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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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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운명적인 만남보푸라기가 생긴 수입원단을 전부 교환하는 것으로 물류창고에서의 일이 일단락됐다.
그래서 현우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편의점에 도착했다. 문제는 약속시간까지 무려 한 시간 반 가까이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현우는 먼저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사서 마셨다. 하지만 흐른 시간은 고작 십분 남짓이었다. 현우는 시간을 보낼 마땅한 곳을 또다시 찾아야 했다.
그때 현우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정원이 보여준 지수 관련 파일이었다.
거기에 지수의 특기가 리듬체조로 적혀 있었다. 현우는 물어물어 음악사를 찾았다. 음악사에는 파스텔톤이 만들어내는 온화한 분위기의 잔잔한 클래식이 흘렀다.
“손님, 뭐 특별히 찾으시는 곡이라도 있으세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리듬체조나 발레곡으로 추천해주실 만한 곡이 있나 해서요?”
“리듬체조나 발레곡요?”
“예.”
“그럼 당연히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곡이죠. 이 CD 한 장에 <작품번호 20번 백조의 호수>부터 <작품번호 71번 호두까기 인형>, <작품번호 66번 잠자는 공주>, 그리고 왈츠로 된 <작품번호 48번 현을 위한 세레나데 C장조>까지 모두 수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격이 좀 비싼 게 흠이지만요. 그러나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감상하시기엔 이보다 더 좋은 CD는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럼 다른 것은요?”
“다른 거라면, 아 예, 여기 있네요. 러시아의 5대 거장 중 한 명인 림스키 코르사코프(Nikolai Andreevich Rimski Korsakov)의 발레곡 <세헤라자데(Scheherazade)>는 어떠세요?”
“<세헤라자데>! 예전에 김연아 선수가 연기하던 곡 아닌가요?”
“맞습니다. 김 선수는 이 중 1·2·4악장이 1막으로 구성된 중요한 부분만을 골라 프로그램에 맞게 편집해 사용했습니다.”
“…….”
“참고로 <세헤라자데>는 총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세 살 때 천일야화의 모험과 로맨스를 모티브로 해서 작곡한 곡입니다. 제1악장은 <바다와 신바드의 배>, 제2악장은 <칼랜더 왕자의 이야기>, 제3악장은 <젊은 왕자와 공주>,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4악장은 <바그다드의 축제-바다-난파-결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섬세한 관현악이 압권인 이 곡은 음악사를 통틀어도 결코 흔치 않은 명곡입니다.”
현우는 주저 없이 <세헤라자데>를 계산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점원의 설명대로 모험과 로맨스를 모티브로 했다는 설명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현우는 순간 자신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하더니 자신이 꼭 그랬다. 하지만 누군가를 무조건 좋아할 수 있는 순수함이 아직 자신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설다.
현우는 약속장소로 가는 동안 음악사에서 들은 <세헤라자데>를 대충 흥얼거렸다. 정원과의 약속시간은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때 길 건너편에서 심심한 현우의 시선을 무언가가 확 끌어당겼다. 외형이 진돗개와 흡사해 보이는 하얀 개였다. 개는 대충 봐도 몸무게가 족히 30kg쯤은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개는 목줄이 풀린 채로 우이동주민센터 앞길을 내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개는 횡단보도 앞에 서자 갑자기 커다란 두 눈을 깜박거리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서 다쳤는지 앞쪽 오른발을 심하게 절었다. 그나마 서 있을 때는 그 부자연스러움이 덜했지만 움직이면 표시가 확연했다. 바로 그때 신호등이 바뀌었다.
“달래야, 위험해. 거기 서! 아직 오면 안 돼!”
“!”
순간 현우의 근처에서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20대 후반 정도로 앞에 바구니가 달린 예쁜 흰색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녀는 개가 뛰어오는 것을 보자 곧바로 자전거에서 뛰어내렸다. 개가 차선 하나를 지났을 무렵에는 뒤에 실려 있던 작은 화분들이 종이박스에서 쏟아져 보도블록 위에서 흩어졌다.
그런데 그때 국립묘지삼거리 쪽에서 우회전을 받은 1톤 트럭이 덕성여대 쪽으로 곧장 달려왔다. 그녀는 자신이 민트 색상의 플레어롱스커트를 입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개를 향해 무작정 내달렸다. 여인을 발견한 개는 다행히 횡단보도를 안전하게 건너와 그녀의 품에 덥석 안겼다. 순간 그 큰 덩치의 힘에 밀려 그녀가 그만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횡단보도에 갇힌 여인과 개는 트럭과 거의 6〜7m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트럭은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제 현우가 그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리고 그녀 바로 앞에서 들고 있던 CD를 트럭의 전면 유리창을 향해 똑바로 던졌다. CD는 부메랑처럼 회전을 하며 정확히 날아갔다. 곧이어 트럭의 전면 유리창이 어린 아기들의 퍼즐북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현우와의 거리는 채 1m도 되지 않은 지점이었다.
“히~유! 아가씨, 괜찮으세요?”
“예, 괜찮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달래야, 너도 놀랐지?”
“멍! 멍! 멍!”
“그래서 언니가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도로는 너무 위험하다고.”
“멍! 멍! 멍!”
“그런데 목줄은 또 어떻게 풀었니? 아무튼 다친 데가 없어 정말 다행이다. 히~유!”
“저, 정말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하루 종일 운전을 하다 보니 그만 제가 깜박 졸았나 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삐쩍 마른 트럭 운전사는 죄인처럼 연신 허리를 굽혀 사죄했다. 그런데 운전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모습 곳곳에는 힘겨운 삶의 애환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더구나 운전사가 고개를 들었을 때 현우는 깜짝 놀랐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본 운전사의 눈은 녹내장이 끼었는지 짙은 초록색을 띠었다. 그리고 오래전 구안괘사(口眼斜)에 걸린 입은 봉산탈춤의 양반춤 과장에 등장하는 무지와 허세의 상징인 양반처럼 삐뚤어져 있었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세상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문인지 운전사의 발음도 많이 어눌했다. 심지어 말하는 도중에도 입꼬리에서 침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저, 아가씨. 병원이라도…….”
“달래도 괜찮고 저도 특별히 다친 덴 없어요. 차에 부딪친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저 때문에…….”
“아니, 정말 괜찮아요. 보세요. 아무렇지도 않죠?”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아무튼 고맙습니다.”
“대신 아저씨.”
“예!”
“저하고 약속 하나 해주세요.”
“무슨 약속을…….”
“피곤하시면 무리하게 운전하지 않고 중간 중간 쉬시겠다고요.”
“아, 예. 꼭 그러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약속을 한 운전사는 불쑥 허름한 바지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그리곤 여인의 하얀 손에 그것을 쥐어주었다.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이었다. 돈을 건네는 운전사의 눈엔 안도하는 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여인은 운전사에게 받은 돈을 다시 돌려주었다. 운전사는 트럭에 올라서도 몇 차례나 머리가 핸들에 닿도록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리곤 천천히 다시 가던 길을 갔다. 현우는 그 뒷모습에서 가장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가씨, 정말 괜찮으세요?”
“예, 그런데 뒤로 넘어져서 그런가 약간 어지러운 게…….”
트럭은 이미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현우는 어쩔 수 없이 의식을 잃은 그녀를 업고 근처의 가정의학과를 찾았다. 원무과 여직원이 사무적인 어투로 먼저 접수를 해야 한다고 접수증을 내밀었다. 접수증에는 이름·주소·전화번호를 기재하는 난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현우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우선 자기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처음 본 개가 현우의 지시대로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얌전히 있는 것이었다. 마치 자기 때문에 주인이 다쳤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저 환자의 보호자 되시죠?”
“아, 예.”
여인을 진찰한 담당의사는 혈액검사와 CT상 특별한 소견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설명을 듣던 현우는 책상 위에 펼쳐진 의사의 진료차트에서 아주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혈액형은 희귀 혈액형인 RH-B형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신을 차린 후 고쳐 쓴 이름란에 분명 ‘윤지수’라고 적혀 있었다. 정원이 소개시켜주기로 한 그 신비로운 여인이었다. 사실 현우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을 받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윤지수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수 씨. 따로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세요?”
“아니, 없어요. 이젠 어지러움도 사라졌어요. 그런데 혹시 선생님이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나요?”
“예. 너무 가벼워서 힘든 줄도 몰랐어요.”
“그럼 혹시 절 업고?”
“죄송합니다. 숙녀분께 허락도 받지 않고.”
“아니에요. 오늘 정말 너무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아까 횡단보도에서도 구해주시고, 또 여기까지. 아참! 내 정신 좀 봐. 병원비!”
“후후후.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일단 제가 계산을 했습니다.”
“정말 너무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지수 씨?”
“예.”
“혹시 운명 같은 거 믿으세요?”
“운명요?”
“사실 지금까지는 저도 믿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제부턴 믿어야겠어요.”
“왜죠?”
“아까 지수 씨가 검사받는 동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 있었거든요.”
“무슨 일인데요?”
“지수 씨 혈액형이 혹시?”
“RH-B형인데요. 왜 그러세요?”
“저희 어머니도 RH-B형이세요.”
“어머! 정말요?”
“그리고 더 놀랄 일도 있어요.”
“더 놀랄 일이라니요. 그게 뭔데요?”
“쉿! 그건 비밀입니다. 후후후.”
“아참! 정신이 없어 지금까지 선생님 성함도 안 여쭈어봤네요. 성함이?”
“그것도 비밀입니다.”
“피~! 뭐 그래요. 제 이름은 이미 아시면서.”
실제는 더 환상적이라던 정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거기다 함부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신비감마저 있었다. 심지어 웃을 때 입가에 고이는 향기로운 미소는 행복을 뿌리는 마법의 주문 같았다. 그런데 현우가 말하려던 진짜 비밀은 그런 지수가 순간순간 어머니의 이미지와 여러 층으로 겹쳐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지수는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과 사랑스런 연인의 모습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정말 청순하면서도 맑고 순수했다. 그래서 지수를 보노라면 구슬아이스크림처럼 입 안이 달콤하면서도 시원했다.
현우는 지수와 함께 걸어가는 내내 감미롭고 황홀했다.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도 지수의 나지막하게 솟아오른 볼은 분홍빛이 살짝 더해지면 신비로운 이미지로 변했다. 그렇게 지수가 가진 신비감의 구조를 파악하는 사이 어느덧 사고지점에 도착했다. 지수의 흰색 자전거는 누군가에 의해 가로수 옆에 똑바로 세워져 있었다. 달래는 자전거 주위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좋아했다. 현우는 지수와 헤어져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현우는 몇 걸음 걷지 않아 이내 멈췄다. 역시나 자전거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지수와 달래가 현우를 향해 밝게 웃고 있었다. 지수가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로는 한결 밝아보였다. 잠시 후 편의점에서 볼일을 마친 현우가 출입문 손잡이를 밀치며 밖으로 막 나오는 순간이었다.
“현우야, 여기야!”
“!”
“야! 두 사람이 정말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마침 너에게 소개시켜주기로 한 지수 씨를 여기서 우연히 만났지 뭐니.”
“그랬어?”
“…….”
“지수 씨, 전에 말씀 드렸던 제 친구 나현우입니다. 아주 착하게 생겼죠?”
“처음 뵙겠습니다. 나현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전, 윤지수라고 해요.”
“푸하하하.”
“풋! 호호호.”
“!”
그 순간 현우와 지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 하지만 정원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두 사람 사이에서 끈 풀린 연처럼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정원은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려는 듯 뒷목을 긁적였다. 곧이어 현우가 앞서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우연한 사고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정원조차 주저 없이 두 사람을 운명의 쇠사슬로 묶었다. 그리곤 현우보다 더욱 좋아했다. 아무튼 세 사람의 감정 아우라지에 다시 한 번 거센 너울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섞어 하나가 되게 하는 기분 좋은 어울림이었다.
“그런데 달래는요?”
“마침 화환제작 기사를 만나서 달래 좀 화원에 데려다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지수 씨?”
“왜요, 정원 씨?”
“아까 그…… 아, 아닙니다.”
“뭔데요?”
“다름이 아니고 그 화환제작 기사 말입니다. 인상이 왠지……, 너무 험악하게 생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좀 무섭지 않으세요?”
“아! 얼굴에 난 상처요. 시골에서 일을 하다 다쳤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피 씨 아저씨가 화환제작을 얼마나 잘하시는데요. 더구나 저희 가게 꽃배달도 그 아저씨가 도맡아 하세요. 확인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신원도 확실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전 그냥 단순히…….”
“훗! 저도 알아요. 정원 씨가 절 걱정해주시는 거.”
“정원아, 지수 씨 힘드시겠다. 우리 어디라도 들어가자.”
“응 그래! 그러자. 어디가 좋을까?”
“두 분, 아이스크림 어떠세요?”
“!”
“이 근처에 아주 맛있는 곳이 있는데 왜요, 싫으세요?”
“아, 아니요!”
지수를 따라 들어간 가게는 매장 내부의 인테리어 콘셉트가 레드(Red)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의자와 벽, 모든 집기류의 기본 색상이 빨강이었다. 빨강이 아닌 것은 아이스크림 냉장고 속의 내부공간뿐이었다. 세 사람이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먹이를 낚는 독수리처럼 점원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런데 막 나온 아이스크림을 먹으려는 순간 눈치 없는 정원의 휴대전화가 매미처럼 울었다. 정원은 전화를 끊자마자 머쓱한 표정으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왜? 급한 일이야?”
“응. 지금 바로 들어가야 해. 그럼,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정원 씨, 다음에 봐요.”
“예.”
밖으로 뛰어나간 정원은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을 벽에 걸린 큼지막한 아이스크림사진이 채웠다. 사진 속에서는 유독 입이 크고 치아가 하얀 흑인여성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맞닿은 곳엔 먹음직스러운 초코아이스크림이 금방이라도 쩍 갈라져 테이블에 떨어질 것처럼 와플에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가진 또 한 사람이 지금 현우를 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지수 씨, 저 카피 재미있지 않아요?”
“뭐가요?”
“저 사진 속의 ‘Made fresh daily’라는 글귀 말이에요.”
“저게 왜요?”
“꼭 오늘 지수 씨를 만난 제 느낌을 적어놓은 것 같아서요.”
“그럼 제가 아이스크림?”
“예. 그것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샹그릴라(Shangrila)아이스크림이죠. 너무 신비로워 차마 먹을 수가 없는 기적 같은 아이스크림 말이에요.”
“어머! 정말요?”
“적어도 제 눈엔 그래요.”
“현우 씨 정말 재미있으세요. 사실 처음엔 저도 소개팅을 할까 말까 무척 망설였거든요.”
“지금은 어때요?”
“소개팅에 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막 드는 거 있죠! 그런데 아까 트럭에 던지신 게 뭐였어요? 혹시 음악CD 아니었나요?”
“아! 그거요. 음악CD 맞습니다.”
“어쩌죠, 너무 죄송해서…….”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 음악CD가 원래의 주인을 찾아간 것뿐이니까요.”
“원래의 주인을 찾아가다니요?”
“사실 그 음악CD 지수 씨에게 선물하려고 산 것이거든요. <세헤라자데>라고.”
“아~! 그래요. 저도 그 발레곡 무척 좋아하거든요. 히~유. 아깝다.”
사람들은 흔히 시련을 함께 겪으면 거리감이 좁혀져 급속히 친해진다고 한다. 현우와 지수도 비록 만난 시간은 얼마 안 됐지만 정말 오랜 친구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아무튼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가게를 나와 나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도로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덕성여대 근처의 솔밭공원이 눈앞에 나타났다. 솔밭공원은 관리사무소 앞의 꽃수레부터 남달랐다. 더구나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숲은 장난꾸러기처럼 몰래 들어가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그런지 솔향기 가득한 산책길에는 일상의 찌든 때를 씻으러 나온 주민들로 가득했다.
“아! 좋다. 현우 씨, 좋죠?”
“예. 그런데 지수 씨는 저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세요?”
“왜요?”
“만나고 지금까지 저에 대해 물어본 것은 이름이 전부잖아요.”
“그래서 화나셨어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전 단지…….”
“사실 전 똑같은 질문에 대답할 게 없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질문을 안 드린 거예요. 현우 씨는 대답을 하는데 제가 안 하면 현우 씨만 손해잖아요. 아까 저처럼. 훗!”
“!”
현우는 지수와 대화를 하는 동안 자신이 탄 롤러코스터가 이제 막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수직으로 떨어져 시속 200km로 달리는 동안 이리저리 틀어지고 공중회전도 하며 갑자기 뒤틀림 구간을 만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지수와 함께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지수가 그 순간 눈가에 그늘을 드리웠다. 현우는 아마도 정원에게서 들은 지수의 가족사에 얽힌 아픔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전 어려서부터 어머님과 단둘이 살았어요. 아버지가 경찰이셨는데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어머니는 지금도 청주에서 미용실을 하세요.”
“청주요?”
“예, 청주 가보셨어요?”
“아니요, 그냥 언젠가 들은 기억이…….”
“가로수길이 참 유명하죠. 어머니는 저에게 아이스크림의 공기와 같은 분이세요.”
“아이스크림의 공기요?”
“아이스크림의 주재료는 아니지만 아이스크림을 부드럽게 만드는 일등공신이 바로 공기라고 하더라고요.”
“전 처음 들어요.”
“우유·크림·분유·설탕 등을 섞어 얼릴 때 조직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공기를 주입한답니다.”
“아, 그렇구나!”
“자식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렇듯 저희 어머니도 저에게 아주 특별한 분이십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현우 씨의 어머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일 것 같네요.”
“지수 씨의 부모님도 저희 부모님 못지않게 훌륭하신 분들 같은데요.”
“…….”
일상 속 대화는 사실 전문적인 지식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려는 목적보다는 사회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즉 대화란 소통을 위한 기회의 창이다. 하지만 현우는 바로 그 기회의 창을 닫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뒤이어 장마철의 개울물처럼 자신의 경솔함에 대한 질책이 머릿속을 온통 흙탕물로 뒤섞어놓았다. 하지만 지수는 그런 현우에게 오히려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밝게 웃어주었다. 그 맑은 웃음 한줄기는 현우의 마음에 가득하던 무겁고 눅눅한 습기를 단번에 말려버렸다. 아무튼 이후 현우는 더 이상 지수의 아픈 가족사를 건드리지 않으려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