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항 부두서 300kg 철판 지지대에 깔려 숨져안전관리자‧장비 미비한 상태서 미경험자 업무 투입유족 "윗선 보고하느라 신고 ‘골든타임’ 놓쳐" 주장
  • ▲ 평택항 사고현장. ⓒ 고 이선호 씨 산재사망사고대책위원회
    ▲ 평택항 사고현장. ⓒ 고 이선호 씨 산재사망사고대책위원회
    군대를 제대하고 용돈을 벌기 위해 평택항에서 컨테이너 뒷정리 아르바이트를 하던 20대 대학생이 300kg 철판 지지대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유족과 시민단체들은 이번 사고가 산업 현장에 만연한 '안전불감증'이 빚어낸 '인재(人災)'라며 진상 규명과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7일 시민단체와 유족 등에 따르면 고(故) 이선호(23)씨는 지난달 22일 오후 4시쯤 평택항 신컨테이너 터미널에서 'FRC(Flat Rack Container)'라 불리는 개방형 컨테이너에서 바닥에 있는 나무 합판 조각을 정리하던 중 갑자기 무너진 컨테이너 지지대에 깔려 숨졌다.

    이씨가 근무한 곳은 물류업체 '동방'이 운영하는 하역장으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이씨는 군에서 제대한 뒤 학비와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참변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유족들은 이씨가 원래 동식물 검역과 하역 작업 보조를 하기로 했지만, 근로 계약과 달리 컨테이너 작업에 투입됐다고 밝혔다. 특히 사고 당시 현장에는 안전관리자도 없었으며 이씨는 안전모도 쓰지 않은 상태였다.

    이씨의 친구인 A씨는 자신의 SNS를 통해 "지난달 22일 FRC 작업을 도와 달라는 원청업체(동방)의 요청이 있었고 이씨는 FRC의 안전핀을 제거하고 원청 직원 지시로 FRC 내부 나무 합판 조각을 정리 중이었다"며 "당시 지게차 기사가 이씨가 청소하던 반대편 FRC의 날개를 접었는데 갑자기 이씨가 있던 반대편 FRC 날개가 접히면서 300kg의 무게가 이씨를 덮쳤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또 "이씨는 해당 작업을 처음 해보는 상황이었지만 현장에는 안전관리자가 없었고 안전 장비도 지급되지 않았다"며 "사고 발생 당시 현장 책임자들이 곧바로 119로 신고하지 않고 사내 보고를 먼저 해 신고가 늦어졌다"고 주장했다.

  • ◆ 유족 "사고 119 신고 시점과 현장 책임자 밝혀내야"

    유족은 이씨가 신고 지연으로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라며 수사 당국에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사측이 사내 보고를 하느라 119 신고가 늦어졌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은 목격자와 현장 책임자 등을 상대로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으나 유족과 사측 간 주장이 엇갈려 조사가 길어지면서 2주가 넘도록 이씨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

    김기홍 사고 대책위원장은 "사고 발생 당시 현장 발견자가 곧바로 119에 신고하지 않고 책임자에게 전화하고 책임자는 회사에 보고를 하다 보니 신고가 늦어진 것"이라며 "이씨가 혼자 작업을 했을 리는 없고 업체 소속 지게차 기사가 이씨에게 청소 업무를 지시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동방 관계자는 "사고가 발생한 지 1분 이내에 119 신고가 이뤄졌다"며 "폐쇄회로TV(CCTV)를 확인하면 119 차량이 게이트를 통과한 시간이 오후 4시19분으로 확인된다"고 신고 지연 사실을 부인했다. 이씨가 계약과는 달리 다른 업무에 투입된 점에 대해서는 "컨테이너 청소 작업은 본래 동방의 업무가 아니지만 선사에서 요구를 해 와 진행해 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 ◆ '안전불감증'이 빚어낸 참극...'중대재해처벌법'도 무용지물?

    이번 사고를 두고 산업계와 노동계에서는 원청업체와 하청업체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산업 현장의 관행과 '안전불감증'이 빚어낸 참극으로 보고 있다.

    김웅 국민의힘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2018년~2020년 공공기관 발주공사 재해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주요 25개 공공기관이 발주한 공사 현장에서만 근로자 31명이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까지 포함한 피해자는 946명에 달한다.

    이처럼 각계의 근절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부 산업 현장에서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은 고용자들의 안일한 안전 의식과 솜방망이 처벌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해 그 해결책으로 정치권이 산업 재해 발생 시 고용주와 책임자 처벌을 강화하는 이른바 '중대재해처벌법'을 마련했지만 산업 현장 근로자들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내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있는 중대재해처벌법은 50인 이상 사업장에서 사망자나 부상자가 2명 이상 발생한 산업 재해를 ‘중대산업재해’로 분류해 사업주가 최대 1년 이상 징역이나 10억 원 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했다.

    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해당 법이 적용되지 않는 데다 50인 미만 사업장에는 3년의 유예기간이 부여되면서 안전사각지대에 놓인 근로자들이 여전히 많은 상황이다.

    김 위원장은 "다수의 산업 현장 근로자들이 원청이 아닌 소규모 하청업체 소속으로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기가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며 "산업 재해가 발생하는 구조적인 원인을 진단하고 실질적인 사후 대책과 재발 방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