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트, 쇠구슬, 사제총, 가스화염방사기, 화염병...

    멀리 미국서 보는 것만도 아슬아슬했던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파업이 더 이상의 폭력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고 끝났습니다. 파업 기간이 77일 이라는 숫자 하나만으로도 그 파업의 치열성이 얼마나 거셌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회사 존망이 달렸고 노조원들은 자신들의 생계가 달린 파업이라는 점에서 서로가 물러서기 어려운 파업이었습니다. 파업의 치열성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하는 것은 77일이라는 숫자보다도 파업을 진행하는 노조원들과 그것을 해산하려는 경찰의 대치와 대결의 격렬성이었습니다. 파업 노조원들은 공장 출입문을 용접까지 하고 사제 볼트 대포와, 사제 총, 쇠구슬 새총, LPG 가스 화염 방사기,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경찰의 크레인과 살수차, 전기총, 고무탄에 맞섰습니다. 그리고 자동차 도장 공장 안에 있는 3만 리터의 시너와 20여만 리터의 인화 물질을 최후 인질로 삼았습니다. 만약 경찰 진압 과정에서 시너나 인화 물질이 폭발할 경우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을 불러 올 수 있는 소름끼치는 파업이었습니다.

    "저런 회사를 살려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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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용자동차 도정공장 옥상의 노동자들. ⓒ 뉴데일리

    마지막 대결 순간에 극적인 타협으로 파업이 무사히 끝난 뒤 회사와 사원 가족들은 물론 국민들은 안도의 숨을 내 쉬었습니다. 이번 파업은 쌍용자동차의 생산 손실액만 수천억 원에 이르게 했고 협력 업체의 피해액이 1조원에 달하고, 수십만 명의 일자리를 위협받게 했다고 합니다. 파업이 재앙으로 가지 않고 끝난 것이 다행스럽지만, 거기에 만족하기에는 이번 파업은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고, 그 후유증이 큽니다. 파업이 끝나자 이제는 회사를 살리는 길만 남았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저토록 만신창이가 된 회사를 살릴 수 있는 묘약과 묘방이 있을 수 있을지 자신하는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설사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저런 회사를 살려야 하느냐 하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거하지 못하고 그대로 덮어두고, 언제 고름덩어리가 다시 터질지도 모르는 저런 회사를 과연 살려야 하느냐 하는 질문은 회사를 파국으로 몰고 간 사람들에 대한 당연한 질책입니다. 회사와 같이 망하자고 총과 대포까지 만들어 회사와 경찰을 향해 맞서고, 어제까지 한 식구였던 사람들에게 주먹질을 한 사람들과 앙금을 훌훌 털고 회사의 밝은 미래를 위해 서로 손을 잡고 정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경찰구타' 옹호자는 무정부주의자

    이번 파업 노조원들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파업 노조원들의 폭력성과 파괴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경찰이 야만적인 폭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변호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 상당한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 국회의원까지 가세하고 있습니다. 불법적인 파업을 해산시키는 것은 경찰의 당연한 책무인데도 한국에서는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을 규탄하는 희한한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운위하지만 경찰을 때리고 사제 총과 대포로 경찰에 맞서는 파업자들을 옹호하는 것은 민주주의도 아니고 인권주의도 아닙니다. 국민의 인권과 나라의 민주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은 단호하게, 필요하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폭력 파업을 진압하는 것이 선진 민주사회의 기본 골격입니다. 시너와 인화물질을 인질로 잡고 경찰을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는 파업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은 나라를 무정부 사회로 끌고 가자는 것이거나, 극단적인 이념에 최면 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숨은 계산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카고 '헤이마켓 파업'때 4명 사형 1명자살

    노동운동, 파업의 극렬성을 가장 극적으로 상징하는 사건이 120여 년 전 시카고에서 있었던 "헤이마켓 사건"(Haymarket Affair)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헤이마켓 폭동" 혹은 "헤이마켓 학살" 이라고 부르는 헤이마켓 사건은 미국의 격렬했던 파업의 역사를 웅변해 주는 사건이고 세계에 메이데이(May Day) 노동절을 만든 원천이 됐습니다. 지금은 시카고 다운타운 자리인 헤이마켓은 대규모 군중이 집결할 수 있는 광장이었습니다. 1886년 5월 4일,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 권리를 요구하면서 며칠째 계속됐던 파업자들은 경찰과 팽팽한 대치를 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이날, 경찰이 파업자들을 강제 해산시키려고 했을 때 누군가가 경찰을 향해 폭탄을 던진 것이 도화선이 됐습니다. 경찰은 파업자들을 향해 발포를 했고, 이로 인해 경찰 8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하고, 숫자를 알 수 없는 파업자들이 사망하고 다쳤습니다.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파업자 몇 명이 사망했는지, 1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헤이마켓 폭동의 주모자들은 재판대로 갔습니다. "아나키스트"(Anarchist,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이들 폭동의 주동자들 4명은 사형 당하고, 한명은 사형대에 서기 전날 자살했습니다.

    폭력엔 야만적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경찰

    이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의 파업에서는 절대로 폭력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노동운동의 역사를 들추면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사진 가운데 하나가 총에 대검을 착검한 수백 명의 군인들이 성조기를 든 수천 명의 파업자들과 대치하고 있는 광경입니다.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이 난지 26년 뒤에 있었던 매사추세츠의 로렌스 텍스타일 파업 광경을 찍은 이 사진은 당시의 파업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살벌한 과정을 통해 미국은 평화적 파업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파업이 시작되면 경찰과 파업자들이 대치하고, 거기가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입니다. 그 선을 넘으면 경찰은 경찰봉을 휘두르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총을 쏩니다. 미국에서는 경찰에 반항하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수갑을 채우고, 폭력적으로 반항하면 한국의 인권주의자들 말대로 경찰은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총을 쏩니다. 한국에서처럼 경찰이나 군인이 시위자에게 매질을 당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타인의 자유를 방해하거나 재산을 침해하고, 공공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유의 만용을 야만적 폭력으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의 남용이 비판되면서 시정되어 왔지만, 공권력이 남용된다고 해서 파업자들의 폭력을 결코 정당화 시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평화적 파업 문화를 만드는 초석이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근간이자 힘입니다. 미국의 근로자들이 쌍용자동차 파업자들처럼 사체 총이나 대포를 제조해서 저항했다면 이들은 폭도나 테러리스트로 간주됐을 것이고 이들의 인권은 다수의 인권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야만적으로 진압 되었을 것입니다. 경찰은 국가 질서를 지키기 위해 합법적 폭력을 사용할 수 있지만, 시민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무기를 들 수 없습니다. 파업자가 폭력적이 되면 스스로의 파업 명분을 허무는 것이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신성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수백명 살기위해 수만명 희생 강요

    이번 쌍용차 파업은 한국 노동 운동에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쌍용 파업자들의 가장 딱한 모습은 자기네만 살겠다는 철저한 이기주의입니다. 명분으로 내 건 것은 970 명이 함께 구제되어야 한다는 집단 의리와 연대 의식이지만, 이 이면을 뒤집으면 나를 포함한 970명이 살기위해 수십만 명의 일자리가 위협 당하고, 수천억 원의 재산을 손실시키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이기주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를 선택할 때는 자본가의 이익과 노동자의 권익이 합치되는 점에서 맺어지는 계약이 있습니다.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정리 해고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회사가 살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일부의 눈물과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장경제의 기반입니다. 지금처럼 숨 막히는 국제 경쟁시대에 죽어도 함께 죽자는 경영 방식으로는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근로자의 권익이 찌를 듯 했던 미국의 GM 자동차도 살기위해 노동자들이 대폭 양보를 하면서 파산 절차의 수모를 밟았습니다. 오늘의 경쟁 사회에서는 공룡 기업이 따로 없습니다. 회사와 근로자가 합심해서 생산과 경영을 끊임없이 혁신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블루 오션이 레드 오션으로 됩니다.

    죽어도 같이 죽자?...영원히 다 죽는다

    개개인으로 돌아가면 파업자들 모두가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눈물 나는 절박함과 고통이 있습니다. 회사는 이들의 고통과 아픔에 깊이 배려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만 죽어도 함께 죽자는 사회주의 경영 방법으로는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사회나 국가는 한 사람의 눈물과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가 함께 탄 배를 침몰 시킬 수가 없습니다. 몇 백 명의 무급 휴직과 영업직 전환을 얻어 내기 위해 쌍용호를 침몰시키는 근로자들의 폭력적 파업은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이기주의입니다. 월급을 함께 내려서 함께 살기를 작정하는 나눔의 정신을 가질 수 없다면 정리 해고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 냉혹함입니다. 회사가 원망스럽고 배신감이 뼈에 사무치지만, 그렇다고 쇠파이프와 죽창을 들고 경찰에 맞서는 것은 자기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상실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살고, 살아가야할 공동체 정신, 민족의 품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쌍용 같은 폭력적 파업이 계속된다면 한국 기업의 장래는 암울하고, 한국의 미래에서 인간의 모습이 죽어 갈 것입니다.

    폭력 뿌리 뽑아 비폭력 원칙 세우라

    쌍용 파업은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정치권과 회사와 근로자들은 이번 쌍용 파업을 계기로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앞으로 쌍용 자동차와 같은 파업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쌍용 파업을 여기서 덮는 것은 썩은 고름을 그대로 아물리는 것입니다. 한국의 파업 문화를 쇄신해야 합니다. 쌍용을 계기로 파업 풍토를 일신하지 않으면 또 다른 쌍용이 나타날 것이고, 이러한 쌍용 현상을 수술하지 못하면 한국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지구촌 경제 전쟁에서 살아남기 힘듭니다. 한국인은 신명이 나면 춤추듯 열심히 일을 하지만, 그 신명이 분노와 좌절로 변하면 야수적이 됩니다. 한국인의 신명은 특출한 강점이지만 인간이나 기업은 늘 신명나는 일만 있을 수 없습니다.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하고 배신이 살을 깎는 듯해도 쇠파이프나 죽창을 드는 파업 시위를 할 수는 없습니다. 쌍용 자동차의 파업을 폭력적으로 주도한 노조 간부를 엄정하게 벌하고 폭력 시위를 뿌리 뽑는 단호한 조처를 취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공권력에 의해 억울함을 당해서는 안 되지만 폭력적인 파업자들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 노동운동의 살길은 합리적이고, 비폭력적이고, 철저하게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파업 풍토를 혁신하고 파업 문화를 일신해야 기업과 국민과 나라가 함께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