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언한 베스트셀러《일본내막기》

      1938년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찌 독일의 히틀러가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1939년 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다.  
      전쟁을 예감한 이승만은 1939년 4월에 활동 무대를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옮겼다.
    워싱턴에서 이승만 부부는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바트 스트리트의 국립 동물원이 바라다보이는 붉은 2층 벽돌집에 정착했다. 

       그는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의 글을 써서 저명한 기자인 에드윈 힐을 통해 여러 신문에 싣게 했다. 

       1941년 6월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일본에 대항한 한국인들의 투쟁상황을 설명하고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국무부를 통해 거절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 동안 이승만은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1941년 여름 뉴욕에서 출간했다. 그 책에서 그는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역사적으로 밝히고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하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 
       그런지 몇 달 안 되어 그의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12월 7일 일본 항공 모함의 함재기들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한 것이다. 그에 따라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 1941년초 뉴욕의 출판사 프래밍 H. 레벨사에서 간행된 이승만의 영문저서『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표지.
    ▲ 1941년초 뉴욕의 출판사 프래밍 H. 레벨사에서 간행된 이승만의 영문저서『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표지.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외교 활동

       제2차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김구의 임시정부와 이승만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독일의 폴란드 공격이 있기 직전인 1939년 8월에 김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모두 국제 정세에  대해 무지몽매함을 개탄했다. 
       중국이 일본에 대항해 아무리 피를 흘리며 싸운다 할지라도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미국 국민의 동정을 얻기 위한 대대적인 선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장개석에게 알려 주라는 내용이었다. 

  • ▲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및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발급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 그리고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한다는 사령장.
    ▲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및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발급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 그리고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한다는 사령장.


       마침내 1941년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이승만이 오래 전부터 예상해 왔던 미-일 전쟁이 일어났다. 그에 따라 한국 독립의 가능성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임시정부의 외교부장 조소앙은 이승만을 주미외교부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워싱톤의 이승만은 그 자격을 가지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망명객의 신분으로 미국 관리들을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승만은  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로비스트로 고용하였다.
    이승만, 일본에 선전포고..미국에 "무기 공급해달라"

       로비의 목표는 상해임시정부를 미국 정부가 승인하고, 무기대여법에 따라 무기를 공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한국군을 일본과의 전쟁에서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패망 뒤에 소련의 한 반도 점령과 공산화를 막는 데도 활용함으로써 이중의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게 된 데는 이승만에 맞서 미국 국무부와 정보기관을 드나들었던 한길수의 방해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원인은 알저 히스와 같은 미국 국무부 안의 친소적이고 친공적인 관리들의 책략 때문이었다. 그들은 국제 문제를 소련과의 협의를 통해  처리하려는 좌우합작(左右合作)의 기본 노선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반소주의자인 이승만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장관에게 연락하여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국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보내오내록 했다. 그리고 그것을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스탠리 혼벡 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아직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혼벡은 그것을 정부 문서가 아닌 개인 의견서로만 받았다.
       이승만은 다시 중경 임시정부에게 요청하여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미 국무부에 대해서는 무기대여법(武器貸與法)을 임시정부에도 적용하여 군사원조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무부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 ▲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이사한 이승만 부부.
    ▲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이사한 이승만 부부.

    국무부의 실세로 공산주의자인 알저 히스를 만나다
     
       이승만은 미국 설득의 방향을 국회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그의 후원자인 존 스태거스 변호사와 제이 제롬 윌리엄스 기자와 함께 질레트 상원의원을 찾아가서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국무부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 국무부가 임시정부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방침임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은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확인은 진주만 기습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채 안되는 1942년 1월 2일에 미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다.

  • ▲ 1936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무성의 고문이었고 국제연합 창립총회 당시(1945) 임시 사무총장이었던 알저 히스(Alger Hiss). 1950년 그는 소련 간첩혐의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1936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무성의 고문이었고 국제연합 창립총회 당시(1945) 임시 사무총장이었던 알저 히스(Alger Hiss). 1950년 그는 소련 간첩혐의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알저 히스는 국무부의 실세로 나중에 얄타 회담이나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를 조직하는 등 사실상 국무부의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따라서 국무부 안에는 그의 심복들이 많았다.
       만남의 자리에는 스탠리 혼벡 박사가 같이했다. 이승만은 평소의 주장대로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무기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렇게 하면 미국은 이중의 이득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즉, 미국은 일본과 전쟁하는 데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항복한 다음에는 한 반도로 밀고 들어올 소련군을 막는 데도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이승만의 주장에 알저 히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의 동맹국으로 나찌 독일과 싸우고 있는 소련을 비난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화를 냈다.
       한반도는 소련의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이므로 소련과 아무런 협의도 거치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했다. 

    소련 간첩 알저 히스, 이승만은 까맣게 몰랐다

       그 당시는 아무도 몰랐지만, 알저 히스는 소련 간첩이었다.  그 사실은 나중에 소련 제국이 무너지고 난 뒤인 1994년에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체를 알 리 없었던 이승만은 단지 경험없는 젊은 미국인에게 한국인들의 운명이 걸려 있는 현실을 서글퍼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용기를 잃지 않고 알저 히스의 상관인 코델 헐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자 헐 국무장관은 한국인들은 독립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서한을 보내왔다.
       이승만은 감격했다. 그래서 그는 힘들게 긴 보고서를 만들어 보냈다. 그런 다음에는 아무 회답이 없었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