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에 나타난 세기의 뉴리더 악수! 태평양에 '젊은 혁명' 파도치다

  • <이현표의 역사 앨범> 사진으로 보는 반세기전 시간 여

    박정희-케네디,

    동갑내기 친구의 만남



    대통령의 해외순방은 국민의 세금이 상당히 수반되는 최고의 외교행위이자, 고도의 정치행위다. 따라서 대통령은 해외순방 시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하며, 반드시 순방후에 국민에게 그 성과를 보고해야할 책무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오늘까지 해외순방의 이런 외교적·정치적인 중요한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책무를 가장 성실히 수행한 국가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 대통령’으로 표기 통일)이다.
    박 대통령은 1961년 11월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할 때부터 1968년 9월 호주·뉴질랜드 방문까지 7차례의 공식 해외순방 내용을 모두 최소의 경비를 들여 책자로 제작토록 했다. 그 결과 6차례는 국문으로 1000부씩 제작됐으며, 그중 2차례는 영문으로도 500부씩 제작됐다. 그리고 1차례는 영문으로만 500부 제작됐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된 이 간행물을 언론사, 여야 지도자, 공공도서관 등 주요 기관에 배포하여 역사의 기록으로 남도록 했다.

    한편 공식 정부간행물이외에 박 대통령은 순방기록을 시판용으로 발간하도록 허가했는데, 이는 국민에게 순방성과를 간접적으로 보고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정부의 자료지원을 받은 동아출판사는 정부간행물보다 몇 개월 후에 내용과 사진이 풍부한 책을 4차례 발간했다. (박 대통령 해외순방 책자 총 13권 목록: 최종회 참조)

    이를 감안해 보면, 박 대통령은 국민에게 봉사하고 소통하려는 점에서 소위 선진국의 국가원수들보다도 더 민주적이고 선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을 존중하고 소통하려는 이런 유산이 뉴미디어 시대에 맞게 변용되어 박근혜 정부에도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사진 중심으로 반세기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현장 시리즈 -3->1961년 11월 미국 방문


    "당신에게 반했어"...."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가 1960년 3월 군 제대 후 첫 취입한 곡은
    <당신에게 반했어>(Stuck on you)다.

    “당신은 사과나무를 흔들어

    사과를 떨어뜨릴 수는 있어도

    나를 흔들 수는 없을 거예요.

    나는 아교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이런 가사의 노래는 발매 1개월만인 4월 25일 빌보드 핫 100의 1위로 등극해 4주간 고수했다.
    우선 <당신에게 반했어>를 감상해 보자.

    ☞ http://www.youtube.com/watch?v=kJ6yAYHsHqg


  • ▲ ‘당신에게 반했어’ 싱글레코드 (1960.3.23일 발매)ⓒ소장자 이현표.
    ▲ ‘당신에게 반했어’ 싱글레코드 (1960.3.23일 발매)ⓒ소장자 이현표.


    <당신에게 반했어>가 히트할 때는 마침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 대통령 후보가 탁월한 언변과 미남 배우 뺨치는 외모로 민주당 경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1960년 11월 8일 대선에서 그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43세)에 당선됐다.
    승리가 점쳐졌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1994) 공화당 후보를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근소한 11만 표 차이로 따돌리고!


    그리고….

    “성화(聖火)는 이제 미국의 새로운 세대로 넘겨졌다.”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어보라.”

    그의 취임사는 세기의 명언이 됐다.


  • ▲ 취임사를 하는 케네디 대통령 (1961.1.20일)ⓒ소장자 이현표.
    ▲ 취임사를 하는 케네디 대통령 (1961.1.20일)ⓒ소장자 이현표.


    1960년대 초 미국에 이렇게 젊음이 충만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도 4.19학생혁명과 5.16군사혁명을 거치면서 젊은 세대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특히 케네디와 나이가 같은 박정희(1917~1979) 소장을 필두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장교들은 1961년 5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실질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당시 <당신에게 빠졌어>만큼 인기를 누렸던 우리 가요가 있다.
    바로 손석우가 작곡하고 한명숙이 부른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다.

    ☞ http://www.youtube.com/watch?v=E096S2nhF6Y


  • ▲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LP음반(25cm) 표지 (1961년)ⓒ소장자 이현표.
    ▲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LP음반(25cm) 표지 (1961년)ⓒ소장자 이현표.


    1961년에 발표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박정희 장군을 상징한다는 소문과 함께 당시 우리 가요계를 대표했던 곡의 하나였다.

    언제부턴가 5.16군사혁명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박정희 소장의 좌우에 박종규, 차지철 대위가 거칠게 서 있는 사진으로 상징된다.
    그런데 당시 AP통신은 ‘노오란 샤쓰’는 아니지만, ‘선글라스를 손에 들고 군복’을 입은 당당한 사나이를 박정희 소장으로 보도했다.
    사진 1장이 이미지를 얼마나 다르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 ▲ 미국 AP통신이 보도한 박정희 소장 (1961년 5월)ⓒ소장자 이현표.
    ▲ 미국 AP통신이 보도한 박정희 소장 (1961년 5월)ⓒ소장자 이현표.



    1) 박정희 의장 미국 방문기록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방미초청을 정식으로 수락한 것은 1961년 9월 22일이었다.

    박 의장은 헌법상 국가원수는 아니었지만, 케네디는 1961년 11월 12일부터 24일까지 방미(訪美)한 박 의장을 국빈으로 맞았다.
    이는 군사혁명 초기에 자칫 빚어질 수도 있었던 한·미간의 마찰과 불신을 불식시키고 더욱 강력한 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케네디 대통령과 미국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당시의 방문성과를 <박의장방미수행기록>이란 책자에 고스란히 수록해 놓았다. 


  • ▲ <박의장방미수행기록> 케이스 (1962.2월 발간)ⓒ소장자 이현표.
    ▲ <박의장방미수행기록> 케이스 (1962.2월 발간)ⓒ소장자 이현표.


    박정희 정부가 한정판으로 1000부만 발간한 이 최초의 해외순방기록은 사실적이고, 긴장감 넘치며, 재미있고, 사진과 내용 또한 충실하다.
    마치 흥미진진한 한 편의 기록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주는 이 한정판 정부간행물이 가까운 시일 내에 시판용 책자로 다시 발간되어 일반 독자들의 품으로 다가왔으면 한다.


    <박의장방미수행기록>(세로 19.7 cm x 가로 21.7cm, 194쪽)에 수록된 사진 중심으로 52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 ▲ <박의장방미수행기록> 표지ⓒ소장자 이현표.
    ▲ <박의장방미수행기록> 표지ⓒ소장자 이현표.



    2) 출발 및 일본 경유

    박정희 의장은 1961년 11월 11일 오전, 방미 길에 올랐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김포공항으로 향한 것이 아니고, 효창운동장에 들러 <문화인친목체육대회>에 참석한 것이다.
    이는 문화를 사랑하는 군사정부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 ▲ <문화인친목체육대회>에 참석한 박 대통령 내외와 지만 군 (1961.11.11일)ⓒ소장자 이현표.
    ▲ <문화인친목체육대회>에 참석한 박 대통령 내외와 지만 군 (1961.11.11일)ⓒ소장자 이현표.


    이어 김포공항에 도착한 박 의장은 부부동반이 아닌 단독 방문이었기 때문에 육영수 여사와 박지만 군, 출영객들에게 출국인사를 하고 장도에 올랐다.

    박 의장 일행을 태운 KNA(Korean National Airlines:대한항공 전신)기가 첫 착륙한 곳은 일본 하네다 공항이었다.
    박 의장의 미국 방문이 결정되자, 일본 정부가 일본을 경유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11월 11일 오후 3시 50분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박 의장은 이케다 일본 총리 등 정계요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날 박 의장은 영빈관에 여장을 풀고, 저녁 7시에는 이케다 총리가 개최한 만찬회에 참석하여 “국교를 정상화하여 명랑하고도 굳건한 토대 위에 긴밀하게 제휴하는 터전을 닦는 것이 양국 국민의 과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1월 12일 오전 박 의장은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오후에는 내외신 기자회견도 가졌다.



  • ▲ 하네다 공항에서 박 의장과 이케다(맨 오른쪽) 총리 (1961.11.11일)ⓒ소장자 이현표.
    ▲ 하네다 공항에서 박 의장과 이케다(맨 오른쪽) 총리 (1961.11.11일)ⓒ소장자 이현표.


     

    박 의장 일행은 노스웨스트 항공사 소속 여객기로 갈아타고 11월 12일 밤 10시 하네다 공항을 출발해 같은 날 오전 9시 30분(현지시간) 미국의 앵커리지에 도착했다.
    2시간 후에 다시 비행기에 오른 일행은 같은 날 오후 4시 20분(현지시간) 시애틀에 도착하여 1시간 체류한 후 또 다시 시카고로 향했다.
    같은 날 밤 11시에 시카고에 도착한 박 의장 일행은 드레이크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 ▲ 시애틀 공항에서 꽃다발을 받는 박 의장 (1961.11.12일)ⓒ소장자 이현표.
    ▲ 시애틀 공항에서 꽃다발을 받는 박 의장 (1961.11.12일)ⓒ소장자 이현표.


  • ▲ 시애틀 공항에서 꽃다발을 받는 박 의장 (1961.11.12일)ⓒ소장자 이현표.


    박 의장은 11월 13일 아침 시카고 교포 및 유학생들과 조찬회를 갖고, 오전 10시에는 시카고 시청을 방문하여 시청 앞 거리에서 성대한 환영행사를 받았다.

     이어 박 의장은 리처드 데일리(Richard J. Daley, 1902~1976: 시카고 시장을 21년간 역임했던 인물, 1942년생인 그의 아들은 1989년부터 2011년까지 22년 동안 시카고 시장으로 재임하여 아버지의 기록을 경신했음) 시장실로 이동하여 시카고 명예 시민증과 기념품을 받고 환담했다.
    특히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시장에게 우리 유학생에 대해 각별히 배려해주도록 당부했다. 



  • ▲ 시카고 명예시민증과 기념품을 받는 박 의장 (1961.11.13일)ⓒ소장자 이현표.
    ▲ 시카고 명예시민증과 기념품을 받는 박 의장 (1961.11.13일)ⓒ소장자 이현표.


    환담 중에 기자들이 몰려들자, 박 의장은 사진 기자를 가리키며 데일리 시장에게 “신문기자는 세계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군요”라는 뼈있는 농담을 건넸고, 데일리 시장도 맞장구쳤다.

    3) 케네디와 정상회담 및 워싱턴 일정

    박정희 의장이 워싱턴 공항에 도착한 것은 11월 13일 오후 4시였으며, 공항에서 존슨 부통령(Lyndon Johnson, 1908~1973, 케네디 대통령 사망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1963~1969년 미국 제36대 대통령 역임), 러스크 국무장관(Dean Rusk, 1901~1994) 내외, 렘니처(Lyman Lemnitzer, 1899~1988) 합동참모본부의장을 비롯한 한·미 고위인사들과 교포들의 환영을 받았다. 



  • ▲ 왼쪽부터 러스크 장관, 박 의장, 렘니처 대장, 존슨 부통령 (1961.11.13일)ⓒ소장자 이현표.
    ▲ 왼쪽부터 러스크 장관, 박 의장, 렘니처 대장, 존슨 부통령 (1961.11.13일)ⓒ소장자 이현표.



    주미한국대사관저에서 1박을 한 박 의장은 11월 14일 오전 9시 30분, 알링턴 국립묘지의 무명용사비에 화환을 증정하고 참배한 다음, 10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딘 러스크 국무장관과 회담했다.
    러스크 장관은 박 의장의 방미 직전에 부부동반으로 방한하여 한국 실정을 이미 파악했기 때문에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어 박 의장은 국제개발처(AID) 하울러 해밀턴 처장에게 5개년 개발계획을 설명하고 미국의 장기지원 문제를 협의했다.


    이날 오찬은 박정희 의장과 케네디 대통령이 첫 대면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케네디는 백악관 현관에서 박 의장을 반갑게 맞았다.



  • ▲ 케네디 대통령과 첫 대면하는 박정희 의장 (1961.11.14일)ⓒ소장자 이현표.
    ▲ 케네디 대통령과 첫 대면하는 박정희 의장 (1961.11.14일)ⓒ소장자 이현표.


    40여명의 기자들이 취재하는 가운데 케네디 대통령은 박 의장과 굳게 악수를 나눈 다음, 박 대통령을 백악관 2층으로 안내하여 부인 재클린 여사와 자녀들을 소개했다.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족자 2개를, 부인과 자녀들에게는 각각 한복 1벌을 선물하고 함께 기념촬영도 했다. 



  • ▲ 오찬장으로 향하는 케네디 대통령과 박 의장 (1961.11.14일)ⓒ소장자 이현표.
    ▲ 오찬장으로 향하는 케네디 대통령과 박 의장 (1961.11.14일)ⓒ소장자 이현표.


    이날 오찬사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한·미 혈맹의 역사, 혁명정부의 개혁과 민정복귀 의지를 찬양하고, 한국이 번영하는 민주국가가 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군사혁명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미국이 어떠한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케네디 대통령과 의견교환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오찬회 후 숙소로 갔다가 이날 오후 다시 백악관을 방문하여 3시 30분부터 1시간 25분간 케네디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에서는 한·미 양국이 당면한 국제적인 정세와 특히 한국의 경제발전과 군사력 유지 등에 관해 솔직하고 진지한 토의가 있었다.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도 케네디는 한국정부가 단행하고 있는 개혁을 찬양하면서, 세제의 확립은 환영하지만 주한미국대사관직원들도 체납세금을 물어야할 형편이니 야단났다고 농담을 해서 회의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 ▲ 정상회담 후 환담하는 박정희 의장과 케네디 대통령 (1964.11.14일) ⓒ소장자 이현표.
    ▲ 정상회담 후 환담하는 박정희 의장과 케네디 대통령 (1964.11.14일) ⓒ소장자 이현표.


    이에 질세라 박 의장도 미국신문기자에 관해서 “기자와 카메라맨이 상전인 곳이 미국인 것 같다”고 얘기하자, 케네디도 “신문기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골칫거리의 하나”라고 공감을 표시하여 또 한 번 폭소가 터졌다.

    이날 정상회담 후에 한·미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성명에는 박 의장이 1963년 여름, 정권을 민정으로 복귀시키려는 혁명정부의 엄숙한 공약을 다시 말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주의적 토대 구축과 강력한 반공태세 유지에 불가결한 장기경제개발 촉진을 위하여 가능한 경제원조 및 협력을 계속할 것을 박 의장에게 확약했다고 명문화됐다. 


    케네디 대통령은 회담이 끝날 때쯤 이례적으로 박 의장에게 “내일(11월 15일) 오후 4시에 다시 백악관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의사표시를 했고, 박 의장도 흔쾌히 수락했다. 


     

  • ▲ 제1차 정상회담 후 박 의장을 전송하는 케네디 대통령 (1961.11.14일)ⓒ소장자 이현표.
    ▲ 제1차 정상회담 후 박 의장을 전송하는 케네디 대통령 (1961.11.14일)ⓒ소장자 이현표.

     

    박 의장은 11월 14일 오후 5시 30분부터 워싱턴 주재 각국 외교사절단을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접견했다.
    또한 저녁 6시부터는 정일권 주미대사가 박 의장을 위해서 주최한 리셉션이 베풀어졌는데, 여기에는 미국 정부 및 군 관계인사, 언론계인사, 사회명사 및 교포 대표 700여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뤘다.


    이날 저녁 8시에는 블레어 하우스(Blair House: 영빈관)에서 박 의장을 위한 러스크 국무장관 주최 만찬회가 개최됐다. 우리측에서는 박 의장을 비롯하여 7명이, 미국측에서는 러스크 장관을 비롯하여 농무부장관, 상무부장관, CIA국장, 상하원의원 등 21명이 참석했다.   



  • ▲ 러스크 국무장관 주최 만찬회 (1961.11.14일)ⓒ소장자 이현표.
    ▲ 러스크 국무장관 주최 만찬회 (1961.11.14일)ⓒ소장자 이현표.


    만찬회에서 러스크 국무장관은 대부분의 외국원수들이 “원조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모스크바로 가겠다”고 괴롭히는데, 박 의장은 그들과 달리 미국을 잘 이해해주는 ‘미국의 진정한 벗’이라고 말했다.

    11월 15일 오전 8시 박 의장은 주미한국대사관으로 찾아온 맥스웰 테일러(Maxwell Taylor, 1901~1987: 주한유엔군사령관을 역임) 대장을 접견하고, 10시에는 농무부를 방문하여 프리맨(Orville Freeman, 1918~2003) 장관과 우리 국토건설사업과 잉여농산물지원문제를 협의했다.

    이어 오전 11시에는 맥나마라(Robert McNamara, 1916~2009) 국방부장관을 만나 한국군장비의 현대화를 포함한 광범위한 군사원조문제를 협의했다. 이 자리에는 렘니처 합동참모본부의장도 함께 했다. 


  • ▲ 왼쪽부터 렘니처 의장, 박 의장, 맥나마라 국방장관 (1961.11.15일)ⓒ소장자 이현표.
    ▲ 왼쪽부터 렘니처 의장, 박 의장, 맥나마라 국방장관 (1961.11.15일)ⓒ소장자 이현표.


    맥나마라 장관은 실무회담 후 국방부 귀빈실에서 박 의장을 위해 오찬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주한유엔군사령관을 역임한 렘니처 합동참모본부의장은 한국의 군사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는 발언을 했으며, 한국군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박 의장은 루터 하지스(Luther H. Hodges, 1898~1974, 케네디 정부에서 가장 나이 많았던 각료) 상무부장관을 찾아가 한국의 신외자도입법을 소개하고 미국의 민간투자확대를 요청했다.

    이날 하지스 장관은 박 의장에게 “기자들 등살에 불편하신 것 같은데 비결을 가르쳐드릴까요?”하면서 책상 서랍에서 자그마한 검은 고양이 소상(塑像: 흙으로 빚어 만든 조각)을 꺼내더니 말했다.
    “이걸 드릴 테니 이 녀석을 쓰다듬으면서 기자들을 만나세요. 그러면 기자들이 아무 말썽도 일으키지 못할 겁니다.”

    모두가 웃고 있는 동안에 박 의장은 선물을 받아들고, 고양이 소상을 쓰다듬는 시늉을 해서 다시 웃음바다가 됐다.
    박 의장이 국내나 해외에서 그 검은 고양이 소상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 ▲ 박 의장과 하지스 상무장관을 웃게 만든 검은 고양이 소상 (1961.11.15일)ⓒ소장자 이현표.
    ▲ 박 의장과 하지스 상무장관을 웃게 만든 검은 고양이 소상 (1961.11.15일)ⓒ소장자 이현표.


    케네디 대통령과 박 의장은 이날 오후 4시부터 35분 동안 제2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미 공동성명 발표 후 개최된 이례적인 회담에서 두 정상은 한국정세에 관한 둘만의 대화 및 라오스와 월남 문제 등으로 복잡한 동남아 정세에 관해 협의했으며,
    회담 후 친필 서명된 사진을 교환하는 등 우정을 과시했다. 

     

  • ▲ 제2차 정상회담에 앞서 포즈를 취한 한·미 정상 (1961.11.15일)ⓒ소장자 이현표.
    ▲ 제2차 정상회담에 앞서 포즈를 취한 한·미 정상 (1961.11.15일)ⓒ소장자 이현표.


    박 의장은 11월 15일 저녁 7시부터 주미한국대사관저에서 러스크 국무장관을 위한 만찬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는 하지스 상무부장관, 맥나마라 국방부장관, 한국군의 은인 밴 플리트 장군, 전 유엔군사령관 맥구르더 장군 등이 참석했다. 만찬회에서는 황재경 목사의 한국전통악기 소개와 어린이 고전무용도 곁들여졌다.


    11월 16일 오전 박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의 경제특별보좌관 로스토우(Walt Rostow, 1916~2003) 교수를 만나 한국경제문제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날 정오 박 의장은 미국 기자협회(National Press Club)가 주최한 오찬회에 참석하여 전 세계 250명의 기자들을 상대로 연설하고 30분간 기자들의 질의에 응답했다.
    질의응답이 끝난 후, 박 의장은 “외국지도자들이 이곳에서 곤욕을 치렀다는데, 오늘 여러분은 내게 부드럽게 대해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해 기자들로부터 웃음과 박수를 받아냈다.  



  • ▲ 미국 기자협회에서 연설하는 박 의장 (1961.11.16일) ⓒ소장자 이현표.
    ▲ 미국 기자협회에서 연설하는 박 의장 (1961.11.16일) ⓒ소장자 이현표.


     11월 16일 오후 3시 박정희 의장은 주미한국대사관저에서 수행기자와 워싱턴 한국특파원들과 회견을 갖고 방미성과를 소개했다.
    5시에는 러스크 국무부장관이 버거 주한미국대사와 함께 관저에 찾아와 환담했으며, 러스크 장관은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여사가 박 의장 부인과 자녀에게 보내는 선물(카우보이 아동 의상과 책)을 전달했다. 



  • ▲ 재클린 여사가 선물한 카우보이 옷을 입은 지만 군 (1961.12.22일)ⓒ소장자 이현표.
    ▲ 재클린 여사가 선물한 카우보이 옷을 입은 지만 군 (1961.12.22일)ⓒ소장자 이현표.


    4) 뉴욕 방문

    박정희 의장은 11월 17일 뉴욕으로 이동하여 로버트 와그너(Robert Wagner, 1910~1991) 뉴욕시장이 주최한 오찬회에 참석하고, 오후 5시 15분부터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Affairs)에서 연설했다.

    11월 18일 박 의장은 한국전쟁의 위인 맥아더 장군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나의 전우를 만나 영광이다”라고 환영했다.



  • ▲ 박정희 의장과 다정하게 팔짱을 낀 맥아더 장군 (1961.11.18일)ⓒ소장자 이현표.
    ▲ 박정희 의장과 다정하게 팔짱을 낀 맥아더 장군 (1961.11.18일)ⓒ소장자 이현표.


    같은 날 오후 5시 30분, 박 의장은 한·미재단이 베푼 리셉션에 참석했으며, 저녁 8시에는 아시아협회(Asia Society)가 주최한 만찬회에 참석하여 연설했다.  



  • ▲ 한·미재단 주최 리셉션 (1961.11.18일)ⓒ소장자 이현표.
    ▲ 한·미재단 주최 리셉션 (1961.11.18일)ⓒ소장자 이현표.


    5)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방문 및 귀국

    박정희 의장은 11월 19일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여 존 라이언(John Ryan) 미 제6군사령관이 자택에서 베푼 만찬회에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는 윌리엄 딘 소장 내외, 벤 플리트 장군 등 한국전쟁 미군 지휘관들이 참석했다.

    11월 20일 박 의장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교포와 유학생 200명과 조찬을 함께 했으며,
    조지 크리스토퍼(George Christopher, 1907~2000)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주최하는 오찬회에 참석했다.
    오후 5시부터는 아시아재단 및 북미주세계문제 연구소가 공동주최하는 리셉션에 참석하여 연설했다.


    11월 21일 박 의장은 미 제6군사령부를 방문한 다음, 라이언 사령관의 안내로 인근 군사시설을 시찰했다. 



  • ▲ 라이언 사령관의 안내로 군사시설 시찰 (1961.11.21일)ⓒ소장자 이현표.
    ▲ 라이언 사령관의 안내로 군사시설 시찰 (1961.11.21일)ⓒ소장자 이현표.


    11월 21일 박정희 의장은 하와이에 도착하여 윌리엄 퀸 주지사와 교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11월 21일에는 진주만과 군사시설을 시찰하고, 하와이 주지사 주최 리셉션, 한인협회 주최 만찬회에 참석했다.



  • ▲ 하와이 한인협회 만찬에서 하와이 교포와 박 의장 (1961.11.22일)ⓒ소장자 이현표.
    ▲ 하와이 한인협회 만찬에서 하와이 교포와 박 의장 (1961.11.22일)ⓒ소장자 이현표.


    박 의장은 이날 오전 의전비서 조상호 중령에게 하와이에 머물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하 ‘이 박사’로 표기)에게 화환을 보내 위문토록하고, 교포 노인들에게도 선물을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조상호 중령은 이일우 하와이 총영사와 이 박사의 초라한 자택을 방문했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조 중령을 맞았다. 이 박사는 거실의 안락의자에 앉았다가 부축을 받아 일어나
    “한인은 뭉쳐야 살아!”라고 조 중령에게 당부했다.
    이 박사는 “호랑이도 죽을 때는 제 굴을 찾아간다지 않는가? 나도 죽어도 고국에서 죽고 싶다”고도 말했으나, 서거(1965월 7월 19일) 후에야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박 의장은 11월 23일 밤 한국수행기자단과 미국 공보처의 사진기자를 저녁에 초대하여 그간의 노고를 위로했다.

    11월 24일 새벽 1시 45분 하와이를 출발한 박 의장은 새벽 5시 20분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여 특별기로 갈아타고, 같은 날 오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귀국인사에서 박 의장은 방미를 “대단히 만족스럽고, 성공적이었으며, 대단히 유익하고 고무적이었다”고 평가했다. 



  • ▲ 공항에서 지만 군을 안고 있는 박 의장과 육영수 여사 (1961.11.24일)ⓒ소장자 이현표.
    ▲ 공항에서 지만 군을 안고 있는 박 의장과 육영수 여사 (1961.11.24일)ⓒ소장자 이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