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18> 집들이


    다음날 저녁. 이젠 신앙처럼 굳어져 좀처럼 깨트리기 쉽지 않은 관념의 파편인 화장지와 세제. 그것들을 하나씩 나눠 들고 정원과 재국은 분당의 한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피스텔은 지하철역에서 대략 2분 거리로 강남과 잠실 고속화도로가 연결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백화점과 극장, 병원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고리에 낀 가죽벨트처럼 흐트러짐 없이 곧장 원형의 복도를 감고 돌았다.

    “와서 보니까 주변 경관이 훌륭한데. 산책하기도 좋고.”
    “그러게요. 실내 인테리어까지 최고급 호텔급인데요.”
    “딩동! 딩동! 딩동!”
    “유진 씨, 우리 왔어.”
    “재국 선배?”
    “응. 왜?”
    “저, 팀장님은 오셨어요?”
    “당연히 같이 오셨지. 설마 내가 유진이의 기대를 저버렸을까 봐? 솔직히 나를 함께 부른 목적도 바로 그거잖아. 주요 인물 포섭. 아니야?”
    “죄송해요. 그걸 어떻게?”
    “후후후, 나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어. 내 별명이 달리 동경이겠어.”
    “아, 맞다! 잠깐만요. 지금 집 안이 엉망이라 대충 정리 좀 하고요.”
    “알았어. 정리하고 천천히 나와. 팀장님도 느끼셨죠?”
    “뭘?”
    “평소와 달리 유진이의 흥분한 목소리 말입니다. 아마 지금쯤 유진이의 얼굴은 발그레 상기됐을 걸요. 쿠쿠쿠.”
    “…….”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조바심이 생긴 재국이 다시금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현관문 바로 뒤의 전실에서 유진의 작은 기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바로 도어록의 차단기능이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열리던 문이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재국이 밀어봤지만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마찬가지였다.
    “죄송해요. 두 분 많이 기다리셨죠?”
    “허기가 져서 지금 막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정말요?”
    “하하하, 농담이야. 총각이 금남의 집을 구경하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인가.”
    “근데 계속 밖에 이러고 서 있어야 돼?”
    “그게 저…….”
    “왜? 안에 다른 손님이라도 있어?”
    “유진 씨, 너무 신경 쓰지 마. 다른 손님이 있으면 다음에 올게.”
    “아, 아니에요. 팀장님. 다른 손님 없어요.”
    “그럼?”
    “팀장님이 이상하다고 비웃을까 봐요.”
    유진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곤 새침한 표정으로 그림자처럼 슬금슬금 문 뒤로 숨어들었다.

    이어 현관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전실의 온화한 분위기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현관문이 1/3쯤 열리자 유진은 뭐가 두려운지 다시 한 번 문고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정원의 부드러운 눈빛이 쉽게 녹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정원과 재국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 유진이 그림처럼 수채화의 느낌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나! 이런 반전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면 현실 아닌가. 그런데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 팀장님은 어때요?”
    “훌륭해. 갑자기 내 인생의 목적이 변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

    정원과 재국은 무언가에 홀린 듯 놀란 토끼눈을 했다. 잠시 후 두 사람에게서 집들이 선물을 건네받은 유진이 앞장서 실내로 들어갔다. 정원과 재국은 유진이 입고 있는 의상보다 더 환한 미소에 취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실의 테이블에는 앞으로 나올 요리를 짐작케 하는 식탁보가 깔려 있었다. 식탁은 푸드스타일리스트가 한 것처럼 세련되게 세팅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투명한 유리병에 꽃도 몇 송이 꽂혀 있었다.
    “와, 냄새 죽인다!”
    “재국 선배. 왜요, 제가 만들었다는 게 안 믿겨져요?”
    “당연하지. 유진이에게 이런 엄청난 셰프의 피가 흐른다는 걸 누가 감히 짐작이나 하겠어. 안 그렇습니까, 팀장님?”
    “맞아.”
    “훗! 사실은 저희 엄마가 레스토랑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틈틈이 어깨너머로 배웠어요.”
    이어 쌀을 볶아 야채를 넣고 끓인 리조또가 메인디시에 앞서 프리모 피아또(Primo Piatto·첫 번째 접시라는 뜻)로 나왔다. 흐린 날이 많은 서양에서 와인은 태양을 대신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와인이 빠진 식탁은 태양이 없는 세상과 같다. 때문에 서양인의 식탁에서 와인이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 그 와인을 마실 시간조차 주지 않고 유진은 계속해서 세컨도 피아또(주요리)를 가져왔다. 메인디시는 송아지고기를 이용한 밀라노풍 커틀릿이 나왔다. 그런데 프랑스요리처럼 복잡한 소스를 사용하지 않아 고기의 고유한 맛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정말 총각들에게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행복한 날이었다.

    “유진 씨, 또 가져와?”
    “재국 선배가 기다리던 진짜 메인은 바로 이거 아니었어요?”
    “아, 술! 그래 맞다. 그 어떤 맛난 음식보다도 최고의 보약이지!”
    “유진 씨, 정말 행복한 저녁식사였어.”
    “잘 드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음, 뭐랄까. 유진이의 요리는 모차르트의 음악과 같다고나 할까.”
    “모짜르트의 음악요?”
    “응. 혀에서 시간을 초월하는 감동과 환상이 느껴졌거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경험한 완벽한 저녁식사이었던 것 같아.”
    “하여간 재국 선배의 저 능청.”

    “그나저나 팀장님, 아까 엄 처장님이 말씀하신 키스(KISS) 말입니다. 그곳이 그렇게 대단한 곳입니까? 아무리 사방으로 촉수를 뻗어도 키스(KISS)에 대한 정보는 도통 긁어모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국가비밀국은 우리 국정원과 달리 탄생 배경부터가 미스터리야. 거기다 설립 이후 단 한 차례도 외부에 노출된 적이 없어. 그야말로 국가를 운영하는 최고위층만 아는 비공개된 공식조직이지. 아마 우리 국정원 내에서도 국가비밀국의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거야.”
    “한마디로 국가비밀국의 존재 자체가 1급 기밀사항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래도 우리 팀장님은 사자의 가슴과 여우의 머리, 거기다 독수리의 눈까지 가지셨잖습니까?”
    “재국 선배, 하나 빼먹었어요.”
    “뭘?”
    “이따금 팀원들을 감동시키는 따뜻한 피.”
    “피?”
    “예. 그걸 달리 표현하면 의지와 소신, 그리고 열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
    “이거 눈치를 보아하니 어째 제주도에서 둘만 아는 아주 로맨틱한 추억이 만들어진 것 같은데, 내 말이 맞지?”
    “재국 선배, 이제 비밀공작의 전모를 밝히시죠. 전체 기획은 재국 선배가 했다면서요?”
    “헐! 그럼 팀장님이 벌써?”
    “! 그래요.”
    “아! 이제 알겠다. 오늘 이 술자리를 마련한 이유 말이야. 그러니까 집들이는 핑계고 사실은 브러쉬 컨택트(Brush Contact·순간접선)를 가능하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구나?”
    “! 맞아요. 그러니까 실컷 마셔요.”
    “오케이!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마신다.”
    “제가 모범택시까지는 불러드릴 수 있어요.”

    “내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메인업무는 정보수집이 아닌 철저한 커버트액션(Covert Action·비밀공작)이야.”
    “커버트액션이라면 표적국가의 정치·경제구조를 교란할 목적으로 표적국가의 정치·경제변화를 교묘히 유도하는 고도의 심리공작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직까지 ‘헤드쿼터(HQ·Head-quarter·본부)’의 소재지는 물론이고, 그 인적 구성조차 전혀 외부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거야. 물론 키스(KISS)라는 은어를 만든 것 역시도 ‘아이(I·Intelligence)’, 그러니까 정보수집기능을 첨가해 주변국들을 교란하기 위한 목적이란 소리가 있어. 그야말로 베일에 가려진 조직이야. 심지어 비밀요원은 국가의 공식기록 그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한다더군. 그야말로 신비로운 조직이라고나 할까.”
    “헐! 팀장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피부로 느껴지는 키스(KISS)가 더욱더 무서운데요.”

    “자, 자. 두 분 그만하시고. 혹시 들으셨어요?”
    “유진 씨, 뭘?”
    “최근 한 달 동안 국내의 주요 포털업체와 금융기관, 그리고 국세청과 백신업체의 PC 423대에 외국으로부터의 해킹 시도가 있었답니다.”
    “난 처음 듣는데?”
    “동시다발적인 디도스(DDoS·Distributed Denial of Service·분산서비스거부)공격인가?”
    “그렇습니다. 해커가 서비스 공격을 위한 도구들을 여러 컴퓨터에 심어놓고 목표사이트의 컴퓨터 시스템이 처리할 수 없는 엄청난 분량의 패킷(Packet·소포)을 동시에 범람시켜 사이트를 마비시켰답니다.”
    “공격이 시작된 진원지는?”
    “말레이시아·필리핀·미얀마·캄보디아 등 제3세계의 해커들을 중국 동북3성의 수도인 요녕성(遼寧省) 심양시(瀋陽市)에서 통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심양! 거긴 대남선전 인터넷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조선6·15심양봉사소가 있는 곳이잖아.”
    “특별작전행동소조로 알려진 북한 해커들 말씀이군요. 그 부분은 아직까지 확인된 게 없습니다.”
    “그럼 누가?”
    “드러난 해커조직은 심양대학교의 대학생들이었답니다. 그런데 말이 대학생 해커조직이지 실제는 서버를 무려 10개씩이나 돌리는 전문적인 기업형 디도스 공격조였답니다.”
    “피해 정도는?”
    “다행히 인터넷침해대응센터의 신속하고 적절한 대응조치로 뚫리지는 않았답니다. 일부 주요 사이트가 접속장애를 일으키긴 했지만요. 하지만 인터넷 쇼핑몰은 접속장애로 인해 피해 정도가 심각합니다. 듣기론 피해 추정치가 최대 2백억 원에 이른다고 하던데요. 팀장님,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유진 씨, 뭐가?”
    “일반적인 디도스 공격의 경우, 첫 번째 타깃으로 청와대와 국회 등 정부기관을 선택하지 않나요? 그런데 이번엔 공격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그게 의미하는 게 과연 뭘까요?”
    “그거야 쉽네.”
    “재국 선배, 쉽다고요?”
    “그래. 아까 주요 포털업체와 금융기관은 공격대상에 포함됐다고 유진이가 분명히 말했잖아.”
    “그랬죠.”
    “그렇다면 답은 털어서 돈이 나올 만한 곳만 공격대상으로 삼은 거야. 아주 영악한 놈들이네. 주요 포털업체와 금융기관, 그리고 국세청과 백신업체. 모두 돈과 관련돼 있잖아.”
    “흠! 심양이라…….”
    “아참! 팀장님, 북한이 특별작전행동소조라고 부르는 사이버 전담부대의 해킹실력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얼핏 듣기로는 북한의 최정예 해커요원들이 이미 남한 내 주요 기관의 전산망 장악을 모두 끝낸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서 말입니다.”
    “현재 북한의 해킹능력은 이미 CIA 수준에 버금갈 정도야. 그리고 그 가공할 해킹능력은 컴퓨터 운영체계의 기초언어인 ‘C(컴퓨터식 언어)’의 완벽한 분석에서 나오고 있고.”

    다시 세 사람은 함께 마차를 타고 소풍을 나온 기분으로 보리밭을 누볐다. 그때 ‘찰칵’ 하고 카드키가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실내에서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누군가 현관문을 거칠게 밖으로 잡아당겼다. 순간 외부세계와의 단절을 통해 아늑함을 제공하던 의식의 벽이 세로로 쩍! 하고 갈라졌다. 동시에 그 틈으로 유령처럼 복도를 떠돌던 공허한 빛줄기가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현관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문틈으로 자라처럼 고개를 빠끔히 들이밀고 실내를 살핀 사람은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중년여성이었다.

    “엄마!”
    “요런 앙큼한 것 같으니라고. 너 내가 오늘 오후에 전화를 몇 번이나 한 줄 알아? 그런데 한 번도 안 받아. 집에서 이렇게 너 혼자 꾸미고 있으면 누가 보지도 않고 데려간대?”
    “미안해. 회사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사정! 그래, 좋다! 오늘은 그 이야기나 한번 좀 들어보자. 무슨 회사가 도둑놈 소굴도 아니고, 숨기는 것도 많고 뻑 하면 여직원을 오밤중까지 잡아두지를 않나. 거기다가 맞선 볼 때마다 생기는 그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무튼 그 회사 사정이 뭔지 어서 말해봐?”
    “그건, 회사기밀이라서 좀 곤란해.”
    “뭐가 곤란한데. 혹시 너네 회사 순진한 사람들 등이나 치는 피라미드 아니야?”
    “아니야! 피라미드는 무슨 피라미드. 내가 그렇게 헐렁하게 보여?”
    “그럼 네가 신부수업이나 하는 다른 여자애들처럼 조신하냐?”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피리미드는 아니니까 안심해.”
    “도대체 오늘은 왜 약속장소에 안 나온 거야? 네가 안 나오는 바람에 내가 또 얼마나 난처한 상황에 처했는지 알아?”
    “알아.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빌잖아. 엄마, 정말 미안해.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하자. 응?”
    “너 정말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 다니며 계속 엄마 속 썩일 거야? 너 때문에 지금 내 속이 얼마나 탔는지 알아? 보여줄까? 킁! 킁!”
    “!”
    “그런데 너 혹시 술 마셨니?”
    “! 아주 조~금.”
    “헐~! 하는 짓 하고는. 정작 술 마셔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바로 나다!”

    유진의 어머니는 시종일관 빚을 청산하러 온 고리대금업자처럼 언성부터 높였다. 그리고 유진은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처럼 쩔쩔매기만 했다. 평소의 야무지고 당찬 유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무튼 유진의 어머니는 극도의 흥분상태로 인해 아직까지 정원과 재국을 발견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유진의 어머니는 삭이지 못한 분노가 폭발하려는지 눈가 언저리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잘 참아내던 유진도 더는 참기 힘들었는지 마침내 히든카드를 꺼내들었다.

    “엄마, 지금 거실에 회사분들 와 계시잖아. 안 보여?”
    “손님! 어디?”
    “내가 창피해서 정말.”
    “내가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그만. 그럼, 너라도 얼른 말을 했어야지.”
    “엄마가 언제 말할 시간이나 줬어?”
    “얘가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손님들 앞에서 수준 떨어져 보이게.”
    “헐~! 세상에. 이미 회. 복. 불. 능이거든요.”
    “이거 어쩌나 실례를 해서. 아무튼 소란을 피워서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유진 씨 어머님. 괜찮습니다.”
    “유진아, 손님들 소개시켜줘야지?”
    “오른쪽 분은 최 팀장님이시고, 왼쪽 분은 재국 선배님이셔.”
    “오늘 집들이를 한다고 해서 금남의 집에 이렇게 방문을 했습니다.”
    “아, 예. 최 팀장님에 관한 이야기는 유진이를 통해 많이 들었어요. 전 유진이 엄마 홍다연입니다. 그런데 직접 보니까 전해들은 것보다 훨씬 더 멋있고 잘 생기셨네요. 키도 훤칠하니…….”
    “아이 참! 엄마는 팀장님 무안하게.”
    “에~휴 그럼 뭐하나, 그림에 떡인걸. 이 바보야! 이렇게 멋있는 총각들이 그것도 한 사무실에 두 명이나 있었어? 그럼 누가 채 가기 전에 먼저 확 잡았어야지. 넌 여태 뭐하고 있었어?”
    “엄마는 회사가 무슨 연애하는 곳인 줄 알아. 그리고 그게 어디…….”
    “하긴, 영악한 요즘 여자애들이 이렇게 잘생긴 총각들을 그대로 놔둘 리가 없지. 그리고 어느 모자란 남자가 선머슴아 같은 너를 좋아하겠냐?”
    “아, 아닙니다. 어머님, 제 눈엔 너무나 완벽합니다. 유진 씨처럼 아름답고 강한 여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
    “완벽? 이게 무슨 소리냐. 유진아? 살다보니까 너를 칭찬하는 사람도 다 있다.”
    “팀장님, 잠깐만요?”
    “왜, 재국 씨?”
    “지금 이게 몇 개로 보이세요?”
    “갑자기 그건 왜?”
    “글쎄요?”
    “다섯 개.”
    “그럼 맞는데. 하여간 분위기도 그렇고 술도 오르고,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팀장님의 말씀은 무를 수 없는 일수불퇴라는 거 아시죠?”
    “물론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나중을 생각하신다면 속도조절을 조금 하시라고요.”
    “알았어. 보다 신중할게”
    “유진아, 소개팅 나가라고 자꾸 보채서 지금 손님들과 짜고선 엄마를 놀리는 건 아니지?”
    “아니야.”
    “어머님, 창피한 이야기지만 지금까지 제 마음 속에 들어와 러브스위치를 누른 사람은 유진 씨가 유일합니다. 제 선택이 최선임을 저는 아까 확인했습니다. 유진 씨와 앞으로 멋진 사랑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히~유! 결국 이렇게 터지고 말 것을, 내가 괜히……. 쩝! 이거 나만 나쁜 놈 됐잖아.”
    “팀장~님.”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지? 이게 꿈이냐 생시냐? 내 팔 좀 한 번 꼬집어 봐.”
    “정말?”
    “아야! 살살해야지. 아프잖아. 정말 선머슴아 같은 우리 유진이가 좋아요?”
    “물론입니다. 유진 씨의 미소는 제게 있어 행복바이러스입니다.”
    “술 깬 다음에 지금 한 말 기억 못하는 거 아니죠?”
    “치! 엄마는 좋아한다고 해도 걱정이야.”
    “넌 가만히 좀 있어봐.”
    “물론입니다.”
    “어쩜, 부모님이 자제분을 이렇게 훌륭하게 키우셨을까. 아, 그렇지! 뭐든 말해요. 부족하면 내가 다 해줄게요. 술? 안주? 아니면 지금 우리 가게로 갈까요?”
    “예?”

    이제 홍다연은 현관 입구에서 저기압을 형성해 천둥번개를 내리치던 모습이 아니었다. 물론 실내 분위기도 급반전됐다. 가장 큰 변화는 홍다연의 얼굴에서 이루어졌다. 정원의 말 한마디에 금방 얼굴에서 먹구름이 물러가고 화창한 고기압이 형성된 것이다. 그것도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오후 같은 얼굴이었다. 홍다연의 입꼬리에는 솜털 같은 맑은 구름이 흐뭇하게 걸쳐 있었다.

    “엄마, 오늘 정말 장사 안 할 거야?”
    “장사? 아, 그렇지.”
    “안 되겠어. 여기 더 있으면 정말 정신줄을 놓으실 것 같으니까, 얼른 가서 장사나 하셔. 그래야 우리 팀장님 편하게 계시다 가시지. 팀장님, 그쵸~?”
    “우리 팀장님! 이거 왠지, 내가 두 사람의 신혼집에 온 기분이네.”
    “재국 선배는 참…….”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내가 가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우리 유진이한테 말해요.”
    “아, 아닙니다. 오늘 너무 잘 먹어서 더 이상 먹을 수도 없습니다.”
    “아빠한테 말씀이나 잘 해주셔.”
    “그건 걱정하지 마.”
    “그런데 그게 뭐야? 아까부터 계속 들고 있던데.”
    “아, 맞다! 경비아저씨가 네게 택배가 왔다고 하면서 주더라. 경비실에서 보관하고 있었다면서.”
    “택배! 쇼핑몰에서 시킨 건 주말에 모두 왔는데, 정리도 이미 다 끝냈고.”
    “난 몰라. 전해주었으니까 엄마는 이만 간다. 잘생긴 최 팀장님, 다음에 유진이랑 가게에 꼭 한번 놀러 와요. 꼬~옥!”
    “후후후. 예, 알겠습니다. 어머님, 나중에 꼭 다시 찾아뵙고 아버님께도 인사드리겠습니다.”
    “앗싸! 나 간~다. 나오지들 말고 계속 재미나게 놀아요. 호호호.”
    “쾅!”
    발그레 상기된 홍다연의 흥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정원이 쏜 사랑의 총알을 홍다연이 맞은 것 같았다. 이미 도심은 부와 명예를 좇는 불나방들이 점령했다. 거기에 일그러짐 없는 온전한 원형의 달빛까지 있었다.

    “헐! 하여간 우리 엄마의 덜렁거림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유진 씨, 뭔데 그래?”
    “더덕이에요. 아마 강원도 횡성에서 보내온 자연산 더덕일 거예요.”
    “더덕! 더덕이라면 입맛을 돋워주는 데 최고 아닌가?”
    “그렇다고 하시더라고요. 저희 아빠가 전통주 담그시는 걸 무척 좋아하시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산에 자주 가시질 못하세요. 그래서 가끔 횡성의 지인분을 통해 더덕을 구입해 술을 담그세요. 저희 집에는 영지·천마·인삼·산도라지·구기자·오미자·오가피·황기·당귀·죽순·솔잎·다래·운지·삼지구엽초·하수오 등 온갖 담근 술이 있어요.”
    “와아! 정말 대단하시다.”
    “아마 엄마가 또 저에게 온 택배랑 바꿔서 갖고 오신 것 같아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