지면 대략 5000여개다. 이 많은 짐들이 어디에 다 실렸을까. 배에 실린 짐은 외부에서 볼 수 있는 해치커버 위쪽이 전부가 아니다. 배 아래에도 11층 높이의 홀드라고 불리는 짐칸이 있다. 

    배의 아랫 부분, 홀드가 궁금해졌다. 외부인은 쉽게 볼 수 없는 곳이라 더 도전의식이 생겼는지, 어느새 두 손을 철골 사다리에 의지한채 까마득한 홀드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직접 홀드에 내려가보니 배의 규모를 단번에 실감할 수 있었다. 홀드는 배의 밑바닥부터 해치커버 아래까지로 높이는 26m다. 컨테이너의 위치는 여러가지를 감안해 조정되는데, 해치커버 밑인 이곳에는 주로 무게가 있는 컨테이너가 실리는 경우가 많다. 

    내년이면 28년차인 이 선장은 선박의 운항에 있어서 '안전'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가장 먼저 인명 안전이 중요하고, 다음으로 서비스 산업인 만큼 화주들 화물을 선적해서 내릴때까지 안전하게 잘 관리하는게 목표"라며 "최근에는 환경오염과 관련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 ▲ 기관실 모니터링 시스템, 발전기, 샤프트, 엔진(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엄주연 뉴데일리경제 기자
    ▲ 기관실 모니터링 시스템, 발전기, 샤프트, 엔진(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엄주연 뉴데일리경제 기자
    ◆기관실에선 "심장이 뛴다"… 환경규제 앞두고 저유황유 교체 작업

    출발과 동시에 선미에서는 배의 심장이 쿵쾅대며 뛰기 시작한다. 메인엔진은 배의 심장. 직접 만져보니 뜨거운 온도와 함께 강력한 기통 엔진이 뿜어내는 위력이 한 번에 전달됐다. 이 배에는 12기통 엔진이 일렬로 장착돼 있다. 건드리면 터질듯한 기세로 웅장한 소리를 내는데, 9만5000마력의 힘을 가졌다. 메인엔진은 기관실에서도 핵심 장비로 꼽힌다. 다른 장비의 경우, 여분이 하나씩 있는데 메인엔진은 오로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엔진이 있는 기관실은 배의 선미에 있다. 선장과 3항사가 있었던 선교에서 내려와 20분 정도 배의 뒤쪽으로 가다보면 새로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먼저 반기는 건 귀가 터질듯한 소음이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소음에 귀마개 착용이 필수였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기관사들은 대수롭지 않은듯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귀마개를 꽂고 엔진 쪽으로 향하자 이제는 심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기관실에는 발전기가 총 5대 갖춰져 있다. 입출항 시에는 4개가 돌아가고, 항로 중에는 1개만 돌아간다. 모든 작업 과정은 발전기 옆 기관실 내 모니터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옆으로 나가면, 메인엔진을 연결하는 샤프트도 볼 수 있다. 샤프트는 총 8m로 배를 움직이게 하는 뒷쪽 프로펠러와 연결돼 있다. 배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연료를 정제하는 연료청정기도 이곳에 있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국제해사기구(IMO)의 환경규제를 앞두고 기관실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배출통제구역(ECA) 통과 전 사용 중이던 고유황유를 저유황유로 교체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교체하더라도 고유황유가 남아있을 수 있어 평균 5시간 전에 연료 교체 작업을 실시한다. 중국은 자국 영토 기준 12해리(약 22㎞) 연안에 설정한 ECA 내에서 황산화물 비율을 0.1%까지로 강화했다. 아직 이 배는 스크러버를 설치하지 않았다. 이번 항해를 마지막으로 스크러버 설치를 위해 조선소로 들어갈 예정이다. 

    김성관 현대리스펙트호 기관장도 환경규제로 인해 앞으로 신경쓸게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기관장은 "스크러버를 설치할 경우, 항해 중에 1개만 돌렸던 발전기를 2개로 늘려야 한다"면서 "황함유량 배출을 감시하는 시스템도 들어오게 돼 이 부분도 신경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고나 운항 지연이 생기면 손해가 막대하기 때문에 기관실에서도 첫째로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 ▲ 현대리스펙트호에서 바라본 중국 상해 양산터미널.ⓒ엄주연 뉴데일리경제 기자
    ▲ 현대리스펙트호에서 바라본 중국 상해 양산터미널.ⓒ엄주연 뉴데일리경제 기자
    16일 오후 8시 20분(현지시간), 드디어 현대리스펙트호가 중국 상해 양산터미널에 다다랐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갇힌 선교에는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조타등의 미세한 불빛으로 배의 방향을 확인하는 선장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도선사가 승선해 선박의 입항을 돕는다. 보통 출항보다 입항할 때가 더욱 까다롭다고 한다. 상해의 경우 해무도 끼고, 어선도 많아 더욱 그렇다.

    선장은 도선사가 올라탄 이후에도 선박과 관련한 모든 책임을 지게 된다. 이 때문에 도선사와 의견을 잘 교환하고, 필요 시에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경우도 생긴다. 두 사람의 의견 조율 끝에 이 배는 조류를 감안해 좌현 쪽을 선적에 붙이기로 했다. 타거 보트가 다시 입항을 도왔다. 이 배의 자리는 세계적인 선사인 MSC와 머스크 중간, 선적이 타이트했으나 완벽히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선박이 입항을 완료한 시각은 10시 30분. 배가 항구에 도착하면 모든 일이 끝난 것 같지만 항해사들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입항 신고를 하고 내릴 컨테이너와 이곳에서 새로 실을 컨테이너를 정리하고, 어떻게 실을지 전문가와 의논한다. 이 배에 올라 새 항해를 시작하는 짐들과 이곳에서 내리는 사람들, 현대리스펙트호에게 이곳은 그저 잠깐 들르는 터미널 한곳에 불과했다. "배는 쉬지않고 달린다" 선장이 했던 말처럼 이 배는 다시 바다를 누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