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80> 연결고리

     
    “추가 사망자는?”
    “복부와 가슴에 두 발을 맞은 30대 남자가 방금 심폐정지 상태에 빠졌답니다.”
    “회생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무장괴한의 행방은?”
    “아직 묘연합니다.”
    “사건 경과시간으로 볼 때 군·경의 포위망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소리군.”
    “그래서 군·경이 전국으로 수색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사고현장에서 무장괴한들끼리 주고받은 휴대전화의 통화기록은?”
    “그것 역시 남긴 게 없습니다. 아마도 무전기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참! 무장괴한들이 타고 도주했던 점장의 승용차가 발견됐습니다.”
    “발견 장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장동에 있는 대곡역 근처입니다.”
    “대곡역! 거기는 3호선과 경의선의 환승역이잖아.”
    “맞습니다.”
    “그렇다면 도주로가 동서남북 사방으로 뚫렸다는 이야긴데.”
    “하여간 보안카메라를 파괴한 솜씨와 은행여직원에게 입힌 폭탄조끼의 제작수준으로 볼 때 예사로운 솜씨가 아닌 건 분명합니다.”
    “맞아. 거기다 교통관제센터의 컴퓨터시스템을 다운시켜 도주 시 이용할 생각을 한 건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야. 분명 무장괴한들의 행동에는 잔인함과 신속함이 설명하는 고도의 군사적 정밀함이 있어. 그런 정밀함은 오랜 시간 훈련으로 조직화된 무장세력이 아니고선 불가능하지.”
    “맞습니다. 그런데 은행 내 CCTV는 모두 파괴된 것으로 아는데 이 녹화영상은 어디서?”
    “은행 주변을 수색한 경찰이 인근 건물입구에 방범용으로 설치한 CCTV의 녹화테이프를 모두 제출받은 거야.”
    “아, 그럼 무장괴한의 신원은 확인이 됐습니까?”
    “녹화된 무장괴한들은 화면이 흐려 정확한 이목구비를 가늠하기 어려워. 단지 남자의 키가 170~175cm 정도고, 여자는 160cm 안팎인 것만 확인했어. 하지만 걸음걸이와 속도로 볼 때 목격자들의 진술처럼 둘 다 노인은 아니야.”
    “혹시 실리콘마스크를 착용한 건가요?”
    “아마도.”
    “이거야 원! 지금쯤 괴한들은 완전범죄가 실현된 줄 알고 기고만장하겠네요.”
    “신속한 판단과 과감한 행동으로 봐서 분명히 주변에 한두 명은 더 있었을 거야. 물론 그들이 정보수집과 경계감시 임무도 담당했을 테고.”
    지루하고 따분한 거리영상이 정지영상처럼 흘렀다. 상황을 반전시킬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하지만 현실은 무장괴한들이 경계심을 늦춰 실수하기를 기다리는 것과 예상치 못한 곳에서 군·경의 불심검문에 걸리는 것, 그리고 위치를 알려줄 신고자가 나타나는 것뿐이었다. 그만큼 무장괴한들의 판단과 행동은 군·경을 앞섰다. 정원은 본능적으로 사악한 음모를 통한 야비한 전쟁의 서막이 올랐음을 직감했다. 이제 남은 건 무장괴한들과의 피 말리는 두뇌게임뿐이었다. 유진이 사무실에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너 어디 갔다 이제야 나타나는 거야.”
    “팀장님, 이 사진 좀 보세요?”
    “유진아, 누군데?”
    “재국 선배가 보기엔 누구처럼 보이세요?”
    “어디, 에이! 윤지수 씨잖아.”
    “그러게. 내가 보기에도 헤어스타일이 바뀌긴 했지만 지수 씨처럼 보이는데.”
    “너 지금 우리가 장난 받아줄 기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물론이죠. 그럼 이 사진은요?”
    “가만, 이것도 똑같은 윤지수 씬데.”
    “그럼 이 사진은요?”
    “허, 참! 얘가 왜 안 하던 짓을 할까. 가뜩이나 무장괴한 때문에 받는 압박감이 얼만데.”
    “그런데 이 사진들이 왜?”
    “맨 처음 보신 사진은 기밀자료보관함에서 찾아낸 사진입니다. 촬영된 시점은 정확히 2년 전이고요.”
    “그럼 나머지 두 장은?”
    “한 장은 3팀이 그저께 찍은 사진입니다. 그리고 한 장은 저희가 파일로 만들어 보관해오던 사진이고요.”
    “내가 보기엔 딱히. 우선 촬영된 시점이 2년이라는 시차를 갖고 있고, 또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카피처럼 화장까지 했잖아. 나머지 두 장 속 윤지수 씨가 민낯으로 찍은 한 장의 사진보다 좀 더 성숙해 보인다는 특징 외에는…….”
    “유진 씨, 그런데 3팀이 어떻게 윤지수 씨의 주소지를 알아내고 사진을 찍었지?”
    “남운영의 사무실을 수색하던 중 찾아낸 개인수첩에서 메모지가 나왔답니다. 거기에 윤지수 씨의 화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고요.”
    “그거야 업종마다 선호하는 전화번호가 있잖아. 예를 들면 대리운전은 ‘8282’, 치킨집은 ‘8292’처럼 말이야. 거기다 요즘은 꽃배달사업도 택배를 이용해 전국적인 배달망을 갖고 있잖아. 그러니까 우연히 거기다 주문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죠. 하지만 우연치고는 너무 기가 막힌 우연이라서 말이에요.”
    “가만! 2년 전이라고?”
    “예, 정확히 2년 전입니다.”
    “분석팀에 한 번 넘겨보지 그랬어?”
    “재국 선배, 당연히 그랬죠.”
    “유진이의 즉각적인 대답이 왠지 의미심장한데.”
    “그래, 결과는?”
    “혈관 일치여부 판독(Vein matching) 결과 놀랍게도 사진 속 세 인물의 손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더 정확히는 그중 한 명이 달랐습니다.”
    “그게 누군데?”
    “첫 번째 사진 속 인물의 손이 나머지 두 장의 사진 속 인물의 손과 다른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하지만 혈관 일치여부 판독은 아직까지 지문판독 등 여타 판독기법만큼 신뢰성을 확보하지는 못했잖아.”
    “그야 그렇죠. 그래도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지난 2002년 대니얼 펄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를 참수한 진범이 9·11테러를 기획한 알카에다 요원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라는 증거로 혈관 일치여부 판독 결과를 공개했었잖아요.”
    “차라리 얼굴인식(Facial recognition)기법을 활용해 다시 판독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얼굴인식기법은 사람의 얼굴을 마치 지형을 측량하듯이 분석하잖아. 물론 통계자료에 근거하기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도 더 적고.”
    “재국 씨, 그런데 문제는 얼굴인식기법도 백 퍼센트 완벽하지 않다는 게 문제야. 그래서 그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DNA테스트를 병용하는 것이고. 그런데 보호·관리를 담당하던 우리도 인식조차 못했을 정도로 똑같다면…….”
    “그렇다고 고인이 된 성혜경을 무덤에서 불러내올 수도 없잖습니까. 만약 온다면야 오마니니까 쌍둥이도 쉽게 구별하겠지만.”
    “!”
    “아, 맞다! 첫 번째 인물은 같은 날 성혜경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어요.”
    “뭐!”
    “물론 첫 번째 사진과 동일인이었고요.”
    “흠, 그렇다면 첫 번째 사진 속 인물은 진짜 윤지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긴데. 나머지 두 장의 사진 속 인물들은 가짜란 말이고. 그럼 우리가 보호·관리하는 인물도 가짜라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판독결과만 가지고 볼 때 그렇다고 판단할 수밖에는…….”
    “에~이! 하지만 그건 현실성이 너무 없다. 제아무리 완벽하게 성형수술을 한다 해도 기억까지 똑같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아니야!”
    “뭐가요, 팀장님?”
    “지난번에 재국 씨가 말했지.”
    “뭘 말입니까?”
    “감청팀의 비교·분석한 결과 압축송수신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포인트가 강북구라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게 지금 윤지수와 무슨 상관관계가?”
    “재국 씨, 지금 즉시 감청팀에 그동안의 추적결과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해봐.”
    “알겠습니다.”
    사무실에는 북극의 매서운 바람소리만 들렸다. 그때 유진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정원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천적의 출현으로 먹이도 놓고 도망가는 북극곰의 눈빛을 쏘아댔다. 두고 가는 먹이가 아쉬워 뒤가 자꾸 끌린 것이다.
    “저, 팀장님?”
    “응, 유진 씨.”
    “혹시 기억하세요?”
    “뭘?”
    “저한테 윤지수 씨의 화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배달기사의 신분조회를 지시하신 거요?”
    “응. 배달기사의 신원정보는 물론이고 다른 화환제작 기사와 꽃꽂이 강사의 신분도 아주 깨끗하다고 했잖아.”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요. 보고를 드리고 나서 뭔가 이상해 다시 한 번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괜찮으니까 어서 말해봐.”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신원을 훔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럼 급조한 위장신분을 증명할 신원사항이나 학력, 경력에서의 허점은?”
    “각자의 개별적인 신원정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세 사람의 신원에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공통점?”
    “모두 신원을 확인해줄 가족이 없다는 겁니다.”
    “뭐!”
    “심지어 세 사람 모두 고아였습니다. 그것도 강원도 속초의 한 고아원 출신입니다. 더욱이 신분세탁과정이 우리 블랙요원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과 매우 비슷합니다.”
    “유진 씨, 우리가 속았어.”
    “예! 뭘 속았다는 거죠?”
    “화원에 있는 건 윤지수가 아니라 쌍둥이 언니 윤지원이야.”
    “예~에! 그게 무슨.”
    “내 예상이 맞는다면 감청팀의 분석결과에 전파발신지로 윤지수 씨의 화원이 포함됐을 거야.”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서둘러야 해. 먼저 전술팀에 협조를 요청하고 군·경의 협조를 받아서 도주로를 봉쇄해야 해.”
    “헉! 헉! 헉!”
    “재국 선배, 출동이에요.”
    “출동? 어디로?”
    “어디긴요. 윤지수 씨 화원이죠.”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어?”
    “재국 선배가 뛰어오는 걸 보고 알았죠.”
    “정말 귀신들이 다 됐네.”
    “팀장님이 그러셨거든요. 감청팀이 파악한 대략적인 위치에 아마도 윤지수 씨의 화원이 포함됐을 거라고요.”
    “헐! 졌다.”
    정원은 뛰어가며 급히 휴대전화를 찾았다. 그리고 황급히 전화번호 하나를 눌렀다. 하지만 웬일인지 수신자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더욱이 컬러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마저도 끊겼다. 수신자는 현우였다. 정원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 뇌리를 파먹었다. 그러다 결국 나반으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석우가 개인적인 용무로 현우가 한 시간 전쯤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더욱이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은 것 같다고 전했다. 직감적으로 현우의 신변에 위험이 닥쳤다고 느낀 정원은 다급해졌다.
    “유진 씨, 지금 당장 이 번호의 차량을 긴급수배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예!”
    “팀장님, 그럼 혹시 변성일도 남파간첩들의 소행이 아닐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며칠 전 우연히 검시결과 보고서를 확인했는데, 추락사에서는 나올 수 없는 살해 전 폭행증거가 기록돼 있었거든요.”
    “살해 전 폭행증거라고?”
    “예, 그래서 곧바로 현장사진을 확인했더니 사실이었습니다. 얼굴에 생긴 깊은 열상(피부가 찢어진 상처)으로 인한 혈액응고와 사체의 가슴과 팔에 시퍼런 멍이 있었습니다.”
    “흠. 사망 전에 심한 구타를 당했다? 유진 씨, 강 과장님과 마재성·변성일 사건의 공통점이라면 뭐가 있을까?”
    “너무나 치밀해 흔적이 남지 않았다는 점일 겁니다. 세 사건 모두 증거부족·단서부족·목격자부재라는 공통점이 있잖습니까?”
    “흠, 어쩌면 재국 씨의 추측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현우가 더욱더 위험하다는 소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