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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활용한 홍보의 귀재...주필들 협조 약속
한국으로 부임하기 직전인 1906년 1월 30일 저녁, 이토는 주요일간지의 주필들을 레이난사카의 관저로 초청했다. 메이지시대를 통틀어 이토만큼 언론의 중요성을 일찍이 터득하고, 언론과 공존했던 정치인도 그리 흔치 않다. 그는 언론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하여 언론계 출신인 후루야 히사츠나(古谷久綱)를 1900년 이후 비서관으로 채용할 정도로 언론의 역할을 중요시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언론을 적절히 활용하여 자신의 정책노선과 입장을 밝힘으로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고, 또한 여론의 지지를 받으려고 했다. 통감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도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토는 국내외기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통감정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곤 했다. 통감으로 부임하기 전 주요언론사의 주필을 초청한 것도 언론을 통해 통감의 시정방침을 밝히고 언론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주필들과의 간담회에서 이토는 통감으로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시정방침을 밝히고 언론의 협조를 당부했다. 그는 먼저 그동안 언론에서 비판해 온 을사강제조약의 ‘추상성’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에 의하면 5개조로 된 협약이 비록 간단하고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운영의 묘”를 살리면 “협약의 정신을 충분히 관철”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협약의 정신’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가 제시하는 ‘시정방침’에 미루어 짐작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한국 내정 장악, 주둔군 증강, 일본인 이민 장려...
이토는 “조선보호의 요점”은 “외교, 국방, 시정개선 세 분야”에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특히 “시정개선”을 강조했다. 즉 통감부의 업무가 한국의 대외관계를 전담하는 것은 물론, 이와 함께 ‘시정개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내정과 국방도 담당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일본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여 일본인의 한국이주를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도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방안의 하나라고 밝혔다. 한국의 내정관여, 주둔군 증강, 이민 장려 등 이 모든 것은 협약에 명시한 ‘대외관계’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토가 말하고 있는 ‘협약의 정신’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이토는 이와 같은 자신의 구상을 실현함에 있어서 언론에게 두 가지 협조를 당부했다. 하나는 조급한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한국사회에 만연돼 있는 “부패와 비리는 뿌리가 깊고 고질화”돼 있기 때문에 ‘점진적’ 개선이 필요했다.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결과를 취하려고 하면 예기치 못했던 부작용과 보다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 이토의 ‘실리주의적 점진주의’다.
또 다른 당부는 한국에서 활동하거나 또는 한국을 내왕하는 일본인들이 보다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언론이 선도해 달라는 것이다. 이토에 의하면 그동안 일본인이 한국에서 취한 “비도(非道)의 거동(擧動)”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 한국인이 “밖으로는 굴종을 치장하고, 안으로는 원한의 정을 키우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앞으로 한국으로 이주할 일본인들을 잘 선별하고, 정부당국도 이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 자유주의 정치인으로 정당정치 발전에 기여한 당시 <마이니치(每日)신문>의 시마다 사부로(島田三郞) 주필은 참석한 언론인 모두를 대표하여 이토의 방침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지원을 약속했다. 아울러 “도저히 일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을 신영토에 관리로 채용하는 경우가 그동안 적지 않았는데, 통감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그와 같은 정폐(情弊)를 단절”할 것을 당부했다.
을사조약에 없는 '총체적 지배' 구상...낭인들 의견 수렴
한국 통감 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운영의 묘’를 살리기 위한 이토의 통치전략은 ‘실리적 점진주의’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외교권은 물론 ‘내정’의 실권을 서서히 잠식하는 것이었다. 그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고종은 물론 한국 내각에 통감부가 내정에 관여한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이토에 의하면 ‘동양화란(東洋禍亂)의 근원’인 한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국정개량이 필요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외교와 내정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토가 고종에게 통감 부임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국이 오늘의 쇠운을 만회하고 독립부강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국정의 개량이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가 강조하는 ‘국정의 개량’이라는 것은 “황실의 존엄과 강령 유지, 외교 관리, 시정개선, 국토방위”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이는 외교만이 아니라, ‘총체적 지배’를 의미하고 있었다.
한국 내각 유지 "신분 보장 할테니 안심하시오"
이토는 ‘총체적 지배’를 위한 ‘운영의 묘’를 크게 세 방향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첫째는, 신문사 주필들과의 간담회에서도 밝히고 있는바와 같이, 그는 과격한 변화보다는 먼저 안정을 유지하면서 점진적 개선과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통감의 수족이 되어 실질적으로 정책을 집행할 한국정부의 내각과 정치권의 안정을 중요시 했다. 내각의 편제와 구성원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지배계층의 동요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분을 확실히 보장해 줌으로써 더욱 친일의 성향을 배양하려고 했다. 을사강제조약이 조인된 직후 이토가 주최한 간담회에서 그는 한국정부의 각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신분보장을 약속했다.“시정개선을 해 나감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일반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통감부는) 지금의 내각대신을 교체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현재의 내각으로 일치협동하여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폐하께서도 현상유지를 원하고 있고 또한 대신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본인도 폐하와 같은 뜻으로서 현재의 각 대신을 변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대신 여러분도 안심하고 국리민부(國利民富)를 위해 진력해주실 것을 당부합니다.”[伊藤大使 對話錄, 1905.11.29]
한국 각료들과 가진 최초의 공식회의에서도 이토는 “현재의 각 대신은 결정적인 과실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본인은 충분히 지원할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안심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직무에 충실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라고 약속했다. 대신들의 신분보장을 통감으로서 다시 확약한 것이다
실제로 이토는 1907년 5월 박제순 내각을 이완용 내각으로 교체할 때까지 약 16개월 동안 기존의 내각을 그대로 이끌고 가면서 통감통치의 체제를 굳혀나갔다.강대국 간섭 피하려 "한국내각이 관장" 외형 갖춰
‘운영의 묘’를 위한 이토의 둘째 구상은 ‘보호통치’에 적합한 통치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국가를 건설하면서 통치를 제도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토로서는 새 영역에 대한 지배의 틀과 형식을 구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토가 보다 더 심각하게 이 문제를 검토한 것은 강대국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1905년의 을사강제조약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만을 장악하는 것으로서, ‘내정’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조약 자체는 물론, 이토 또한 ‘내정’은 종전과 같이 한국인이 관장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내외에 공개적으로 발언했다.그러나 일본 정부나 이토가 의도하고 있었던 것은 한국의 외교권만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 지배’였다. 즉 내정의 실권도 장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대국을 늘 의식해 온 이토로서는 통감부가 한국 내정을 직접적이고도 공개적으로 관장할 경우 한국내의 반발을 격화시킬 뿐만 아니라, 이는 국제적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일본이 비록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강대국 대열에 들어섰고, 미국, 영국, 러시아를 위시한 서양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의 ‘탁절한’ 지위를 인정했다 하더라도, 통감부 지배를 시작할 1906년 일본은 여전히 불평등 조약 속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토의 염려가 결코 지나친 기우라고만 할 수 없다. 더욱이 삼국간섭을 체험한 이토로서는 당연한 염려였다.
이러한 판단 속에서 만들어낸 것이 이토 특유의 통치 메커니즘이다. 즉 외관상 또는 형식적으로는 한국의 황제와 정부가 내정을 통치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통감과 일본이 지배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이토는 두 개의 통로를 마련했다. 하나는 전반적인 통치의 기저를 논의하기 위한 황제와의 협의를 정례화 하는 것이었다. 통감정치를 협의하기 위해 ‘알현’이라는 절차를 거처 이토는 먼저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개략적인 시정 방안과 방향을 고종에게 ‘보고’하고 협의한다는 것이다. 대외적 명칭은 ‘알현’이고, 형태는 ‘협의와 보고와 재가’이지만, 실은 자신의 정책을 고종에게 ‘통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외형상 한국의 최고지배권자인 황제와 협의해서 통치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토가 제시한 방향에 대한 황제의 거부는 통하지 않았다. 이는 처음부터 드러났다.
고종의 거부에 단호 "누구도 이의 제기할수 없소"
1906년 3월 9일 통감으로 부임한 후 최초의 ‘알현’에서 이토는 시정개선 대상으로 금융, 교육, 군사제도, 궁중내부의 문제, 궁중의 재정문제 등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그리고 시정개선을 ‘즉시’ 착수하고, 한국 황실과 정부가 어려움을 감내할 일, 입법과 행정 개량, 차관 도입, 보통교육 실시, 경찰력 확장 등 여섯 가지의 방안을 제시했다. 개선의 대상이나 방법 모두 외교와는 무관한 국내통치에 관한 사항이었다. 고종황제는 이토의 방안을 그대로 수락하지 않았다.“시정개선에 관한 것은 짐이 적절하게 정부대신과 충분히 협의하도록 하겠소. 그리고 정부대신들이 그 결과를 보고할 때마다 짐이 세밀히 검토하고 재가하여 시행토록 할 방침이오.” 이는 고종과 대신이 국내통치를 담당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토는 고종에게, “통감의 임무가 귀국에 대한 지도경영을 담당한다는 데 강대국정부가 모두 동의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히로부미는 앞으로 귀국의 진운에 필요한 충언과 행동에 그 누구로부터도 이이를 제기할 수 없고 또한 방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이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답했다.
모든 ‘시정개선’은 자신의 뜻대로 처리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실행했다. 이는 이토가 을사강제조약 당시 “내정, 즉 자치의 요건은 의연히 폐하의 친재 아래서 폐하의 정부가 이를 행하는 것은 종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고종에게 한 약속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실제로 그 후 모든 정책은 이토의 뜻대로 진행됐다. 대한제국의 통치권은 이미 이토의 수중에 있었다.
이토의 지배기구 '협의회' 구성...고종 알현서 사전통보후 내각에 '명령'
통치 메커니즘의 또 다른 통로는 구체적 정책 입안과 집행을 막후에서 조종하기 위한 협의체 구성이다.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가 바로 그것이다. 통감 관사에서 이토가 주재하는 이 협의회에는 한국정부의 내각 전원과 필요에 따라 일본인 재정고문 및 통감부 고위관리들이 참석했다.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신속하게 이 협의회를 가동했다. 2일 서울에 도착하여 9일 ‘알현’을 통해 고종에게 시정방침을 통지하고, 13일 협의회를 열고 전반적인 시정개혁을 논의했다는 것은 이토가 한국통치를 위해 얼마나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구상했나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종을 알현한 직후인 9월 13일 개최된 1차 협의회에서 이토는 먼저 고종에게 제시한 시정개선의 방향을 대신들에게 설명하고 황제도 이에 동의했다는 뜻을 전했다. 또한 앞으로 모든 국정에 관한 논의는 ‘협의회’가 담당한다는 것도 밝혔다. 그리고 협의회가 역점을 두어야 할 시정개선으로서 농업개량, 교육제도 개선, 금융기관 확장, 경찰의 쇄신, 도로, 수도, 및 배수공사, 관개 및 식목 등을 제시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차관도입과 경찰력 증강에 관하여 논의했다.
통감 부임후 한복을 입고 사진 찍은 이토. 왼쪽부터 이토의 딸, 내무대신 이지용과 그의 처, 이토 히로부미와 처,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박의병과 처. 통치자금 1천만엔 조달...한국 대신들 놀라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시정개선에 필요한 기업(起業)자금으로 일천만 엔을 조달했다. 그는 한국정부의 재정고문으로 있는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대신들에게 설명할 것을 지시했다. 메가다의 보고에 의하면 이토는 한국의 관세수입을 담보로 일본흥업은행(日本興業銀行)으로부터 일천만 엔의 차관을 성사시키고, “오백만 엔은 3월중 일시에 입수가 확실”하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다. 모든 대신들은 신속한 자금조달에 놀라면서 동의했다.이토는 우선적으로 실행해야 할 사업의 내용과 예상되는 비용을 검토할 것을 메가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이지용(李址鎔) 내무대신에게 경찰력 증강에 관한 문제를 검토하여 다음 협의회에서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끝으로 모든 대신들에게 다시 한 번 그들의 신분을 보장하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국가를 위하여 진력할 것인가, 그리고 생명을 건다면 어떤 일이라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각오”로 업무에 임해줄 것을 당부했다.
國魂 없는 대신들 "일신 배려에 감사"...이토의 신하로 전락
이에 박재순(朴齋純) 참정대신은 “대단히 유익한 협의회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하여 깊이 감사”했다. 또한 법무대신 이하영(李夏榮)은 “사람의 앞날을 미리 예측할 할 수는 없지만 대신들은 일치하여 열심히 업무에 임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우리들의 일신을 이처럼 염려해 주시는 (통감의) 뜻에 각 대신을 대표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했다. 한국의 대신들은 이미 국혼(國魂)을 상실했고, 고종의 신하가 아니라, 이토의 신하였다.실질적으로 내정을 운영한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는 1906년 3월 13일에 시작해서 한국의 병탄이 완성되는 1909년 12월 28일까지 97회 계속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협의회를 77회 주재하면서 그가 구상하고 있는 모든 정책의 결정과 집행을 이 기구를 통해서 실행했다.
메이지의 관료 제도를 확립하고 네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하면서 내각을 이끌었던 이토의 ‘협의회’운영은 탁상공론에 치우쳤던 한국정부의 내각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제1차 협의회에서 지시받은 메가다는 21일에 열린 2차 회의에서 교육, 수도공사, 도로공사, 농공업은행보조 등을 시급하게 시정해야 할 분야로 선정하고, 이에 필요한 예산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설명했다. 중요한 정책을 제시하고, 논의하고, 결정하여 집행을 지시하고, 그리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근대적 행정기법은 능률적이고 효과적이었다. 협의회가 거듭할수록 한국의 내정은 통감부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통감부 직원은 75명뿐...대한제국을 한손으로 요리하다
이 협의체를 구성한 이토의 의도는 일본의 뜻대로 정책을 추진해 나가지만, 모든 정책은 한국 내각의 승인을 거쳐서 결정되고, 그리고 한국 정부에 의해서 집행하는 모양새를 가추기 위함이었다. 실질적인 정책의 입안과 집행의 방향은 통감부 내의 총무부, 농상공부, 경무국에서 정하고, 이를 협의회에서 승인을 거처 한국 내각이 집행하는 형태를 갖추었을 뿐이다.
일본정부가 확정한 관제(官制)에 의하면 통감부의 인원은 위로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에서 말단의 경비원을 포함하여 모두 75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메이지 국가를 건설한 행정능력과 통치경험은, 아직도 구습에 젖어있는 대한제국을 요리하기에 충분했다. 이토는 이 ‘협의회’를 통해서 병탄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하나씩 만들어 나가면서 지배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실질적 점진주의’의 실천이었다.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가지고 온 세 번째 구상은 한국내의 친일세력을 배양하고 집단화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이토는 대륙낭인의 대표적 인물로 고쿠류카이(黑龍會)를 이끌고 있는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대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