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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비빔밥을 먹게 하려면 서울올림픽 主題歌 '손에 손잡고'의 성공사례를 배우라!
한국인이 국제화에 가장 크게 성공한 것은 88 서울올림픽이다.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한국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국제적 관점에서, 그리고 세계적 수준에서 생각하고 준비하고 시행하고 평가받았다. 역대 올림픽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 된 것은 이를 준비한 사람들의 개방적인, 국제적인 감각과 안목 덕분이다. 특히 朴世直 조직위원장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가 대히트할 수 있었던 것도, 국내적 시각과 어슬픈 민족주의적 고집을 버린 덕분이다.
인기가 떨어지는 한국음식을 세계화하려고 하는 이들은 박세직의 성공사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음식에 정통한 한 일본기자가 '비빔밥'을 비판하였다고 지도층의 한국인들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면 외국인이 과연 한국 음식을 먹어주겠는가? 음식점 주인이 손님으로부터 지적을 당하면 "앞으로 더 잘 만들겠습니다"라는 모습을 보여야지 "싫으면 먹지 마!"라고 화를 낸다면 누가 그 음식점을 다시 찾겠는가?
비빔밥을 국제화하려는 이들은 박세직 회장이 어떻게 하여 '손에 손 잡고'를 세계적 히트곡으로 만들었는지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故 박세직 위원장의 회고록('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 고려원)에서 관련 부분을 발췌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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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화 시대의 상술
최근 어느 기업체 간부를 만났더니 三星(삼성)그룹의 사원 연수교육에서 서울올림픽 주제가(Hand in Hand)의 사례 연구 발표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국제화 시대의 상술’이란 측면에서 성공 사례로 소개, 분석되었다는 것이다. 그 며칠 뒤 럭키금성그룹의 사보(1990.3)에서도 비슷한 관점에서 ‘손에 손잡고’가 소개돼 있는 것을 보았다.
< 박세직 조직위원장은 국제적인 관점에서 노래를 제작하는 방향으로 추진했다. 세계적인 이탈리아인 작곡가 모로데, 세계적인 미국인 작사가 휘트록에게 일을 맡기고, 노래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한국인 보컬그룹 코리아나, 판매 및 제작은 세계 최대의 다국적 음반회사 폴리그램에게 의뢰하였으며, 이들 요소를 통합, 조정한 것은 조직위였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자원들을 잘 조합시켜 세계적인 유행가를 만든 것이다.이 사례는 국제화 시대를 맞은 한국의 기업도 참고할 만한 것이 아닐까 한다. 주제가를 만들 때 만약 개-폐회식 때처럼 민족적 입장에서 접근했더라면 실패하였을 것이다. 주제가를 듣게 되는 사람은 세계 각국의 각양각색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한국식 노래를 강요하다시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줄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연히 국제적인 시각에 서서 보편적인 감각의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개-폐회식의 경우는, 고객, 즉 세계의 시청자들을 이미 확보해 놓은 상태였으므로 우리 것을 일방적으로 보여 줄 수 있었다. 민족적 관점에서 특수한 이미지를 자신있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얘기다. 사는 사람의 시장(buyer's market)에서는 국제성을, 파는 사람의 시장(seller's market)에서는 지역성을 부각시킨 것이 서울 올림픽 商術의 성공요인이었다>
이 노래를 통해 세계적인 보컬그룹으로 자리를 굳힌 코리아나는 그들이 살고 있는 스위스 취리히에서도 명사가 돼 있다. 이민이 거의 불가능한 나라인데도 스위스 정부에서는 그들에게 국적 취득을 종용하고 있다고 한다.
코리아나가 1989년 말 공연차 동독으로 갈 때 체코의 프라하 공항을 경유하였다. 몇 시간 여유가 있어 체코를 구경하려고 비자를 신청했더니 공항 관리는 상대가 코리아나임을 알아보고는 즉석에서 관광비자 도장을 찍어주더란다. 프라하 시내에서 택시를 탔더니 운전사가 또 코리아나를 알아보고는 ‘나는 김일성 배지를 단 코리언은 싫다’고 북한을 비판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손에 손잡고’를 어린이들이 특히 좋아한다. 이 노래는 스포츠 행사, 미스월드대회 같은 연예행사, 졸업식, 망년회, 텔레비전 스포츠 프로의 시그널 뮤직 또는 교회에서 복음 성가로 불리기도 하는 등 그 용도가 넓다. 이것은 ‘손에 손잡고’가 화합과 전진과 갈등의 극복 등을 상징하며, 요즈음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의 대세와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 4월 체코의 무용단이 평양에서 김일성 생일 축하 공연을 할 때 배경음악으로 ‘손에 손잡고’가 나왔고, 김일성이 박수를 쳤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핸드 인 핸드를 차라리 영구적인 올림픽 노래로 하는 것이 어떠냐’는 이야기까지 한 바 있다고 한다.
‘손에 손잡고’가 세계에서 가장 적게 팔린 나라 축에 드는 것이 한국이라고 한다. 서울올림픽이 가장 빨리 잊혀지고 가장 낮게 평가된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과도 통하는 현상이라 하겠다. 어쨌든 서울올림픽이 낳은 ‘손에 손잡고’는 화합과 전진의 메시지를 세계로 확산시키는 평화와 자유의 주제가 역할을 하면서 공산권의 개방을 유도하는 분위기 조성에 일조를 하고 있다.
코리아나 단원 이용규 씨는 이 노래의 작곡가 모로데 씨가 ‘브레킹 다운 더 월’을 너무 강하게 발음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고, ‘손에 손잡고’를 강조하라고 하더라면서 ‘이 노래를 부르면 우리가 먼저 가슴속에서 불길이 치미는 듯한 감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코리아나는 미 8군 상대의 쇼 경험이 많은 데다 주로 해외 공연을 해왔기 때문에 영어 발음이 정확하여 ‘손에 손잡고’의 가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
단원 모두가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일 뿐 아니라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 뭉쳐 깨끗하고 화합된 분위기를 견지함으로써 이런 노래의 歌唱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다.모로데 씨는 작곡의 영감을 얻기 위해 1987년 서울에 와서는 새벽에 남산에 올라가 어둠속에 치솟는 해를 한참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는 무릎을 탁 치면서 이제 감을 잡았다고 했는데, 그 감이 바로 이 노래의 박력있는 도입부에서 나타났다.
‘손에 손잡고’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만 알려져 있던 한국의 이미지를 발랄, 박력, 신선, 건강한 현대적 한국의 이미지로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민족주의적 시각의 한계
이 노래를 탄생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좋은 것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의 구체적 입증으로서 이 노래를 예로 들고 싶다. 잔치가 잘 되려면 소문이 나야 한다. 잔치 소문을 내는 데는 노래만한 것이 없다. 특히 올림픽에서 노래가 중요한 것은 개막 전의 홍보, 대회 기간 중의 분위기 조성, 대회 후의 추억을 위해서이다. 좋은 영화 주제가는 영화 자체보다도 더 유명해지듯 좋은 올림픽 주제가는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되는 것이다.
1986년 봄에 조직위원장이 되고 나서 올림픽 주제가의 추진 상황을 점검해 보았더니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86아시아경기대회가 주제가 없이 치러져 좀 메마른 느낌을 주었기에 나는 서울올림픽에 어울리는 세계적인 히트송을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의뢰한 국내 모 방송기관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국내에서 주제가를 만들어 우리 힘으로 이 노래를 세계에 보급하는 데는 약 26억 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나는 지구촌의 축제인 올림픽 주제가를 국내적인 시야에서만 봐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국내 작곡가에 너무 의존하다가는 돈은 돈대로 들고, 유행에는 실패하지나 않을까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먼저 조직위 자체 홍보위원회에 부쳐 이와 같은 문제점을 검토하고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여 그 대책을 강구토록 했다. 역시 조직위 간부들도 동감이었다. 나는 세계의 레코드 회사를 상대로 주제가 제작 문제를 협의하도록 한 뒤, 국내 음악인들의 의견을 듣고 이 문제를 다각도로 상의하기 시작했다.1987년 3월23일에는 조직위에 이봉조, 김강섭, 김희갑, 이백천, 길옥윤, 최창권 씨를 초청했다. 먼저 한국을 포함한 세계를 상대로 주제가를 공모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한국인 음악가도 물론 참여할 수 있고, 같은 조건이라면 한국인 작사, 작곡가의 노래를 채용하겠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는 별다른 반론이 없었으나, 개-폐회식 상임전문위원회에서는 거센 반대가 있었다. 평소에 열성적으로 좋은 아이디어를 내주었던 몇몇 교수가 반론을 펴 내 마음도 흔들리는 것이었다.
외국인이 작사, 작곡한 영어 가사의 노래가 나오면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해 주게 되고, 한국 음악인들을 소외시켰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학생들이 반대한다면 어떻게든 이들을 설득시키고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하면 될 것이다. 서울올림픽은 한국인만의 축제가 아니라 세계인의 축제이다. 축제에서는 손님 위주로 생각해야 한다. 손님이 즐겨 듣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중요한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나는 국제적인 주제가를 만들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의 레코드 회사를 상대로 의사를 타진해 본 결과 세 회사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
서독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의 레코드 판매 다국적 회사인 폴리그램 레코드, 미국의 광고대행사인 B/M사, 일본의 덴스(電通) 가운데서 폴리그램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폴리그램의 제의 내용이 합리적인 데다가 한국의 보컬그룹 코리아나가 전속돼 있었던 것이 높게 평가되었다.
*동양인 노래로서는 사상 최대의 판매고
작곡가, 작사가는 조직위와 폴리그램이 협의하여 결정하기로 계약하였었다. 조직위는 국내 대중 음악가들의 자문을 받아 ‘위 아 더 월드’의 작곡가 퀸 존즈, 로스앤젤레스 주제가 ‘리치 아웃’의 작곡가 조지 모로데, 영국의 필 콜린즈 등 3명을 추천하였다. 폴리그램에서는 작곡에 모로데, 작사가로는 토머스 R 휘트록을 추천하였다.모로데 씨는 우리나라에서 상영된 적이 있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플래시 댄스’, ‘톱 건’의 주제가로서 세 차례나 오스카 영화음악상을 받았고, 그래미상 수상 경력도 있는 세계적 작곡가이다. 모로데 씨는 작사가로서 ‘톱 건’의 주제곡 작사가인 토머스 R 휘트록 씨를 추천했다. 모로데 씨는 이상한 제안을 덧붙였다. 자신이 갖고 있는 스포츠카를 주경기장의 연주단석까지 타고 들어와 차에서 내려 올림픽 주제가를 지휘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조직위는 모로데 작곡, 휘트록 작사에 동의하였는데 가사에 한국적인 이미지를 많이 넣도록 요구하였다. 1987년 10월에 시제품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세 차례에 걸쳐 조직위 개-폐회식 상임위원과 국내 음악가들의 검토 및 수정 요구를 폴리그램사가 수용하도록 하였다. ‘아리랑’을 가사에 꼭 넣도록 했고, 서울올림픽의 목표인 ‘화합과 전진’, 그리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이미지를 가사에 반영하도록 하였다. 한국어 가사와 영어 가사를 같이 사용하도록 하였다.한국어 가사는 단순한 번역이 아니고 개-폐회식 상임위원인 서울대 김문환 교수가 原文에 충실하면서도 창작성을 살려 깔끔하게 다듬었다.
나는 폴리그램사의 오시 드레히슬러 사장에게 올림픽 주제곡으로는 너무 템포가 늦다는 견해를 밝혔다. 드레히슬러 사장은 ‘유행이 오래 가려면 느린 노래여야 한다’고 했다. 나는 또 빨리 유행시켜 올림픽 홍보에도 이용하자고 했으나, 드레히슬러 사장은 유행의 절정기를 올림픽 기간과 일치시키려면 두 달 전에 발매해야 한다고 했다. 세계 최대의 음반 판매회사 책임자답게 확실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조직위는 1988년 6월21일에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내외신기자를 초청, ‘손에 손잡고’ 발표회를 가졌다. 그때 국내에서는 조용필 씨가 부른 ‘서울 서울 서울’과 김연자 씨의 ‘아침의 나라에서’가 유행하고 있었다.‘아침의 나라에서’는 문화방송이 올림픽 홍보를 위해 자체적으로 채택한 길옥윤 작곡, 박건호 작사의 노래였다. 이것이 서울올림픽 공식 노래인 것처럼 오해돼 조직위는 해명에 바쁘기도 하였다.
막상 ‘손에 손잡고’가 퍼져 나가자 국내 가수들을 개-폐회식에 참석시키라는 부탁이 여러 차례 왔다. 그래서 나는 세 번에 걸친 개-폐회식 시연회에 패티 김, 김연자, 조용필 씨를 참여시켜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토록 했다.‘손에 손잡고’는 스웨덴, 서독, 일본 등 17개 국에서 인기 1위를 기록했고, 30여 개국에서는 10위권 내로 진출하는 등 가장 유명한 올림픽 주제곡이 되었다.
음반, 카세트, 디스크 형대로 100만 장 이상 팔리면 개당 5센트의 로열티를 우리가 받도록 계약돼 있는데, 계약기간 만료일인 1988년 12월 말 현재 단독판은 해외 120만장, 국내 20만장, 다른 노래와 함께 실린 복합판(로열티 비적용)은 500만 장 이상이 팔려 우리는 여기에 상응하는 로열티를 받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한 푼의 비용도 들이지 않고 오히려 돈을 받고 서울올림픽과 우리나라를 홍보한 셈이다.
우리가 국내적 시각에만 집착했더라면 수십억 원의 추진비를 쓰고도 노래는 유행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 아쉬웠던 점은 ‘손에 손잡고’로써 폐회식을 끝맺음하지 못한 것이다.
*동구권의 데모 노래가 된 ‘손에 손잡고’
1989년 12월에 일시 귀국했던 보컬그룹 코리아나를 만났더니 그들도 비슷한 소감을 털어 놓았다.서울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로 세계적인 보컬그룹이 된 코리아나(단장 김영일, 단원 이승규 이용규 이애숙 홍화자)는 1989년 12월11~13일 동독의 동베를린에서 무너진 장벽을 배경으로 ‘손에 손잡고’를 열창한 뒤 국내 공연을 위해 임시 귀국한 터였다.
이들과 만나 이야기하면서 나는 ‘손에 손잡고’가 공산권 민주화 현장의 주제가로 변해 있음을 알고 흐뭇하였다. 東獨의 재야 민주 단체에서는 손에 손잡은 모습을 상징물로 쓰고 ‘손에 손잡고’를 시위대의 데모송으로 부르고 있더라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에서는 ‘손에 손잡고’가 하루에 5000장 씩 팔릴 만큼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베를린 장벽 현장에서의 공연을 위해 마이클 잭슨, 믹 재거 등 세계적인 가수들이 동독에 신청서를 냈으나 코리아나가 동독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에 의해 맨 먼저 초청돼 두 번 공연을 했다.
1989년 12월12일 오후, 비 내리는 베를린 장벽에서의 공연 때는 수백 명의 동독인들이 구경을 하다가 말고 합세, 감동적인 합창을 했고, 마침 비둘기 떼가 날아오르더니 머리 위를 한동안 배회하여 극적인 효과를 더해 주었다고 한다. 코리아나가 동독에서 환영을 받은 것은 ‘손에 손잡고’의 가사가 민주화의 분위기에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손에 손잡고(HAND IN HAND)’, ‘벽을 넘어서(BREAKING DOWN THE WALL)’는 이 노래의 가사 중 핵심이 되는 대목이다. 민중의 힘으로 독재 권력과 분단의 장벽을 허물어 간 1989년 동구권의 민주화 과정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1989년 가을부터 ‘손에 손잡고’가 유럽에서 다시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잡고’가 들어 있는 레코드, 테이프, 디스크는 1988년에 발매된 이래 지금까지 약 900만 장이 팔려 같은 기간 중 세계 제1위였다고 한다. 김영일 단장에 따르면 동양 사람이 부른 노래가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은 처음이며, 역대 올림픽 관련 노래 중에도 최고의 히트라는 것이다.
도쿄올림픽을 전후하여 세계적인 히트를 한 ‘위를 향해 걷자(일명 스키야키)’도 ‘손에 손잡고’의 성공에 비교할 바 못되고, 같은 작곡가 모로데 씨가 작곡한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주제가 ‘리치 아웃’도 상대가 안 된다고 했다.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보다도 더 팔렸다고 한다.‘손에 손잡고’는 소련, 중공, 헝가리, 유고에서 판매량 1위를 기록하기도 했었다. 천안문 시위 때는 시위 군중이 이 노래를 데모송으로 애창했고, 고르바초프도 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독 정부에서는 민주화 이전에 이 노래를 사실상의 금지 가요로 취급했었다. ‘손에 손잡고’를 제작 판매한 세계 최대의 레코드 회사 폴리그램은 동독 정부로부터 가사 중 ‘BREAKING DOWN THE WALL’을 바꾸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이것은 창조적 파괴를 뜻한다’면서 거절하여 동독에서의 시판은 불가능해졌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도 이 가사를 사전 심의할 때 이 부분이 문제가 돼 그 의미를 놓고 논란을 벌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분단 국가 수도에서 열린 올림픽에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이념을 초월하여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과 개방화 시대의 도래를 극적으로 상징하였고 그런 분위기를 세계로 확산시켰으며, 그런 분위기이 도움 속에서 1989년 동구 혁명이 일어났다는 얘기는 결코 牽强附會(견강부회)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