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48> 가면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정원은 특별제한구역으로 설정돼 취급인가자 외엔 좀처럼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특수기밀기록보관소에 있었다. 특수기밀기록보관소는 국가기밀자료를 보관하는 곳으로 보안레벨이 최고 등급이다. 그래서 그곳은 국정원 직원임을 증명하는 ID카드만 가지고는 출입이 불가능했다. 정원도 신분과 열람 목적 등 여러 단계의 보안인증절차를 거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약서까지 작성한 뒤에야 비로소 출입할 수 있었다. 슬라이딩 형태로 설계된 보관고에는 단행본·간행물·녹음테이프·영상물·전자출판물 등이 기준에 따라 정확히 분류되어 있었다.
    “또각! 또각! 또각!”
    “!”
    정원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노란색 보관함들을 열어 그 안의 내용물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차츰 그 영역을 넓혀갔다. 하지만 승인받은 열람공간을 벗어나는 건 규정위반이다. 대략 30분쯤 지났을 무렵 정원은 도서이동박스에 찾아낸 것들을 옮겨 담아 열람실로 가져왔다. 특수기밀기록보관소는 자료의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해 열람실도 보관소 내에 격리실 형태로 존재했다. 정원이 가져온 자료는 문서파일부터 동영상자료까지 다양했다. 그 자료들 중 맨 위에 놓인 파일은 강치환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원이 살펴보는 자료는 어느 대기업체에서 선발한 해외장학생 선발명단이었다.
    ‘흠! 그랬군. 내가 모르는 생과 사의 게임이 금단(禁斷)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었어.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한다. 좋아! 백수의 왕 사자는 이빨과 발톱으로만 사냥하지는 않지. 물소를 궁지로 몰아가 약점을 찾아내는 영리함도 있거든.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약점을 찾는 거야.’
    명단파일을 덮은 정원의 입가에 이전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긴장감이 순간적으로 감돌았다. 동시에 정원의 눈빛도 암실에서 전구가 빛을 발하는 것처럼 강렬해졌다. 정원의 얼굴은 무척 예쁘기는 하지만 눈으로 웃질 않는 여성잡지의 표지모델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 정원에게 말을 걸려했다면 정서적인 교감이 불가능함을 알고 서둘러 입을 닫을 만큼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적어도 이 파일 속의 자료들이 정확하다면 강 과장님은 매우 지능적이군. 그리고 지금의 엄 처장님은 매우 기술적이고. 강 과장님의 영웅담은 유진 씨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엄 처장님의 과거활동 내역은 아주 뜻밖인걸. 도대체 꼬리를 어디까지 자른 거야. 몸통을 가늠할 수조차 없으니 말이야. 자른 꼬리를 찾아내 모두 연결하면 과연 어떤 모습이 될까. 흠! 몹시 흥미로운데.’
    “저, 최 팀장님.”
    “!”
    “지금 밖에서 누가 팀장님을 찾고 있습니다.”
    “제가 확실합니까?”
    “예, 지금 여기에는 팀장님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 재국이었다. 그런데 재국의 얼굴은 정원보다 더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산 자가 죽은 자들의 세계를 경험한 것처럼 무언가에 강한 물리적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그의 입술은 연신 침을 발라도 모래사막처럼 좀처럼 습기를 머금지 못하고 금방 증발해버렸다. 평소와 다른 재국의 행동엔 정원을 심리적으로 크게 흔드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더불어 강한 흡인력으로 정원의 호기심을 극점까지 치솟게 하는 놀라운 힘도 느껴졌다.
    “재국 씨를 이토록 흥분시킨 게 뭔지 몹시 궁금하군.”
    “그건 일단 이 사진을 보시고 난 다음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진?”
    “전 이 사진을 보는 순간 피가 너무 빠르게 돌아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가만! 오늘 취재처로 외교·안보부처가 잡혀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통일부 교류협력국에서 이 사진을 입수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팀장님에게 달려왔습니다.”
    “교류협력국이라면 남북경협을 담당하는 곳이잖아?”
    “맞습니다.”
    “재국 씨의 얼굴이 한껏 달아오른 것을 보니 정말 뜻밖의 수확이 있었나보군.”
    “물론입니다.”

    통일부에서 입수한 사진이면 보나마나 북한 관련 사진이다. 북한 관련 정보라면 그 양과 질에 있어서 통일부는 국정원에 뒤지지 않는다. 국정원과의 차이점이라면 경협 등 민간업무와 관련된 정보를 주로 다룬다는 점뿐이었다. 아무튼 재국의 호들갑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받아든 사진을 한 장씩 넘기며 정원은 그것을 절실히 느꼈다. 정원의 얼굴이 유령을 본 것처럼 순식간에 변했다.
    “지상 12층으로 167개 객실을 갖추고 있는 외금강 기슭의 금강산호텔입니다.”
    “사진이 찍힌 날짜는?”
    “대략 한 달 전쯤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군. 호텔 주변의 초목과 입고 있는 옷으로 볼 때 확실히 한여름은 아니야.”
    “그럼 고려항공 소속의 Mi-8헬기가 착륙한 헬리포트(Heliport)는 어디지?”
    “교류협력국 담당자는 나선특구라고 했습니다.”
    “판단 근거는?”
    “저 멀리 보이는 중심지구에 최근 짓다만 김일성동상과 공공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마에다 유주루와 동행한 인물들의 신원정보는?”
    “앞줄의 3명은 외자 유치와 합영, 합작 등 외국과 관련된 모든 사업에 있어 전권을 행사하는 합영투자위원회의 실무자들이었습니다. 맨 좌측은 일본을 담당하는 2국의 한광혁이고, 가운데는 유럽을 담당하는 3국의 홍명수, 그리고 오른쪽은 홍콩을 담당하는 엄성룡입니다.”
    “가만! 그런데 합영투위의 실무자들 뒤쪽의 두 명 모두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아?”
    “그래서 저도 나선특구는 물론이고 압록강의 황금평 합작개발과 관련하여 합의 당사자인 북한의 합영투위 실무자와 중국 상무부 담당자까지 모두 조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한 명은 통전부에서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의 실무를 담당하는 과장 전금호였습니다.”
    “전금호라, 그렇군. 본명은 전일선(全一先)이고 작년까지 주독일 이익대표부 경제참사를 지냈지 아마.”
    “맞습니다. 첩보에 의하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가 시리아를 거쳐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Hezbollah)와 가자지구의 하마스(Hamas) 등 이슬람 무장세력의 손에까지 들어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다른 한 명은?”
    “중국 외교부의 정책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정책규획사(政策規劃司) 사장(정책기획국장) 왕명성(王明成)입니다.”
    “왕명성?”
    “중국은 절대로 슈퍼강국인 미국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중국은 패권 추구보다 미국과 더욱 강력한 전략적 파트너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친미주의자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왕명성의 레전드일 뿐이야.”
    “레전드라고요? 그럼 신원을 숨기기 위해 만든 날조된 가짜이력이란 말씀입니까?”
    “물론이지.”
    “그러면 왕명성의 또 다른 이면은 무엇입니까?”
    “과거 일본 외무성의 중국 전문요원인 차이나스쿨에 중국이 공안 관련 인력을 대량 투입하는 작전을 그가 배후에서 진두지휘했거든. 그것이 가면을 벗은 그의 실체야.”
    “아주 그럴듯한 가면을 썼군요! 가만! 팀장님. 차이나스쿨이라면 타깃으로 지정된 일본인 남성에게 미모의 중국인 에이전트를 접근시켜 포섭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잖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마에다 유주루도 벌써 미인계에?”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시는 무슨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지난번 재국 씨가 마에다 유주루의 신원정보를 털었을 때 미시마 유키오와 쌍둥이처럼 보일만큼 매우 극우적인 인물이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닌가?”
    “맞습니다.”
    “이유는 바로 그거야.”
    “그게 무슨……?”
    “마에다 유주루는 급속한 신상변화에 대한 미스터리가 여전히 남아 있어.”
    “그렇죠.”
    “때문에 우리가 보고 있는 마에다 유주루를 완전한 실체라고 보는 건 모순이야. 하지만 그의 혈관에 진짜 사무라이의 피가 흐른다면 결코 치욕스런 불명예를 택하지는 않을 거야. 즉 사무라이는 언제나 충성과 그들만의 명예로운 죽음을 최고의 가치로 두거든.”
    “아무튼 전 사진을 보는 순간 마에다 유주루의 역할과 활동에 적잖게 놀랐습니다.”
    “혹시 통일부에선 마에다 유주루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도 확인했어?”
    “현재 나선특구에 투자하려는 일본인 사업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
    “응, 왜?”
    “지난번에 유진이의 지적도 있었습니다만, 정말 나코-테러리스트가 맞을까요? 그게 사실이라면 일본 공안에서는 왜 그의 위험한 행보를 중간에서 차단하지 않고 그냥 보고만 있을까요? 전 그게 의문입니다.”
    “분명 마에다 유주루를 단순히 북한 권력층이 요구할 때마다 암살청부나 대행하는 용병 테러리스트로 보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
    “솔직히 내각정보조사실을 비롯해 경찰청과 공안조사청, 방위성 모두가 마에다 유주루의 동선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합니다.”
    “흠…….”
    “더구나 북한에 직접투자를 하려면 북한과의 투자거래를 제한한 현행 일본 법령을 위반해야 하잖습니까. 그건 제아무리 정치권의 비호를 받는 야쿠자라 하더라도 결코 쉽지가…….”
    “만약 재국 씨의 가정이 맞는다면 우리의 국익엔 심대한 위협이 되겠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일본 공안조사청의 정보에 뭔가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류!”
    “예.”
    “만일 그렇다면 그건 공안조사청의 키시카와 조사 제2과장이 만들었다는 소린데.”
    “그렇죠.”
    “하지만 문제는 타국과 정보교류를 빈번하게 수행하는 외사과에서 더구나 이미 해외정보기관에 노출된 인물이 그런 비밀공작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런데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그러게 나도 머릿속이 온통 흙탕물로 뒤범벅이 된 느낌이야.”
    “하여간 수집한 첩보를 팀장님에게 신속히 전달한 것으로 제 임무는 끝났습니다. 그럼 전 하던 일이 있어서 이만.”
    “그래, 가서 수고 좀 더 해줘.”

    예상된 경로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위험신호가 울렸다. 일상적인 절차처럼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던 아니 당연시했던 정상모드가 갑자기 경고모드로 바뀐 것이다. 정원은 영혼이 없는 강시처럼 다시 특수기밀기록보관소의 열람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정원이 향한 곳은 그가 앞서 자료를 수집한 구역이 아니었다. 바로 해외자료구역이었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료들을 게걸스럽게 열람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시간쯤 흘렀을 때 진실과 거짓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진실만이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우 나카무라. 나이초우(內調)의 국제부 상사반(商社班) 직원으로 의심됨. 흠, 나이초우라. 그렇다면 외무성 국제정보국에서 내각정보조사실로 파견되었다는 말이 되는데…….”
    개연성이 높은 물증까지 포함하고 있어 처음부터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의 대표적인 정보훈련기관인 오히라(小平)학교를 배경으로 찍은 미우 나카무라의 사진이 파일에 첨부돼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판 CIA로 불리는 내각정보조사실은 전체 직원의 약 70퍼센트 정도를 다른 기관과 성(省)에서 파견된 요원들로 채운다. 아무튼 미우 나카무라는 의심의 여지없이 외무성에서 파견한 요원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던 정원은 육상자위대의 정보보전대 부대마크를 단 자위대원들 사이에서 아주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이건 육상자위대의 2등육위(육군중위) 계급장을 단 마에다 유주루잖아.”
    사악한 어둠의 빛을 쏟아내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마에다 유주루였다. 그의 눈빛은 한낮의 태양빛을 거울로 반사시키는 것처럼 따갑고 직선적이었다. 그것도 예리한 칼날처럼 섬뜩했다. 젊은 시절의 마에다 유주루는 맹목적인 충성심과 강인함이 온몸에서 풍겼다. 다른 무엇보다 그가 마에다 유주루라는 증거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수백 명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극한의 차가움이었다.
    ‘어린 시절의 꿈은 사무라이. 미시마 유키오를 동경. ‘자위대는 일본의 혼이며 가타나다!’라고 외치는 우익. 갑자기 야쿠자로의 변신. 그리고 각국 테러단체를 지원하는 전문 나코-테러리스트가 됨. 이 모든 패턴조각들을 모아 완성한 그림은……. 그래! 맞아. 바로 ‘신군국주의(新軍國主義)’야. 심지어 북한으로부터 의뢰받은 암살청부까지도 거시적으로 보면 신군국주의를 위한 치밀하고 교활한 행보임을 알 수 있어. 북한의 도발은 일본에겐 군사력 증강의 기회이며 또한 정당성을 부여했으니까. 틀림없어. 결국 오늘에야 꼬리를 잡았군.’

    가까이 가면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혼돈 속에서 정원은 비로소 질서를 찾았다. 그것은 흡사 헬륨과 수소, 질소와 산소가 뒤섞여 만드는 별의 탄생과정처럼 매혹적이기까지 했다. 이제 정원의 심장은 불타는 가스덩어리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활한 우주에서 그동안 아껴두었던 생체에너지를 태워 빛의 속도로 날아갔다. 그런데 놀라운 건 빛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음에도 주변의 사물들이 일그러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또렷하고 선명했다. 그때 정원의 열기를 단번에 식히는 일이 벌어졌다.

    “유진 씨, 마에다 유주루의 입국 목적은 밝혀졌어?”
    [팀장님, 호텔로 얼른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일 있어?”
    [조금 전 외교통상부 직원이 호텔의 지하주차장 화장실에서 피살체로 발견됐습니다.]
    “그럼 경찰 강력계에 사건을 맡겨야지.”
    [그런데 그 외교통상부 직원의 전담업무가 대북 관련 업무였답니다.]
    “대북 관련 업무?”
    [예, 현재까지 확인한 바로는 대북식량 지원업무와 관련된 사항들을 외교통상부 내에서 통합·조정했답니다.]
    “살해도구는?”
    [도검으로 보입니다.]
    “도검?”
    [예.]
    “현장 상황은?”
    [경찰과 호텔 측에 협조를 구해 일단 언론에는 흘러나가지 않도록 막았습니다.]
    “잘했어. 최대한 빨리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