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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석유화학업계의 전략적 제휴가 확대되고 있다. 원료 다변화를 통해 원가 절감을 꾀하는 석화업체와 화학 부문 진출과 제품을 판매하려는 정유업계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풀이된다.
최근 경영환경 변화와도 맞물려있다. 저유가 기조가 이어지고 있는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확인된 정유·석화업종의 외부 리스크 취약성을 보완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2위 석화업체인 롯데케미칼은 최근 한화종합화학과 사업경쟁력 강화 등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양사는 합성섬유와 페트병을 만드는데 쓰이는 중간 원료인 고순도 테레프탈산(PTA)을 활용하는 사업 부문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이번 협약으로 한화종합화학은 7월부터 롯데케미칼이 필요로 하는 PTA를 연간 45만t 공급하기로 했다. 대신 롯데케미칼은 PTA 생산을 중단하기로 했다. 울산공장의 설비를 조정해 PET, 도료, 불포화 수지 등의 원료인 고순도 이소프탈산(PIA)을 생산하기로 했다.
롯데케미칼의 연간 PIA 생산량은 52만t으로, 글로벌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말 울산공장에 500억원을 투자, PTA 생산라인을 PIA로 전환하는 설비를 구축한 바 있다.
롯데케미칼 측은 "PTA 시장에 중국 회사가 몰려들면서 국내 기업끼리 경쟁하는 게 무의미해졌다"며 "PTA 시장에서 빠지는 방식으로 한화종합화학을 지원하고 세계 시장점유율 1위인 PIA에 집중한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한화종합화학 입장에서도 이번 계약으로 안정적인 수급처를 확보하면서 사업경쟁력이 더욱 높아지게 됐다.
지난 40여년간 국내 PTA사업을 이끌어온 한화종합화학은 연간 200만t 규모의 국내 최대 PTA 생산시설을 보유하고 있으며 최근 중국의 대규모 신증설로 인한 과잉공급에도 지속적인 원가 개선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키워왔다.
롯데케미칼의 경쟁사와의 협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유사와의 협업을 통해 안정적인 원료 조달은 물론, 기존 사업경쟁력을 강화하는 발판을 꾸준히 마련하고 있다.
앞서 롯데케미칼은 2018년부터 현대오일뱅크와 함께 합작사인 현대케미칼을 통해 HPC(정유 부산물 기반 석화공장)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GS에너지와 폴리카보네이트(PC)의 원료인 비스페놀-A(BPA)와 C4유분 제품을 생산하는 합작사 롯데GS화학 설립을 합의했다.
HPC는 원유 찌꺼기인 중질유분을 주원료로 사용해 NCC(나프타분해설비)보다 원가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탈황중질유 등 정유 공정 부산물을 공급하고, 롯데케미칼의 기술과 영업력을 통해 기존 NCC 대비 연간 2000억원가량의 수익성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 공장은 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 내 20만평 용지에 들어설 예정이며 공장 건설에 약 2조7000억원의 투자비가 투입된다. 현대케미칼은 국내 정유사와 석화업체 사이의 첫 합작사로, 2014년 설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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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케미칼이 51%, GS에너지가 49%의 지분을 소유하게 되는 롯데GS화학은 향후 연간 매출액 1조원, 영업이익 1000억원을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 양사는 2023년까지 총 8000억원을 투자해 연간 BPA제품 20만t 및 C4 유분제품 21만t 생산 규모의 공장을 롯데케미칼 여수4공장 내 약 10만㎡ 부지에 짓는다.
롯데케미칼은 BPA를 공급받아 PC제품 가격경쟁력 향상을 도모할 수 있으며 기존 C4 유분제품 사업도 확장한다. GS에너지도 자회사 GS칼텍스를 통해 프로필렌, 벤젠, C4 등을 공급해 안정적인 거래처를 확보하고 석화 부문의 포트폴리오를 강화할 수 있다.
롯데케미칼 입장에서는 정유 계열사가 없다보니 원료와 제품군 다변화를 위해서는 협력이 필요하고, 경쟁 화학사들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주력 사업 분야를 보다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정유사 입장에서도 합작을 통해 공급처 다변화, 화학 산업 진출 용이 등 이점이 있다.
롯데케미칼은 국내 화학사 가운데 유일하게 여수, 울산, 대산 등 3대 석화단지에 화학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셰일가스 기반의 미국 ECC(에탄분해설비), 동남아 롯데케미칼타이탄, 우즈베키스탄 수르길 생산시설 등 다변화된 해외 생산기지도 보유하고 있다.
임병연 롯데케미칼 대표는 "급격한 산업 환경 변화 속에서 경쟁사와 언제든지 협력관계로 변할 수 있다"며 "유연한 생각과 행동이 기업경쟁력 향상은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일조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해외로 눈을 돌렸다. 2013년 중국 최대 석화기업인 시노펙과 합작해 중국 우한에 아시아 기업 최초로 중국 NCC사업에 진출했다. 3조3000억원을 투자해 연간 80만t의 에틸렌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지었다. 합작회사인 중한석화는 가동 첫해부터 흑자를 냈고 5년간 2조원 이상 벌어들였다.
자회사인 SK종합화학은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 화학업체 사빅과 합작사를 설립, 고부가가치 제품인 폴리에틸렌(PE)시장 공략에 나섰다. 독자 개발한 PE제품 '넥슬렌'의 생산과 판매를 위한 합작법인이다. 넥슬렌은 고부가 필름과 자동차 내장재, 케이블 피복 등에 쓰이며 내구성, 투명성, 가공성 등이 우수하다.
에쓰오일의 경우 최대 주주인 사우디 국영석유업체 아람코가 전면적 확장에 나선 상태다. 아람코는 기업 비전부터 글로벌 선두 에너지-화학기업으로 설정하고 세계 곳곳에서 단독 및 조이트벤처(JV) 투자, M&A 등 모든 영역에서 공격적인 육성과 확장을 진행하고 있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상반기 정유·석화업계는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수요 감소로 불황을 겪고 있다"며 "혼자만으로는 예측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외부 요인을 대처할 수 없기 때문에 기업 안팎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외부 기술과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을 추진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고 판단했다.
석화업계 한 관계자는 "정유사의 원료, 화학업체의 기술과 영업력이 시너지를 창출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며 "과거에는 버리던 잔사유 등을 기술 공정을 통해 화학제품으로 생산할 정도로 기술력도 개선된 만큼 정유와 화학의 동맹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