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국세청 압박 속 공개 입장문에 설왕설래갈등 봉합보다 창업주 실권 재확인 장면으로 해석핵심 계열사 DB하이텍 놓고 부자간 의견차 컸던 듯지배구조가 기업가치 흔드는 후진적 지배구조 입도마집안싸움에 주주들 부글부글 … 주총 앞두고 아슬아슬
  • ▲ 김준기 DB그룹 창업회장(왼쪽)과 아들인 김남호 DB그룹 명예회장ⓒDB그룹
    ▲ 김준기 DB그룹 창업회장(왼쪽)과 아들인 김남호 DB그룹 명예회장ⓒDB그룹
    DB그룹이 다시 오너 리스크의 중심에 섰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김준기 창업회장을 지정자료 허위 제출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고, 핵심 제조 계열사인 DB하이텍은 세무조사와 주주총회 압박을 동시에 받고 있다. 주력 금융 계열사인 DB손해보험은 약2조3000억원 규모의 미국 특화보험사 포테그라에 대한 인수 승인 심사를 진행 중이다. 이처럼 규제·세무·주총 리스크가 한꺼번에 겹친 국면에서 시장이 본 것은 투자 계획도, 지배구조 개선안도 아니었다. 지난 9일 김남호 명예회장이 내놓은 "부친에 맞설 생각이 없다"는 공개 입장문이었다.

    문제는 이 문건이 갈등을 잠재우기보다 오히려 DB그룹의 실권 구조를 다시 드러냈다는 점이다. 김 명예회장은 입장문에서 "회사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한 것은 모두 제 탓"이라며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했다. 부자 갈등설 차단이 목적이었겠지만,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해명문이라기보다 반성문처럼 읽힌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상장사가 주총을 앞두고 시장에 설명한 것이 실적과 전략이 아니라 오너가 내부 질서였기 때문이다.

    DB그룹의 부자 갈등을 놓고 일부에서는 효성와 콜마그룹을 얼룩지게 만들었던 부자의 난을 떠올리기도 한다. 경영권 승계와 사업 분할 과정에서 두 그룹이 통째로 흔들렸던 것처럼, 김남호 명예회장의 난데 없는 반성문이 역설적이게도, 절대적인 오너십을 지켜왔던 김준기 창업회장과 금융을 중심으로 홀로서기를 시도한 아들 김남호 명예 회장간에 '부자의 난'을 암시하는 전조가 아니냐는 것이다. 

    ◇금융 중심 홀로서기하려던 아들, 아버지가 실망한 이유는 

    이번 입장문이 단순한 해명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는 지난해 인사에서 이미 전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DB그룹은 지난해 6월 김남호 회장을 명예회장으로 물리고, 이수광 전 DB손해보험 사장을 그룹 회장에 앉혔다. 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라고 설명했지만, 재계에서는 이를 사실상 5년 만의 2세 경영체제 종료로 받아들였다. 겉으로는 오너 2세가 전면에 서 있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창업주 중심 체제로 되돌아간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이어졌다.

    지분 구조를 봐도 김남호 명예회장이 독자적으로 판을 주도하기는 쉽지 않다. DB손해보험 기준으로 김남호 명예회장은 9.01%로 개인 기준 최대주주지만, 김준기 창업회장 5.94%, 김주원 부회장 3.15%, DB김준기문화재단 5%를 합치면 김 명예회장 지분을 넘어선다. 장남이 개인 기준 1대 주주라 해도, 우호 지분과 그룹 내 영향력까지 감안하면 독자 경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구조와는 거리가 있다. 재계 안팎에서 이번 입장문을 두고 “맞설 생각이 없다”기보다 “맞서서 이기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DB그룹을 오래 지켜본 재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김준기 창업회장이 공식 직함과 무관하게 여전히 그룹 전반의 방향을 좌우하고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수광 회장 체제 역시 독립적 전문경영인 체제라기보다 창업주 의중을 집행하는 관리형 체제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경우 김남호 명예회장의 공개 입장문은 화해 제스처가 아니라 창업주 중심 질서에 대한 재확인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왜 하필 지금 반성문이 나왔나

    핵심은 시점이다. 공정위 검찰 고발, DB하이텍 세무조사, DB손보 포테그라 심사, DB손보와 DB하이텍 주총이 줄줄이 이어지는 민감한 국면에 갑자기 입장문이 등장했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주총을 앞둔 위기관리 성격이 짙다는 해석이 나온다. 오너가 갈등설까지 확산할 경우 규제 리스크와 투자자 불신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만큼, 김남호 명예회장이 공개적으로 ‘충성’ 메시지를 내며 불확실성을 먼저 끄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오히려 다른 질문을 낳았다. 상장사가 왜 주주 앞에서 집안 문제부터 해명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DB하이텍과 DB손보는 지금 실적 부진으로 흔들리는 회사가 아니다. 

    DB하이텍은 지난해 매출 1조3972억원, 영업이익 2773억원으로 각각 전년 대비 24%, 45%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20%대를 기록했다. DB손보 역시 최근 3년 연속 1조5000억원을 웃도는 순이익을 내며 그룹의 현금창출원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시장이 이들 회사를 실적이 아니라 오너 리스크로 다시 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번 입장문은 위기 진화보다 신뢰 훼손 효과가 더 컸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재계에서는 김준기 창업회장과 김남호 명예회장 사이 갈등의 핵심 축 중 하나로 DB하이텍 처리 방향을 꼽는다. 김 명예회장 쪽은 금융 중심 재편이나 DB하이텍 매각 검토에 무게를 뒀고, 김 창업회장은 반도체 사업 유지를 고수했다는 것이다. 창업회장 입장에서는 사재까지 넣어 키운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는 것이 자신의 경영 철학을 부정하는 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반대로 김 명예회장 쪽에서는 자금력이 열위인 DB가 장기적으로 반도체와 금융을 동시에 끌고 가기 어렵다는 현실론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목은 최근 권력구도 변화와 오너가 불화설을 설명하는 중요한 배경으로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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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가는 흔들리고 주총은 격전지로

    시장 충격은 이미 주가에 반영되고 있다. DB하이텍은 올해 2월 고점 대비 주가가 20%대 밀린 것으로 평가된다. AI 반도체와 전력반도체 기대를 업고 상승하던 종목이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오너 리스크, 세무 이슈, 지배구조 논란에 발목을 잡힌 셈이다. 실적만 놓고 보면 재평가를 받을 만한 회사가 오너 리스크로 할인받는 전형적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이번 주총은 그 불만이 표 대결로 드러나는 무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DB하이텍에서는 소액주주 측의 이사회 진입 시도와 함께 내부거래위원회, 공정거래 관련 조사기구 신설 요구가 나오고 있다. DB손보도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가 감사위원 선임과 내부거래위원회 재설치 등을 요구하며 공개 압박에 나섰다. 얼라인은 2018년부터 2025년 3분기까지 DB그룹 금융계열사가 DB Inc와 DB FIS에 지급한 내부거래 대금과 상표권 사용료 규모를 문제 삼고 있다. 금융 계열사에서 창출된 이익이 지배구조 유지와 비금융 계열 지원에 활용된 것 아니냐는 의심이 커진 것이다.

    DB손보 이사회 구조 역시 논란의 중심이다. 김정남 부회장이 장기간 이사회 핵심으로 남아 있고, 사외이사 반대 사례가 사실상 없었다는 점에서 금융당국도 이미 사외이사 역할 미흡을 지적한 바 있다. 신뢰와 내부통제가 핵심인 보험회사가 2조3000억원대 해외 인수를 추진하면서도 견제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면, 이는 단순한 이미지 문제가 아니라 직접적인 할인 요인이다.

    특히 이번 사안의 본질은 단순한 집안싸움이 아니다. 상장사는 특정 오너 일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다. 보험과 반도체를 함께 거느린 DB 같은 그룹은 이해상충, 자본배분, 내부통제, 승계 구조를 누구보다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DB가 시장에 내놓은 첫 장면은 성장 전략이 아니라 오너가 질서 정리였다. 그 결과 주가는 갈 길을 잃었고, 주주는 분노하고 있으며, 주총은 경영 정당성을 검증하는 자리가 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입장문은 갈등 해소문이라기보다 김준기 회장은 여전히 실권자이고, 김남호 명예회장은 독자 체제를 꾸릴 힘이 없다는 인식을 더 굳히는 문서에 가깝다”며 “기업의 미래를 설명해야 할 자리에 오너가 권력관계가 먼저 올라온다면, 시장이 그 회사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