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신선한 느낌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12> 신선한 느낌

현우는 오전 내내 피팅모델을 했다. 현우가 입었던 옷들 대부분은 디자이너의 기획의도대로 패턴사가 직접 만든 샘플이었다. 하지만 최종 승인을 받기 위한 생산업체의 완성본도 십여 벌 있었다. 그야말로 일 년 동안은 족히 입을 수 있는 옷을 현우는 오늘 하루에 다 입었다.
현우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이 흡사 인간바늘꽂이 같았다. 안경을 콧등에 걸친 디자인 실장은 골드 액세서리를 적절히 활용하여 중년여성 특유의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을 연출했다. 하지만 간혹 들고 있는 외국잡지와 느낌이 전혀 다르다며 심드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수 씨!”
“현우 씨, 오늘 저녁 바쁘세요?”
“아니요?”
“특별한 약속이 없으시면 퇴근하시고 저랑 같이 식사하실래요?”

지수의 살림집은 화원에서 오백여 미터 떨어진 야트막한 산 아래 작은 산속 마을에 있었다. 마을은 전원주택단지로 조성됐는데 집과 집 사이의 여유공간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야말로 파릇파릇하게 돋아난 잔디가 카펫처럼 깔린 작은 마당과 볕이 잘 드는 테라스가 딸린 아름다운 집이었다. 더욱이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청아한 새소리가 일상의 시름을 한순간에 잊게 했다. 집 바로 맞은편에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레고랜드 같은 놀이터도 있었다.

“어서 오세요.”
역시나 집 안에선 음식냄새가 솔향기처럼 은은하게 새어나왔다. 음식냄새는 너무 강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덤덤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현우가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집 안은 중형아파트 정도의 크기로 1층에는 방 두 개와 욕실 두 개가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 설치된 유선형의 계단으로 이어진 2층은 작은 방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느 가정집의 내부구조와 별반 다른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거실과 주방의 공간이 넓고, 1, 2층이 통층구조라서 청명한 날에는 거실로 별빛이 고스란히 쏟아져 들어온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돌로 만든 벽난로 바로 위에는 프랑스 화가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의 그 유명한 <무대 위의 무희(Dancer on Stage)>가 입체판넬 형태로 걸려 있었다. 발레리나는 아름답고 시적이었다.

“음.”
“현우 씨, 심심하죠?”
“아니요.”
“어쩌죠,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데.”
현우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지수에게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지수는 빈 공간을 활용할 목적으로 비스듬히 세워놓은 목제 와인랙 옆을 그림 속의 발레리나처럼 분주히 오갔다. 지수의 움직임은 가정이라는 전체 구도 속에서 화사하면서도 주방의 빛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문득 지수는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훨씬 더 예쁘고 순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우가 집에 도착하고 대략 반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비로소 식탁에 차림이 다 끝났다.

“와! 이건 보물이 가득한 숲 같아요. 음! 이 냄새. 빛깔까지도 환상적인데요.”
“맛은요?”
“맛도 그만이에요.”
“정말요? 뜨거운 밥 위에 설탕을 살짝 뿌리고 말린 과일을 잘라서 놓았어요. 그리고 그 위에 바닐라빈으로 마무리를 했고요.”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처음 먹어봐요. 너무 맛있으면 안 되는데.”
“왜요?”
“매일 오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요. 지수 씨가 싫어할 텐데요?”
“그럼, 매일 오면 되죠.”
“정말요?”
“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들꽃을 모티브로 한 로맨틱한 디자인의 그릇들. 식탁에는 화사함과 내추럴한 분위기가 조화롭게 연출되어 있었다. 현우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과 행복감을 느꼈다. 아니,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해준 지수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러다 문득 현우는 지수의 검은 동공에서 자신의 꿈을 보았다. 야릇하고 유쾌한 상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딘가에 영혼이 갇히고도 구속감이 아니라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현우는 그 소중한 느낌이 그저 신기하고 놀라웠다.

“오면서 보니까 2층 방이 햇볕도 잘 들고 전망도 참 좋을 것 같던데요. 지수 씨, 실례가 안 된다면 한 번 구경할 수 있을까요?”
“그건 좀…….”
“왜요, 곤란하세요?”
“조금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가 보여드릴게요. 하지만 오늘은…….”
“곤란하시면 안 보여줘도 괜찮아요.”
“실은 저 2층 방에 오마니가 쓰던 물건을 갖다 놓았거든요. 그래서 저도 잘 안 올라가요.”
“그렇다면 오히려 제가 보면 안 되겠군요. 뜬금없이 무례한 부탁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히~유! 시간이 흐른다고 세상의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옅어지는 것은 아닌가 봐요. 자고 나면 더 또렷해지기만 하니 말이에요.”

“아참! 지수 씨. 이거 받으세요.”
“어머, 이게 뭐예요. 저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지수 씨에게 잘 어울렸으면 좋겠습니다.”
“이거 귀걸이잖아요. 와! 너무 예쁘다. 어쩜, 이 색깔 좀 봐. 땅 속에서 막 꺼낸 호박(琥珀) 같아요. 저 지금 해봐도 되죠?”
“물론입니다!”
“제가 평소에 귀엽고 앙증맞은 유리로 된 공예작품들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백화점에 가서 아무리 찾아봐도 이런 고급스런 수제품의 주얼리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더라고요. 어때요. 저 예뻐요?”
“예, 무척.”
“그런데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저 좀 가르쳐줘요. 예?”
“정말요?”
“예.”
“부끄러운데…….”
“제발~요.”
“사실 그거 제가 만들었거든요.”
“예~에! 정말요?”
“아무튼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사실 전 무척 걱정했거든요. 후후후.”
“현우 씨는 정말 보면 볼수록 너무 재미있는 분이세요. 마법의 껍질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더 신기한 그 무언가가 나와요. 훗!”

지수의 행복바이러스에 감염된 현우는 흡족한 마음으로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흔들의자 옆에 서자 아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액자가 새삼스레 눈에 띄었다. 바로 지수와 달래의 행복한 시간이 <무대 위의 무희> 맞은편에 걸려 있었다. 다시 시선을 흔들림 없이 곧장 옆으로 가져가자 테라스의 원목바닥에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별빛만 소복했다. 거기다 빈 야외 나무테이블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지 자꾸만 현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때 지수가 테라스로 레드와인이 반쯤 담긴 백조모양의 와인 디캔터(Wine Decanter)와 볼의 크기가 적당한 잔 두 개, 그리고 토마토를 얇게 썰어 크림치즈를 얹고 그 위에 키위를 살짝 덮은 간단한 안주를 내왔다.

“현우 씨, 참 아름답죠?”
“그러게요. 오늘밤은 어제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것 같은데요.”
“훗! 맞아요. 그런데 현우 씨. 혹시 아세요?”
“뭘요?”
“현우 씨는 여자의 약한 마음을 흔드는 묘한 매력이 있어요.”
“제가요?”
“예, 마치 그것을 가지면 공주가 된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명품 핸드백처럼 말이에요.”

그때 보일 듯 말 듯한 엷은 미소가 어설픈 언어를 대신해 지수의 볼가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지수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꿈결에서나 듣는 동화 같았다. 하지만 그에 비해 와인향은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화려했다. 현우는 술잔을 슬그머니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러자 네일케어로 맑은 광택이 나는 지수의 긴 손가락이 작은 너울로 밀려왔다. 그리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졌다. 이제 지수의 검은 눈동자가 내뿜는 주술이 현우의 의식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
“거기 누구세요?”
“흠! 흠! 사장님. 접니다.”
주변이 어두워 상대의 실루엣은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가운 헛기침만으로도 상대의 서늘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 어느 틈엔가 마당의 어둠 뒤로 은밀하게 숨어들어 있었다. 사내는 유독 턱 근육이 잘 발달되고 입언저리의 수염까지 덥수룩해 거칠고 단단해 보였다. 흡사 탁하고 어두운 바다 속에서 먹이를 잡기 위해 공격타이밍을 노리고 있는 굶주린 백상아리 같았다. 게다가 오랜 시간 고도로 무술훈련을 한 무술사범처럼 위압적인 기운까지 내뿜었다.

“어머, 피 씨 아저씨.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놀라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사장님, 꽃시장 김 사장이 전화를 했습니다.”
“왜요?”
“오늘 꽃시장에 백장미가 아주 좋은 것이 들어왔답니다. 그런데 전화가 안 된다고 해서.”
“아, 그래요. 그럼, 제가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전화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아참! 아저씨, 달래는 화원에 잘 있나요?”
“저희랑 저녁 먹고 지금 이 강사와 놀고 있습니다.”
“아, 예. 아저씨, 오늘 수고 많이 하셨어요. 피곤하실 텐데 그만 들어가 쉬세요.”
“그럼 전 이만. 흠! 흠!”

이어 진흙 속으로 가라앉는 아나콘다처럼 피오기가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현우는 늪의 중심으로 헤엄쳐가는 피오기를 보며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물론 지난번 정원의 걱정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수가 다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의식하자 감정의 꼬임이 쉽게 풀렸다. 마침내 피오기가 어둠에 잠겨 그 흔적조차 지워졌다. 동시에 현우도 남아 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탈탈 털어버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