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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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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비밀의 문
“후후후, 나도 저때가 있었는데.”
남녀 신입요원 둘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지나갔다. 재국은 가던 길을 멈추고 물끄러미 신입요원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그들이 앞으로 만들어낼 열정과 풍요의 향기를 가늠했다.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재국의 게으름이 타고 나태함이 증발했다. 재국은 새로운 기분으로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 팀에 무슨 긴급상황이라도 발생한 거야?”
“리재경이 윤지수 씨에게 보낸 합성사진과 이니셜 펜던트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아~, 그 천사.”
“재국 씨는 천사가 뭐를 의미하는 것 같아?”
“글쎄요. 현재로선 딱히 이거다 하고 천사에 대한 규정을 내리기가……. 하지만 합성사진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재국 씨도 사진과 뒤에 적힌 메시지가 비밀자금을 찾아낼 수 있는 중요 단서라고 판단하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아참! 재국 선배의 지시대로 다시 한 번 정밀 분석했습니다만…….”
“이렇다 할 결과물이 없었던 모양이군.”
“맞아요. 이미지는 물론이고 단어와 구절, 숫자와 문자, 그리고 행간에서도 특이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어요.”
“유진 씨, 그럼 리재경이 사진에 남겨놓은 전화번호도?”
“확인결과 없는 전화번호입니다.”
“당연히 시간이 너무 흘렀잖아.”
“개통은 물론이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전화번호였습니다.”
“그래?”
“흠, 존재하지도 않는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상대에게 전화를 요청했다. 그렇다면 그 자체가 재국 씨가 말한 목적과 의도에 부합하겠군.”
“그럼 혹시 리재경이 은밀하게 거래하던 국내 시중은행의 계좌번호는 아닐까?”
“그것 역시도 확인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금융기관 어디에도 그런 계좌번호는 없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계좌번호는 보통 지점번호-계정번호-일련번호-검증번호로 구성된 체계를 갖고 있어요. 총 자릿수는 은행들마다 조금씩 다르고요. 하지만 열다섯 자리를 쓰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어요.”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야.”
“그게 뭡니까, 팀장님?”
“유독 숫자로만 구성돼 보는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1661-592-802-88398이 문장 전체나 핵심문장을 해독할 수 있는 키워드라는 의미겠지.”
“헉! 키워드요? 정말 그럴 가능성이 높겠는데요.”
“그렇다면 이제 잠자는 뇌를 한번 깨워볼까. 메시지를 올바로 해독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풀어내려면 이 키워드를 어떻게 해석하고 또 적절하게 사용하느냐가 가장 중요해.”
“가만! 해독하니까 갑자기 지난번에 유진이가 말한 내용이 뇌리를 때리는데요.”
“유진 씨가 무슨 말을 했는데?”
“저도 잘…….”
“아, 왜 있잖아. 스테가노그래피기법.”
“아~, 그거요! 지수 씨의 경우 공작원 교육을 받은 전력이 전혀 없잖아요.”
“그렇지.”
“그러니 처음부터 편지문구를 암호화코드로 작성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 않을까요?”
“맞아, 바로 그거야. 그렇다면 이 문장은 간첩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존의 암호문과는 접근방법을 달리해야 해.”
“어떻게 말입니까?”
“간단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반인의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거야. 그래야 일반인도 쉽게 풀 수 있을 거 아니겠어?”
“그림퍼즐을 맞추듯 말이군요?”
“그렇지! 물론 우리 주변의 무언가를 이용할 수도 있겠지. 단 누구나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 말씀은 대부분의 사람이 갖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한가요?”
“물론. 거기다 쉽게 암호화할 수 있는 도구란 소리겠지.”
“팀장님, 그렇다면 혹시 이거 아닐까요?”
“휴대전화!”
“예, 지금까지 언급하신 내용이 모두 휴대전화에 함축되어 있잖아요.”
“그래! 맞아.”
“유진아, 일단 네 휴대전화에 입력해서 변환시켜 봐.”
“그런데 팀장님, 휴대전화마다 각기 다른 한글 조합 오토마타(자동장치)를 갖고 있잖아요. 그래서 키패드의 입력방법도 서로 다르고요.”
“그렇지.”
“그럼 어느 회사 제품인지 그것부터 알아내는 게 급선무겠네요.”
“그걸 쉽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 이번에도 한번 잘 생각해 봐.”
“글쎄요, 거기까지는 저도 잘……. 각 업체의 휴대전화를 모두 구해올 수도 없고요.”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
“그럼 팀장님은 어느 회사 제품인지 벌써 알아내셨다는 말씀입니까?”
“아마도.”
“대체 어느 회사의 휴대전화입니까?”
“LG야.”
“LG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힌트는 바로 이니셜 펜던트목걸이의 십자가 뒷면에 새겨놓은 ‘Good-looker’라는 글자야.”
“‘Good-looker’요? 그건 미인이라는 의미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전적 의미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재국 씨가 내게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리재경이 합성사진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갖고 있다고. 따라서 사진뿐만 아니라 이니셜 펜던트에 새긴 글자 또한 필요와 목적에 따라 얼마든지 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세상에!”
“그렇다면 팀장님은 ‘Good-looker’를 ‘Looker-good’으로 생각하시는군요. ‘Looker’는 보다·주목하다라는 동사 ‘Look’으로 쓰였고요.”
“맞아.”
“또한 ‘Good’은 ‘Goodness(선량·미덕)’를 의미하고요.”
“어쩌면 바람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하는 ‘God(신)’일지도 모르지.”
정원은 다른 차원을 여행하는 시간여행자처럼 멍하니 벽 쪽을 응시했다. 정원은 메시지의 이면에 숨겨진 큰 그림을 보고 있었다. 정원의 추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는지 동공에서 사방으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재국과 유진은 정원의 추론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낼지 몹시 궁금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정원의 눈에서 빛이 잦아들더니 물위의 거인처럼 다른 차원 속을 걸어 나왔다.
“그런데 팀장님, LG의 휴대전화를 어디서 구하죠? 보시다시피 제 휴대전화는 삼성입니다.”
“난 KT.”
“구할 필요 없어. 내 휴대전화가 LG제품이니까.”
“보안상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한물간 피처폰(일반휴대전화)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정말 몰랐네.”
“그러게요. 그럼 이제 휴대전화의 키패드에 숫자를 입력해 문자로 전환시켜 보겠습니다. 1, 6, 6, 1, 5, 9, 2, 8, 0, 2, 8, 8, 3, 9, 8.”
“의미 있는 결과가 나왔어?”
“팀장님, 휴대전화에 ‘ㄱ, ㅗ, ㅗ, ㄱ, ㅁ, ㅣ, ㄴ, ㅇ, ㅡ, ㄴ, ㅇ, ㅇ, ㅏ, ㅣ, ㅇ.’이라고 표시가 되는데요. 한 번 보시죠?”
“흠…….”
“아무 의미도 없는 기호들만 나열된 것 아닌가요?”
“그러게 말이에요.”
“아니야. 의미의 전달은 불분명하지만 나열된 기호에는 분명 일정한 패턴이 있어.”
“기호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요?”
“다시 한 번 잘 봐봐. 분명 자음과 모음이 어느 정도 일정한 문자열을 만들고 있잖아. 임의대로 대충 조합을 하면 ‘고, 옥, 민, 은, ㅇ, 아, .’ 따라서 전화번호는 문장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 거야. 아니 분명해.”
“글쎄요. 분석관 출신이신 팀장님이 그렇다고 하신다면 가능성이야 높겠지만 저희로선.”
“두 사람을 위해서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우선 내 휴대전화 자판의 특징은 획추가야. 그러니까 그런 입력방식의 특징을 최대한 고려해서 유진 씨가 다시 한 번 변환시켜 봐.”
“획추가를 했다면 팀장님의 휴대전화에 찍힌 문자 중에 획추가가 있다는 말씀이겠군요.”
“바로 그거야. 그게 바로 두 번째 단서가 되겠지.”
“이거 어째 암호문를 해독하는 것 못지않은데요. 쩝!”
“과연 그럴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혹시 세 번째 단서도 이미?”
“후후후, 유진 씨가 누르고 있는 키패드에 이미 세 번째 힌트가 있잖아.”
“뭐가 보이니?”
“아니요, 전 잘……. 아! 알겠다. 혹시 모음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두 번의 획추가가 가능한 자음과 달리 모음은 모두 한 번의 획추가만 가능하지. 또한 외형상 알아보기도 쉬워. 따라서 앞의 문장은 ‘ㅗ, ㅗ, ㅣ, ㅡ, ㅏ, ㅣ’의 모음이 들어간 문장이야. 즉 똑같은 자음이나 모음이 겹쳐 있으면 바로 획추가가 이루어진 거야. 숫자 ‘66’이 변환된 ‘ㅗ, ㅗ’는 ‘ㅜ’자가 되고, 숫자 ‘88’이 변환된 ‘ㅇ, ㅇ’은 ‘ㅎ’자가 되겠지. 그런데 고맙게도 리재경은 전화번호에 음절의 수까지 표시해 놓았다는 사실이야.”
“가만, 그럼 문장부호로 사용된 붙임표(-)가 혹시…….”
“맞아, 붙임표는 바로 음절수를 의미해. 어때 이제 몸이 슬슬 풀리지 않아?”
“이거 롤러코스를 탄 것보다 손에 땀이 더 나는데요.”
“유진 씨, 어때 내 말이 맞지?”
“예, 맞아요. 숫자 ‘1661-592-802-88398’의 의미가 바로 ‘국민은행’이었어요.”
“그런데 이 퍼즐에서 우리가 얻은 건 두 가지야. 첫 번째는 ‘국민은행’이 네 번째 단서와 연결된다는 거야.”
“그럼 두 번째는 뭡니까?”
“리재경이 단순한 방법을 썼지만 교묘하게 속임수를 걸어놓았거든. 따라서 비밀자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선 난이도를 높여야 한다는 사실. 아무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 메시지 어딘가에 숨겨진 비밀의 문을 찾아보자고.”
“어떻게 말입니까?”
“눈으로 확인 가능한 직접적인 숫자는 표시하지 않았지만 앞서 예에서 보듯 그것이 표시될 수 있는 또 다른 상징과 기호가 존재하거든.”
“나머지 문자 말씀이군요.”
“그래, 내 짐작이 맞는다면 이번의 경우처럼 문자도 변환시키면 숫자가 될 거야. 그것도 사라진 비밀자금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 단서 말이야.”
“하지만 문자열을 다 치면 엄청나게 긴 숫자가 나올 텐데요.”
“그렇겠지. 그렇다면 문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와 내용을 찾아내는 수밖에.”
“재국 씨가 보기엔 어느 문장이 가장 핵심적인 단어와 문장 같아 보여?”
“일단 첫 느낌부터 강한 ‘나는 천사를 믿는다.’가 아닐까 합니다. 거기엔 문장의 핵심단어인 천사도 들어 있고요. 더구나 첫 문장이 그 다음 문장을 풀어주는 연결고리 역할도 하잖습니까.”
“유진 씨는?”
“저는 마지막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리재경의 바람과 진심이 담겼잖아요.”
“그럼 팀장님은 어느 문장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째 재국 선배는 점심내기 사다리타기를 하는 것 같아요?”
“후후후, 내가 그랬나?”
“난 세 번째 문장이야. 이유는 다른 문장과 비교해 어법에도 안 맞고 특이하게 붙임표로 연결했거든. 그럼 우선 재국 씨가 말한 첫 문장부터 숫자로 변환시켜볼까.”
“후후후, 이번에는 또 어떤 어메이징한 반전스토리가 나오려나.”
“팀장님, 변환시켰어요. ‘232027**33273404592*2022*3’입니다. 그런데 이건.”
“그러게, 내가 보기에도 한눈에 아닌 것처럼 보인다.”
“팀장님, 어쨌든 시중은행에서 이런 계좌번호를 사용하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물론. 아참! 재국 씨. 뭣 좀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팀장님이 저에게 말입니까?”
“응. 내가 보기에 사물을 보는 직관능력과 사고체계는 아주 뛰어나.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의아스러울 만큼 여러모로 허술하단 말이야. 그렇다면 어느 것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일까?”
“글쎄요, 전 전자가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분명 어떤 숨겨진 의도를 갖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왜냐하면 사고체계는 위장이 불가능하지만 행동은 위장이 보다 쉬우니까 말입니다.”
“그렇겠지? 선의건 악의건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한 술수겠지?”
“그런데 혼란스러운 건 그의 행동이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이야.”
“그렇다면 최소한 그가 적은 아니라는 의미가 되는 건가요.”
“적은 아니다? 흠, 내 생각도 재국 씨와 같아.”
“팀장님, 대체 그가 누굽니까? 몹시 궁금한데요?”
“후후후, 내가 신뢰하는 친구.”
“아~ 예.”
“저 팀장님!”
“벌써 확인이 끝난 거야?”
“금융감독원에 확인해 봤는데 역시 예상대로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유진 씨가 선택한 마지막 문장 ‘너도 천사를 믿어라.’를 변환시켜 봐.”
“‘2332*67-33273404592*83343.’ 히~유! 저 역시도 재국 선배처럼 결과가 참혹한데요. 확인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창피할 것 같아요.”
“쿠쿠쿠, 그나마 다행이다. 유진이가 맞췄으면 내 체면이…….”
“거봐요, 선배. 사다리타기 한 거 맞죠. !”
“그럼 이제 내가 선택한 ‘비-이-밀의 방’을 변환시킬 차례인가.”
“어디, 한 번 해보겠습니다. ‘비-이-밀의 방.’ 팀장님, 이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이는데요. 별표(*)를 숫자 ‘0’으로 치환(置換)만 하면.”
“변환된 숫자가 ‘5*9-89-594-809-5038.’ 역~시, 우리 팀장님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요. 유진아, 이건 실력일까? 운일까?”
“! 운도 실력이라잖아요.”
“그렇지?”
“예.”
“좋아, 유진 씨. 그 계좌번호를 한번 알아봐.”
“옛설!”
그런데 다시 돌아온 유진은 기대감이 터진 풍선처럼 푹 꺼져 있었다. 쉽게 풀릴 줄 알았던 수수께끼가 마지막 단계에서 풀리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 정원의 추리는 매우 논리 정연하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다. 그래서 유진과 재국의 태도와 감정도 자석에 이끌리듯 정원의 사고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종 결과는 흐르다 갑자기 사라진 강처럼 세 사람을 배신하고 커다란 허탈감을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