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高校교과서, 실패한 北토지개혁 성공한 것처럼 서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분석/北 토지개혁, 개인의 소유권 인적한 적 없어
    金泌材   
     
     올해 새로 발간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남북한의 토지개혁 문제와 관련해 실패한 북한의 토지개혁을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반면 성공적인 남한의 토지개혁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부정적인 논조를 취하고 있다.
     
     6종 교과서 모두 북한의 토지개혁을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실시해 농민에게 유리한 개혁이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교과서 집필자 자신이 토지사유제를 부정하는 북한식의 사회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결과적으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1946년에 남한보다 한발 앞서 실시한 북한의 토지개혁은 근본적으로 토지에 대한 농민 개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즉 토지를 국가나 협동조합의 소유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사적 재산권을 인정하는 남한의 개혁과 그것을 처음부터 부인한 북한의 개혁을 평면적으로 비교해, 마치 북한의 개혁이 농민들에게 더욱 유리한 것이었다는 식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다.
     
     고교 교과서에 실린 남북한의 토지개혁 문제와 관련된 구체적인 서술은 아래와 같다.
     
     ▲“미군정은 쌀 공출제를 폐지하여 곡물의 자유 시장제를 실시하고, 소작료를 3분의 1로 낮춘 3.1제를 채택하여 농민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정책은 토지개혁, 소작료 추가 인하와 금납제 등을 바라는 농민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중략) 38도선 이북에서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전신이었던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광복 당시 남북에서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였던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상 몰수, 무상 분배의 토지개혁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천재교육, 314페이지>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 개혁이 단행되자 미군정도 농지 개혁 관련법을 제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 민주당과 지주층이 반발하여 전면적인 농지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일본인이 남기고 간 귀속 농지에 한하여 원래의 소작 농민에게 매각하는 방식을 취하였다…….(중략) (남한의) 농지개혁은 농민들의 토지 소유 욕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 주었다. 그러나 법이 시행되기 전에 지주가 미리 땅을 팔아치운 경우도 있어 농지 개혁 대상 토지가 줄기도 하였다.” <비상교육, 318~319페이지>
     
     ▲“북한에서 1946년 3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자, (남한의) 농민들은 북한과 같은 토지 개혁을 요구하였다. 미군정은 토지 개혁 요구를 외면할 수 없게 되자 입법을 서둘렀으나, 지주층의 반발로 실시하지 못하였다. 미군정청은 결국 1948년 총선거를 앞두고 신한공사를 해체하고 귀속 농지 분배를 실시하였다.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1946년 3월 토지개혁법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38선 북측 지역에 자신들의 안정된 정권과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일본 정부 및 일본인, 친일파,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소작농에게 분배한 결과, 이후 농가는 평균 약 16,137㎡ 정도의 농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농지를 보유한 농민들은 수확량의 30%를 현물세로 내었다.” <(주)삼화출판사 315페이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조선 총독부 및 일본인의 소유지, 친일 민족 반역자와 지주의 소유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다…….(중략) 몰수한 토지는 경작자에게 준다는 원칙에 따라 농업 노동자, 소작농, 소지주에게 가족 수와 노동력에 따라 점수를 매겨 나누어 주었다.” <(주) 미래엔컬쳐그룹, 341페이지>
     
     ▲“북한의 토지개혁은 국가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영세농민에게 무상 분배하는 방식이었다. 많은 지주들이 토지는 물론 가축과 주택 등도 빼앗기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토지는 농민에게 가족의 노동력에 비례하여 분배되었다. 분배된 토지는 매매․대차․저당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농민은 경작권만 갖는 셈이었다…….(중략) 북한의 토지개혁은 지주 제도를 철폐함으로써 농촌 사회의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농민이 국가의 땅을 경작하는 셈이었기 때문에 근로 의욕의 감퇴를 가져왔다.” <(주)지학사, 272페이지 ‘도움자료’>
     
     ▲“1946년에 북한에서 토지 개혁이 실시됨에 따라 남한에서도 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중략) 농지개혁의 결과 지주 중심의 토지 소유가 폐지되었으며, 농민들은 소작농에서 벗어나 자기 농토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분배받은 토지의 가격은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 갚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농민들이 분배받은 농지를 다시 팔고 소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중략)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이른바 ‘민주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친일파를 숙청하였으며, 주요산업을 국유화하고 8시간 노동제를 규정한 노동법과 남녀평등법 등을 제정하였다. 또, 5정보를 상한으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대지주의 땅을 몰수하여 농님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 개혁을 실시하였다.”<법문사, 317~318페이지>
     
     [1] 김일성의 실패한 토지개혁
     
     1946년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건설하겠다는 스탈린의 계획이 발표되면서 북한은 급속도로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에 편입됐다. 1946년 2월 북한 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되면서 소련군 점령사령부는 가장 먼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같은 해 3월5일에는 토지개혁법이 공포되어 사원을 비롯한 개인소유의 농지를 모두 몰수해 과도적 조치에 따라 무상으로 소작인들에게 분배했다. 이러한 북한의 토지개혁은 김일성이 소련 점령군의 무장군인을 앞세워 불과 20일 만에 이뤄졌다.
     
     당시 김일성의 명의로 발표된 토지개혁법령의 기본내용은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와 5정보 이상 소유한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몰수하고 소작제를 철폐한 뒤, 몰수된 토지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여(分與)하는 것이었다. 명목상으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토지개혁의 기본원칙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김일성의 일인독재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당대 북한의 소설가였던 이기영(李箕永)은 단편소설 ‘개벽’(1946)과 장편소설 ‘땅’(1949)을 통해 일제시기 땅이 없어 고생하던 북한의 농민들이 토지개혁법령을 통해 땅을 분배받고 자기 땅에서 농사짓게 된 기쁨과 그들의 삶을 소개했다.
     
     그러나 1946년 토지개혁법령에 의해 실시되었던 북한에서의 토지의 개인소유화는 1954년부터 시작되어 1958년에 끝마친 농업협동화의 실현과 함께 종결되고 말았다.
     
     개인 소유 땅은 없어지고 농민들은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인부 신분으로 전락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농업 생산력 저하가 말해주듯이 북한도 명분은 공동소유 이었으나 철저하게 관료 중심으로 이익이 분배됐다.
     
     토지개혁 법령 5조에 밝혔던 ‘무상 분배한 땅을 영원히 농민의 소유로 한다’는 김일성의 약속은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으로 끝났다. 자기 땅에서 마음껏 농사를 짓는 꿈이 이루어졌다던 북한 농민들의 소박한 기쁨도 영원히 끝나버리고 말았다. 1958년부터 오늘까지 반세기가 넘는 동안 북한에서 주장하는 중앙집권제원칙에 기초해 실시되고 있는 농업협동화방침의 그릇됨은 오늘날 북한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통해 재론의 여지없이 실패로 귀결됐다.
     
     농민들은 수익 창출이 없는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집 둘레에 있는 개인경작지나 산이나 등지에 만든 개간지를 통한 식량 해결에 나서고 있다. 실제 개인 경작지의 생산성은 협동농장의 몇 배에 달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땀을 흘린 만큼 노력의 대가를 보상해주는 소토지에는 온갖 정성을 쏟아 붓지만 아무리 일해도 빈궁만 차려지는 농장일은 하는 둥 마는 둥 시간만 채우면서 요령껏 일하는 시늉만 한다.
     
     ‘고난의 행군’을 기점으로 해 시작된 이 ‘개인 소토지’문제로 북한 정부는 단속 기관들을 동원해 끊임없이 통제에 나서고 있지만 주민들의 땅에 대한 집착은 더 증가되고 있다. 북한 당국이 식량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땅을 농민에게 돌려주면 된다.
     
     토지의 개인소유화를 장려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 대책이며 최고의 정책이라는 점을 북한 당국자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정책을 보류하고 있을 뿐이다.
     
     [2] 이승만의 성공한 토지개혁
     
     토지개혁은 이승만의 사회개혁 프로젝트 가운데 매우 구체적이고도 가시적인 사안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한국사회의 탈농-상공업화를 주장했다. 보다 직접적으로 ‘일제에 의해 몰수된 모든 토지를 소농에게 분배할 것’과 ‘대지주제를 혁파해 소농체제로 개편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R.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pp. 365-367 인용)
     
     이승만은 농지개혁이라는 역사적 과업에 필생에 걸친 자신의 사상을 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존의 지주제 해체가 사회경제적 평등화에 기여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볼 때 지주제 몰락이나 평등주의 실현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는 농지개혁을 통해 사회경제적 평등을 신장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자본주의 산업화를 위한 조건이나 계기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농지뿐만 아니라 토지 이용 전반에 걸쳐 경제적 합리성을 강조했다. 그는 토지절약을 위해 “국민이 싫어하더라도 아파트를 많이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토지소유자가 국가적 차원의 개발을 어렵게 할 경우 “국가가 할 수 있는 법이 개발을 보장하고 또 토지문제는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1991년 1월26일자 인용)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승만의 입장은 좌익계 정치집단과도 달랐고, 지주제를 배경으로 한민당과도 같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은 5.10총선거를 앞두고 미군정 당국이 1948년 봄에 일방적으로 강행했던 귀속농지(歸屬農地) 불하(拂下)결정에 대해 대단히 불만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평등주의와 산업주의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쫓던 이승만의 생각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귀속농지 불하결정이 내려진 직후 이승만은 올리버(R. Oliver)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가 집권하게 되면 한국의 신생정부가 파시스트적, 반동적, 극우적일 것이라고 지껄이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조국을 자유화하는지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착수하게 될 것은 바로 토지개혁”이라고 했다. (R. Oliver, Syngma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pp. 152-153 인용)
     
     그러면서 그는 “미군정 당국이 한국 국회의 동의 없이 귀속농지를 처분할 권리가 없는데다가, 총선거를 불과 6주 앞둔 시점에서 이를 급하게 서두르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여기서 이승만이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자유화’의 구체적인 의미와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평등주의와 산업주의의 병행 추진이라는 이승만의 평소 지론을 감안할 경우 그는 토지개혁에 관해 자신만의 심산(心算)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이승만은 귀속농지(歸屬農地)를 국가주도 산업화를 위한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또 일반농지에 대한 토지개혁 역시 지주들에 대한 확실한 전업대책을 마련함으로써 산업자본가 형성에 보다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시키려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이승만의 구상이 현실화됐다면 농지개혁의 전 과정이 일제가 남긴 산업생산 및 기술수준과 결합되어 한국의 국가주도 자본주의 산업화가 정부수립과 함께 곧바로 시행됐을 것이다.
     
     농지개혁에 관한 이승만의 초기구상은 차질을 빚었다. 미국이 군정 말기에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속농지 분배를 일방적으로 단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 자체는 본격적이고도 전면적인 토지개혁의 예고편이 되었고, 이승만도 정부 수립 직후 농지개혁에 착수했다. 그가 당시 지주 계급을 배경으로 하고 있던 여당, 곧 한민당의 입장을 극복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한 것은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6.25전쟁 발발 후 일시 중단되었다가 1951년 4월 ‘농지개혁법 시행규정’을 통해 재개되어 남한 전역에 실시됐다. 그 결과 총경지의 약 40%에 달하는 89만2천 정보의 땅이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재분배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실현한 농지개혁에 대해서는 삼림과 임야 등 비경지(非耕地)가 제외되고 농지만을 대상으로 한 문자 그대로의 ‘농지개혁’으로서 1946년3월에 북한에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원칙하에 실시된 토지개혁에 비해 농민에게 불리한 것이었다는 등의 비판이 있지만 이 개혁은 한국 역사상 여러 모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인 유영익(柳永益) 연대 명예교수는 李대통령의 토지개혁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첫째, 농지개혁은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사상 중요한 의의가 있다. ▲둘째, 이 개혁은 한국의 전통사회를 지배했던 양반지배층의 몰락을 초래하며 지주배경의 한국민주당 세력을 약화시키는 사회․정치적 효과를 유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셋째, 6.25 발발직전에 개시되어 전쟁 중에 완료된 이 개혁은 전쟁기간 남한 농민들이 북한군에 호응하는 것과 같은 내부동요를 예방하고 궁극적으로 남한의 공산화를 막는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유영익 교수는 “한마디로, 이승만 대통령 통치하에서 완결된 농지개혁은 조선왕조 건국기에 이성계(李成桂)가 단행했던 과전법(科田法) 이래 최대의 토지개혁으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