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71> 신의 능력

     
    여러 명의 악령들이 공격을 했다. 그동안 자신에게서 괴롭힘을 당했던 대상들이 원한을 품고 되살아난 화신(禍神)이었다. 악령들은 ‘왜 자신들을 못살게 괴롭혔느냐’는 질문을 한 뒤 지원을 고통스럽게 잡아먹었다. 한참을 그렇게 시달리다 정신을 차려보면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곤 또다시 나타나 지원의 죄를 불로 씻어내야 한다며 연옥(煉獄)의 무서운 형벌을 가했다. 지원은 숯이 되어가는 몸뚱이를 보며 악령들이 나열하는 자신의 부끄러운 죄목을 듣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으으으~악!”
    하지만 아무리 잘못을 인정하고 깊이 뉘우쳐도 쉽게 죽음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숨이 끊어지지 않은 지원의 가슴에 악령 하나가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 심장이 잘려나간 지원은 자신의 삶이 그 삶을 채운 시간들이 무의미해졌다. 하지만 비로소 인간세상을 이해하게 된 것만 같았다. 꿈이었다. 지원은 당장 숨을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무작정 시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발끝에서 무언가 지원의 엄지발가락을 쪼았다. 노란 고무오리였다. 지원은 무의식적으로 노란 고무오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눈을 꼭 감았다. 신의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 같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화난 음성이 들렸다.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신에게서 용서를 받지 못한 지원은 악령이 우글거리는 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리곤 자신의 영혼이 유일하게 편안함을 느끼는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마 전까지 호기심 많던 어린 생명들이 관심과 사랑으로 무럭무럭 자라 푸른 녹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맑던 얼굴 하나하나에도 제법 풋풋한 청년의 냄새가 났다. 지원은 나뭇잎을 주워 또박또박 마음의 편지를 썼다. 그리곤 잔잔한 물웅덩이에 살며시 띄웠다. 하지만 편지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지원은 다시 그 옆에 들고 온 고무오리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람을 등에 진 고무오리가 집배원이 된 양 앞으로 나아갔다.
    “지원아, 혼자 뭐해?”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응.”
    “아! 내가 낸 문제의 답을 찾았구나. 눈에 보이는 진실 말이야.”
    “아니.”
    “그럼 왜?”
    “네가 누군지 오늘 비로소 알았거든.”
    “그건 내가 이미 말했잖아. 난 너의 수호천사라고.”
    “유감스럽게도 난 동화 따위는 안 믿어. 내가 살아온 세상에선 동화가 없었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넌 내 수호천사가 아니야.”
    “그럼?”
    “넌 내 공포와 불안 그리고 죄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야. 다른 말로 끔찍한 악몽이지.”
    “내가 악몽이라고? 그럼 내가 들려주고 네가 공감한 이야기들은?”
    “그것도 전부 내 꿈과 기억이야. 넌 내 내면의 세계를 여행하고 내 꿈과 기억을 훔쳤어.”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게 있어 불꽃은 어둠을 밝히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멀어짐을 의미하거든. 또한 악몽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이기도 하고. 넌 지금까지 당의 지시처럼 나를 감시하고 통제한 거야.”
    “크크크. 이거 놀라운데. 아니 아주 훌륭해. 그래 맞아. 넌 내 사랑스런 포로야. 그리고 난 불꽃으로 너에게 명령했고.”
    “내가 너의 포로라고?”
    “그래, 포로. 난 너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 물론 잃어버린 너의 과거를 모두 되찾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도 바로 나야.”
    “더 이상 사악한 너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거야.”
    “넌 날 결코 배신하지 못해.”
    “왜지?”
    “그건 바로 내가 오늘의 너를 만들었거든. 너의 생명, 너의 힘, 너의 운명, 그 모든 것을 너에게 준 존재가 바로 나라고. 알아듣겠어?”
    “그래서 난 너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넌 뱀처럼 나에게 속삭였고 끝없는 사막처럼 나를 절망케 했어.”
    “비굴하고 겁 많은 네가 과연 그럴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맞아, 지금까지는 없었어. 하지만 이제는 달라.”
    “다르다고?”
    “그래.”
    “어떻게?”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거든.”
    “쳇! 사랑이 정말 묘약은 묘약이군.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게 있어.”
    “그게 뭔데?”
    “넌 날 부정하는 순간 네 존재의미가 사라지게 돼. 한순간 연기처럼 펑! 하고 말이야.”
    “과연 그럴까?”
    “그 근거 없는 오만은 뭐지?”
    “네 말대로 지원이라는 나약한 존재는 사라져도 더 큰 존재의미는 누군가에게 남겠지. 물론 나는 후자를 택할 거야.”
    “더 큰 존재의미가 남는다고?”
    “그래. 영혼을 잉태하고, 그 영혼에게 태어나는 기쁨과 삶의 기회를 주는 위대한 존재 말이야.
    “그럼 너 혹시……?”
    “맞아.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양심과 정신을 품고 있어. 그리고 그 양심과 정신이 이 세상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과 용기를 나에게 주었고. 그래서 이제 내가 이기지 못할 고난도 넘지 못할 산도 없는 거야. 물론 사악한 너까지도.”
    “그렇다고 내가 너를 포기할 것 같아. 넌 내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어.”
    “알아. 넌 나의 분신이자 악몽이라는 거.”
    “잘난 체가 지나쳐 방자하군.”
    “오만한 건 악몽 바로 너야!”
    “분명히 기억해.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중에 엄중히 물을 테니까. 그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 나는 널 고통의 송곳에 세워놓고 하루에 한 번씩 독수리에게 네 심장을 쪼아 먹도록 시킬 거야.”
    “그게 얄궂은 내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겠지.”
    “그럼 이제 너의 능력을 보여 봐.”
    “넌 지금 이 순간 내 의식에서 영원히 사라질 거야. 내 무기는 바로 위대한 모성이야. 모성은 가장 강력하고 완벽한 힘이야. 한마디로 불가사의한 신의 능력이지.”
    “그게 어디 네 마음대로 될까? 크크크.”
    “글쎄.”
    “헉! 아니, 내 몸이 갑자기 왜 이러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잖아. 거기다 어둠이 형체를 잡아먹듯 손발이 강한 빛에 녹아 사라지고 있어.”
    “이제야 내 말이 믿기나 보군.”
    “세상에! 이럴 수는 없어. 하찮은 인간에게 신과 대등한 존재인 내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건 내 눈으로 직접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잖아.”
    인간은 불완전하고 하찮을지 몰라도 모성만큼은 완전한 신의 마음이며 능력이다. 지원은 그 능력으로 수호천사를 공격했다. 그리고 수호천사는 자신이 경멸한 지원의 힘에 맥없이 굴복당했다. 이제 수호천사의 형체는 실온의 아이스크림처럼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거짓과 기만의 가면으로 덧씌운 수호천사의 실체가 드러났다. 수호천사는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아니, 매일 밤 찾아오는 악몽 그 자체였다. 지원은 반은 사람 반은 뿔 달린 짐승의 형상을 한 수호천사에게서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가장 섬뜩한 건 식인종이 전리품으로 가죽을 벗긴 것 같은 근육뿐인 붉은 피부였다. 이제 두려움에 떠는 건 지원이 아니라 위대한 모성에 제압당한 악몽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이런 엄청난 힘을 얻은 거지?”
    “아무리 생명을 준 위대한 모성일지라도 태어날 기회조차 빼앗을 권한은 없다는 양심이야.”
    “헉! 벌써 내 몸이 절반이나 연기처럼 사라졌어. 지원아, 살려줘. 제발, 안 돼! 아악! 지원아~.”
    “그럼 잘 가라, 악몽.”
    생사가 극명하게 갈렸다.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악몽은 지원이 그랬던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온몸이 갈기갈기 찢겼다. 그리고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수증기처럼 빛의 잔상만 남기며 마법처럼 사라졌다. 수호천사가 사라진 자리에선 뼈나 손톱을 태운 듯한 역겨운 냄새가 났다. 지원은 그것이 사악함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지원은 한껏 고조됐던 긴장감이 느슨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만큼 자신의 신체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도 깨달았다.
    “히~유!”
    지원은 이끼를 피해 주위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대충 훔쳤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주 여리고 작은 손이 허공에서 늘어지는 나뭇가지처럼 지원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분명 오른손과 팔뿐이었다. 하지만 정말 뽀얗고 귀여운 예쁜 손이었다. 그 갑작스런 등장에도 지원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지원은 그 작은 손을 뺨에도 대고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기도 했다. 더구나 손은 지원의 운명을 위로하는 것처럼 어깨와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기까지 했다. 그 작은 손을 잡고 있는 동안 지원은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지원이 보고, 만지고, 느낀 건 또 다른 공포심이 만들어낸 착각이거나 착시가 아닌 누군가의 영혼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꼭 지켜주고 싶은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영혼이었다.
    “아가야, 이제 네 영혼은 파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단다. 오마니가 꼭 지켜줄게. 만약 그때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이 완강하게 거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어리석은 판단을 했겠지? 솔직히 처음엔 너의 행복이 무시당한 것 같아 조금은 야속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 의사선생님이 너무나 고마워. 너도 그렇지? 앞으로도 오마니로서 존중해야 할 가치와 맹세를 잃지 않도록 네가 도와줘. 알았지? 대답한 거다! 이제 네 심장소리는 내 희망이야.”
    지원은 자기 내부의 모순과 가족의 비극을 완벽하게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가능케 해준 건 생명이라는 지혜의 나무열매였다. 나무열매는 지원 자신의 존재감과 선악을 구별하는 이성을 선물했다. 지원은 그 이성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들을 차분히 가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