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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란에 이 신문 박은주 엔터테인먼트부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 주일에 개봉하는 영화는 줄잡아 15편. 영화마다 시사회가 끝나면 경향·국민·동아·서울·세계·조선·중앙·한겨레·한국일보 등 일간지 영화담당 기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 이 영화는 마음에 드는 감독이 만들었으니까 톱기사, 저 영화는 제작자를 아니까 작은 박스로, 나머지는 킬(kill). 책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표지가 예쁘니까 크게, 저 책은 왠지 밉살스러우니까 기사 쓰지 말자….>
‘담합(談合)’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지만 그 중에서 언론이 제일 싫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의심되는 노무현 대통령이 또 언론을 표적으로 삼았다. 집권 초기, 외국식 브리핑 룸 제도를 도입하고 기자실 제도를 폐지한 걸 벌써 잊으셨는지, 보건복지부의 ‘건강투자전략’ 정책 관련 기사에 대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담합하고”라고 맹비난했다. 17일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과의 오찬에서 ‘유감’을 표명했지만, 대통령의 기본적 ‘언론관’을 수정한 건 아니다.
물론 이상한 일이 있긴 하다. 북한이 핵실험했을 때, 대통령이 개헌방침을 내놓았을 때, 신문들의 제목은 참 비슷한 것들이 많았다. 어떤 영화나 책, 공연은 신문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크게 소개한다.
누가 봐도 대통령감인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듯, 뉴스 중에는 ‘톱’감이 있고, 지면낭비인 경우가 있다. 기자의 기본 일 중 하나는 ‘고르는’ 일인데, 이 선정 기준은 ‘독자에게 권할 만한 수준인가’ ‘독자가 눈길을 줄 만한 내용인가’이다. 그건 대단한 전문적 식견이 필요한 게 아니라, 상식적이고, 그래야 한다. 이게 담합이라면, 베스트셀러나 대박영화를 구매한 독자나 관객도 ‘소비의 담합’으로 고발해야 한다.
‘담합’이 성립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기자란 부류들은 의기투합하고 담합할 만큼, 타사 기자와 동료애가 투철한 족속들이 아니다. 이념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매체 간에 긴장이 존재하고, 때문에 사전 담합을 통해 공동보조를 취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담합은커녕, 기자들은 온갖 행정적 용어와 미사여구가 동원된 보도자료에서 요점만 추려내, 새로운 ‘팩트’를 추가하려 한다. 다른 신문과 차별되고 정확한 기사를 써야, 신문이 살고, 기자도 밥 먹고 산다.
사실 우리는 대통령의 ‘분노’의 원인을 알고 있다. 대통령은 자신의 개헌 제안이 ‘정략적’이라 평가되면서 ‘진정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주도하는 게 언론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언론만 생각하면 화가 앞서고, 말이 엉킨다.
눈여겨볼 건, 그간 조선·동아·중앙을 맹비난해 온 대통령이 이번에는 언론 전반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는 점이다. 개헌 등의 문제에 대해 친여 매체로 분류되는 일부 방송·신문들까지 문제를 제기하고 나오는 게, 대통령으로선 도통 이해가 안 갔을지 모른다. 자신은 결코 ‘정략적’이라 인정할 수가 없는데, 대부분의 매체들이 비판하고 나오니, ‘너희들 다 한패야’라며 ‘담합’이란 말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것이다. 속이 훤히 보이는 대통령의 ‘개헌 제안’ 같은 사안에 대해 ‘대통령과 담합’했다간, 독자나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당한다는 것을 방송과 신문 매체들 대부분이 알고 있다는 것. 또 언론들이 입을 맞춘 듯 비판하는 건 대통령과 참모들의 실정(失政)의 결과이지 ‘죽치고 앉아있는 기자들의 담합’ 때문이 아니라는 것. 그걸 하지 말라고 하는 건, 대통령이 그토록 문제라고 지적한 ‘권력과의 담합’이다. 그건 ‘나쁜 언론’이 되라는 유혹이다.
미국 속담에 “진정성이란 기꺼이 제 주머니를 털 수 있는 마음”이란 말이 있다. 대통령이 정파적 이해를 벗고, 자기희생적이며, 쓸모있는 제안을 제발 해보시라. 대통령이 그렇게 힘 뺄 필요도 없이 국민들이 먼저 그 ‘진정성’을 알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