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보길 칼럼] 박영효 추대 쿠데타 음모… "황제는 물러나시오"
  •  

  •                                      ▲개화파의 중심인물 박영효(朴泳孝)의 얼굴. ⓒ 한국학중앙연구원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에 마침내 국회(國會)가 생겼다.(1898.11.29.)

    비록 현대적인 직접선거에 의한 국회는 아닐 지라도, 5천년 왕조의 민족사에 최초로 국민 대의기관이 설립된 역사적 사건이다.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의 장기 투쟁 앞에 고종황제가 무릎을 꿇은 결과다. 황제의 자문기관 '중추원(中樞院)'을 개편, 50명의 의관(議官:국회의원)을 선임하고 연봉 360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수구파가 3분의 2를 차지하고 독립협회계열은 17명, 이승만도 당연히 의관이 되었다. 그의 나이 24세. 애초에 요구한 '입헌군주제'와는 거리가 멀지만 독립협회등은 일단 이를 수용했다. 황제와 직접 소통할 국가혁명의 투쟁무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국회가 문을 열었는데도 이승만등 급진개혁세력은 거리 투쟁을 강화해나갔다. 고종황제가 외국공사들 앞에서 약속한 국정개혁 ‘헌의6조’를 하루 속히 관철하기 위해서였다.

    그 첫 이벤트가 보부상패에 맞아죽은 신기료장수 김덕구의 장례식이다. '대한제국 의사 김덕구'라는 명정을 상여앞에 들고 '충의(忠義) 애국가'를 노래하며 행진하는 장례식 광경은 독립신문이 대서특필했다. 오늘날 한국내 좌파운동권이 시위희생자를 '의사(義士)'로 호칭하는 원조가 바로 이 김덕구 장례식이었던 셈이다. 이날 장례식을 빙자한 장외투쟁의 효과는 컸다. 보부상패 중에도 만민공동회에 합세하는 사람들이 늘고 기독교인들도 속속 합류했다.

    12월 중추원은 개원하자마자 놀라운 결의를 했다. 이승만등 주동자들이 수구파내각 총사퇴와 개혁내각 수립을 요구하면서 11명의 적임자 추천명단을 결의 해버린 것이다. 결정적인 점은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朴泳孝)를 입국시켜 입각시키자는 요구였다. 갑신정변이래의 ‘역적’ 박영효 이름을 듣는 순간 고종은 노발대발했다.

    시중에는 박영효가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려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수구파가 이승만등 독립협회 간부들을 암살한다는 풍문도 끊이지 않았다.

    갈수록 과격해지는 사태에 드디어 고종은 12월 23일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켜 버렸다. 열흘후 새해 1월2일엔 급기야 이승만등 과격파들을 의관에서 파면시킨다.

    35일짜리 국회의원 이승만- '종9품 의관'은 그의 생애 최초이자 최후의 왕조 벼슬이 되었다.

    5천년 민족사 최초의 국회의원 50명은 황제가 선임
    이승만
    , 개원즉시 수구파 총사퇴 요구… 35일만에 파면
    "
    황제는 물러나라" 박영효 쿠데타 음모에 가담, 구속


    이승만은 남대문 근처 상동(尙洞: 현 남대문시장) 미국 선교사 단지내에 있는 의사 에비슨(제중원 원장: Oliver R. Avison) 집에 피신했다. 독립협회도 해산되고 중추원을 통한 개혁도 물거품이 되자 박영효의 추종자들이 은밀하게 진행해온 쿠데타 계획에 끌려들었다.

    이른바 '무술년정변(戊戌年政變)'- 고종을 폐위시키고 의화군(義和君:의친왕) 이강(李堈)을 황제로 추대, 박영효 혁명내각을 추진한 쿠데타 음모에 가담한 이승만은 "황제는 춘추가 많으시니 황태자에게 양위하시라"는 격문을 만들어 동지들과 함께 뿌리기도 했다고 한다.

    음모는 오래가지 못했다. 포섭대상이던 친위대의 고발로 관련자들은 모두 검거되었다.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체포된다. 의관 파면 일주일 뒤, 의료 선교사 셔먼(Harry C. Sherman)의 통역 부탁을 받고 은신처를 나섰다가 일본총영사관(현 신세계 백화점 자리) 앞에서 붙잡혀 경무청에 수감되고 만다.

    이로써 배재학당 입학후 서재필을 만나 독립협회 해산까지 맹렬하게 펼친 이승만의 공개적인 개혁운동은 사실상 종막을 고하고, 5년7개월의 옥중투쟁으로 이어진다.

    독립협회와 일간신문 창간 및 만민공동회를 통한 그의 3년간 활약은 24세 청년 이승만에게 ‘애국지도자’라는 전설적 명성의 원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시대 한국인의 계몽운동과 독립투쟁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