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나은 현실은 온전히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
  • ▲ 문화평론가 권상희.
    ▲ 문화평론가 권상희.

    [권상희의 컬쳐 홀릭] 자고 일어나면 으레 TV뉴스에서 메르스 확진자가 몇 명인지, 사망자는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메르스, 일명 중동 호흡기 증후군이라는 이 생소하기만 한 바이러스 감염병이 우리 삶에 침범한지 어느새 한 달이 넘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 이 계절에 이런 생경한 모습은 일상이 되어버렸고 절반쯤 가려진 무표정한 얼굴은 마치 마스크 너머로 웃음을 상실한 것만 같다.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게 이처럼 부담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한 달여의 시간동안 그렇게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메르스로부터 잠식되어 버렸다. 마치 비현실성에 코웃음 치며 보던 영화장면을 재연이라도 하는 듯. 영화는 곧잘 현실에 비교되곤 한다. 특히 우리의 삶이 팍팍해질 때 더욱 그러하다.


    최근 다시 보게 된 바이러스 소재의 영화들은 대중 예술로서의 기능을 넘어 예언의 능력까지 갖춘 듯하다. 경고, 무시와 은폐, 잇따른 재앙 - 재난 영화의 뻔한 공식을 그대로 답습한 듯한 최근의 메르스 사태. 그 공식이 단지 픽션이라고 믿었던 건 우리의 안일함 때문이었을까?

  • ▲ 영화 컨테이젼.
    ▲ 영화 컨테이젼.

     


    영화 <컨테이젼>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퍼지면서 죽음의 공포로 인해 패닉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정부의 늑장 대처, 불안 심리를 악용해 인터넷에 거짓 정보를 유포하는 기자(주드 로),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내 붕괴되어 버리는 질서. 바이러스의 전염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들을 옥죄어 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디스토피아로 점철되는 상황 속에서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숭고한 희생정신을 보여주는 미어스 박사(케이트 윈슬렛), 자신을 직접 실험대상으로 삼아 위험을 감수하고 백신 개발에 성공하는 연구원 앨리(제니퍼 엘), 그리고 본인이 사용해야 할 백신을 어린 소년에게 대신 투여해주는 치버 박사(로렌스 피시번)의 모습은 판데믹(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 단계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휴머니즘을 선사한다.

    영화와 닮은 이번 메르스 사태는 잇따른 비난과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메르스 정치까지 선보였다. 혹자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메르스 판데믹이 아니냐며 항변한다. 감염 환자만을 수적으로 볼 때 판데믹이 아닌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지난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심리적으로 이를 경험했다. 그러나 더 이상 같은 비판을 잔소리처럼 되풀이 하고 싶지는 않다.

    현 시점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질 때가 아니다. 그것은 이전투구하는 모습 그 이상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지난 과오를 또다시 반복 하지 않기 위해 보다 더 치밀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극도의 불안 심리에 사람들은 영화와 현실의 부정적인 교집합만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작품에서 보여준 희망은 스크린에서만 존재하는 판타지가 아니다. 메르스 환자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이 보여주는 휴머니즘이야말로 영화와 닮아있는 긍정적인 교집합이다.

    누군가는 시기상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긋자. 영화보다 더 나은 현실, 그것은 온전히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대신 방심은 금물, 이것이 공염불이 되지 않도록 늘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는 사실은 메르스 완전종식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아무 일 없는 일상! 메르스 사태를 극복하고 우리가 하루 속히 만들어야만 할 현실의 해피엔딩이다.

    문화평론가 권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