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진 금감원장, 운용사 CEO에 "거수기 오명 벗고 파수꾼 역할해야" 주문 현실은 반대율 6%대 그쳐, "퇴직연금 쥔 기업 눈치에 소신표 불가능" 당국은 "스튜어드십코드 점검" vs 업계는 "생존 걸린 영업" 전전긍긍
  • ▲ 이찬진 금감원장ⓒ연합
    ▲ 이찬진 금감원장ⓒ연합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국내 자산운용사 대표들을 소집해 "자본시장의 파수꾼으로서 의결권을 적극 행사하라"고 고강도 쇄신을 주문했다. 

    하지만 운용업계는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퇴직연금 유치 등 대기업과 얽힌 '을(乙)의 비애' 탓에 속앓이만 하고 있다. 내년 3월로 다가오는 주주총회 시즌, 당국의 압박과 기업 고객의 눈치 사이에서 운용사들의 '식은땀'이 흐르는 모양새다.

    24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이찬진 원장은 이달 17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자산운용사 CEO 간담회'에서 20개사 CEO를 향해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이 원장은 "운용사가 투자자 이익을 대변하는 수탁자로서 기업가치 제고와 거버넌스 개선을 위한 의결권 행사에 적극 나서야 한다"며 "필요하다면 투자 대상 기업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을 제시해 '파수꾼'의 책무를 완수하라"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고객 돈을 굴리는 것을 넘어, 경영 감시자로서 잘못된 결정에는 과감히 'NO'를 외치라는 주문이다.

    이 원장은 이어 "돈을 굴려 돈만 버는 금융이 아닌, 가계자산과 경제를 키우는 금융이 돼야 한다"며 운용사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향후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원칙) 이행 실태를 직접 점검하겠다고 경고했다.

    당국의 서슬 퍼런 주문과 달리, 자산운용사의 현실은 여전히 '거수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6월 발표한 '자산운용사 의결권 행사 현황'에 따르면, 국내 자산운용사의 의결권 행사율은 91.6%로 외형상으로는 주주권을 적극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실상은 다르다. 전체 안건 중 명확히 반대 의사를 표명한 비율은 고작 6.8%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기간 국민연금이 20.8%의 반대율을 기록하며 적극적인 견제구를 던진 것과 확연히 대비되는 수치다. 사실상 운용사들이 주주총회장에 들어가서 기업 경영진이 내민 안건에 '프리패스' 찬성표를 던져준 셈이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찬진 원장의 주문이 현실을 도외시한 '탁상행정'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구조적인 '갑을 관계' 때문이다.

    국내 자산운용사의 핵심 수익원은 대기업 계열사들이 쥐고 있는 퇴직연금 시장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퇴직연금 자금을 맡긴 기업은 운용사 입장에 '슈퍼 갑'"이라며 "고객사 경영진의 선임 안건 등에 반대표를 던지는 건 당장 내일부터 영업을 접겠다는 뜻과 다름없다"고 토로했다.

    특히 금융지주 계열 운용사의 경우, 그룹 차원의 이해관계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가 더욱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목소리다.

    해당 간담회에 참석한 CEO들은 겉으로는 "책임 있는 기관투자자로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화답했다. 하지만 뒤이어 "가상자산 상품 출시를 지원해달라", "펀드 투자자 세제 혜택을 달라"는 등 수익성 보전을 위한 건의 사항을 쏟아냈다. 이는 의결권 행사 압박으로 인한 영업 타격을 다른 먹거리로 상쇄하려는 업계의 절박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찬진 원장은 "2026년을 투자자 보호 원년으로 삼겠다"며 강공 드라이브를 예고했다. 당국의 '파수꾼' 압박과 시장의 '자본 논리'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운용사들의 딜레마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