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론
     
      1954년 목포에서의 무소속 출마를 계기로 정치에 입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망할 때까지 55년간 정치에 몸담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자신의 슬로건으로 삼고 투쟁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치제도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은 그가 정치활동을 한 55년이라는 시간이 말해주듯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한국의 소위 ‘진보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말할 때 2000년 6월 15일의 1차 남북정상회담을 중요하게 언급한다. 이제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열기가 거의 다 가라앉았다고 판단한 필자는 김 前대통령(이하 김대중이라 함)의 ‘업적’이라 일컫는 남북정상회담이 한반도 정세, 특히 북한에 미친 영향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해보고자 펜을 들었다.
      6·15 남북정상회담(이하 6·15회담이라 함) 당시 필자는 평양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김대중의 평양방문에 대해 북한에서도 요란하게 선전했으며 대학생들을 포함한 수많은 평양시민들이 거리환영에 동원되었다. 필자도 김대중을 위한 환영행사에 동원되었는데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던 김대중의 모습을 5m 안팎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김대중이 평양을 떠날 때는 김대중을 배웅하려고 동승한 김정일의 모습을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김대중의 평양방문 덕에 그토록 증오하던 김정일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필자에게는 참으로 기억에 남는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필자를 포함하여 김대중을 ‘열렬히’ 환영하던 평양시민들은 김대중의 햇볕과 6·15회담이 북한 주민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6·15회담에 대한 평가가 소위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처럼 되고 있다. 하지만 김대중의 햇볕정책의 타깃은 북한이다. ‘햇볕정책’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북한의 옷을 벗기겠다”는 전략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6·15회담이 북한사회에 실제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김대중의 ‘햇볕’과 북한사회 변화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분석하려면 북한 사회가 개방된 이후라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직접 체험한 북한의 상황이 6·15회담을 전후로 하여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햇볕’에 대한 대략적인 평가라도 하고자 한다. 즉 독자들이 6·15회담이 과연 김대중의 업적인지 아닌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함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라 하겠다.
     
     
     본 문
     
      1980년대 말-1990년 초의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와 소련의 개혁개방은 북한의 중요한 보급로를 잃는 결과를 낳았고 그때부터 북한경제는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미 1990년부터 함경도 지역에서는 식량공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미공급’(未供給)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또한 북한의 경제위기와 더불어 국가의 배급(식량공급)에만 의존하던 사람들이 도시빈민층으로 전락하면서 북한 전역에는 1990년대 초부터 ‘꽃제비’(노숙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한편 북한 주민들의 마음속에서는 ‘사회주의의 승리’에 대한 의혹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북한 지식인들이었다. 비록 극소수의 특권계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사라질까 두려워 동유럽의 민주화에 상당한 거부반응을 나타냈지만 중산층 이상의 지식인들은 동유럽 민주화를 보면서 희망을 가졌다.

      이때부터 북한사회는 전반적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섰으며 서서히 가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1994년의 김일성 사망은 북한 사회 변화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고 북한 지식인들의 자유에 대한 희망은 더욱 더 굳어져갔다. 급기야 김정일은 북한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기 위해 軍을 장악하였으며 북한 사회에 대한 폭압과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사회주의 완전승리’에 대한 희망을 잃은 북한 주민들과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된 북한 지식인들,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발악을 하는 북한의 통치계층, 급속도로 붕괴되는 북한 경제,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북한사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1995년부터 1998년 사이에는 북한에 과연 지도자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북한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강도와 도둑이 득실거렸으며 주민에 대한 인민군의 약탈로 곳곳에서 아우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록 1998년을 전후로 하여 군대와 당을 완전히 장악한 김정일이 자신의 통치를 강화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변해버린 북한 주민의 가치관은 돌려세울 수는 없었다. 350만의 대량아사와 경제의 전반적인 붕괴를 경험하면서 북한 주민들은 “국가는 결코 우리의 운명을 책임질 수 없다, 내 운명은 내 손에 달렸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많이 있어야 한다”라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 당시 노동당과 공안기관을 비롯한 북한의 권력기구는 거의 유명무실해졌고 간부들은 주민들을 착취해서 생계를 연명했다. 국가로부터의 수입이 전혀 없는 간부들은 국가의 지시보다는 자신들에게 돈과 물자를 공급하는 주민들의 눈치를 더 많이 보게 되었고 날로 팽창되는 암시장을 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북한 주민들과 지식인들은 체제에 대한 불만을 거리낌 없이 쏟아냈다. 물론 ‘말반동’으로 많이 잡혀가긴 했지만 북한당국의 통제력은 거의 마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1998년-1999년은 북한사회 혼란기의 최절정이었다.
    1998년도에는 평양에서 떠난 급행열차가 전력사정과 견인기의 잦은 고장으로 인해 20일이 걸려서야 청진에 도착하는 희비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와 비슷한 평양-청진 사이를 20일이나 걸려 도착한 사례는 아마도 지구상에 철도가 생긴 이래 처음 있은 사건일 것이다. 일제통치를 경험했던 노인들은 “일제시대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이토록 철도가 마비된 일은 없었다”며 북한의 현실을 비난했다. 열차 창문에는 유리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객차 안은 물론 객차지붕에도 승객들이 콩나물처럼 빼곡히 매달려 다녔다. 그러다 사고가 나면 수천 명이 죽어 나가는 대형 참사를 빚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는 대량탈북이 시작된 시기였다. 1997년부터 죽기를 각오하고 두만강을 넘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앉아서 굶어죽느니 도망치다 총 맞아 죽는 게 낫다며 많은 북한 주민들이 국경 경비대의 총부리를 뒤로 하고 두만강을 건넜다. 실제로 현재 한국에 입국한 1만 6000여명의 탈북자들 중 많은 수가 이미 2000년도 이전에 탈북하여 중국에 체류하다 온 사람들이다. 이때의 상황을 북한주민들은 다음과 같이 비유하였다.

      “토끼는 굶어죽고, 노루는 도망치고, 이 땅(북한)에는 승냥이와 여우만 남아 물고뜯고 한다.”

      여기서 ‘토끼’란 국가만 의지하다가 굶어죽은 사람들을 뜻하며, ‘노루’는 이 시기 대량 탈북한 사람들을 뜻한다. 또한 ‘승냥이’란 주민들을 착취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북한 간부들을 뜻하는 말이며, ‘여우’는 북한간부들의 착취 속에서도 끈질기게 삶을 연명하는 일명 ‘눈 돌아가는’ 북한 주민들을 뜻하는 말이다.
      북한사회의 혼란을 막고 주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김정일 정권은 빈번히 공개총살을 감행하였다. 김정일이 직접 “나라가 어지러우니 총소리를 울려야겠다”고 지시하였고 북한의 곳곳에서는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총살형에 처해지는 사람들의 죄목을 보면 정말 어이가 없었다. 협동농장의 소를 도살한 혐의, 백주에 남의 집을 도둑질한 혐의, 어린 소년으로부터 옥수수쌀 5kg을 뺏은 혐의 등으로 죽임을 당했다. 예로부터 “큰 도적은 살고 작은 도적만 죽는다”는 말도 있듯이 법치가 존재하지 않는 북한에서는 돈이 있는 자는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뒷문으로 다 빠져나왔고, 돈이 없고 인맥이 없는 ‘송사리’들만 처벌을 받았다. 범죄자들을 엄격히 처벌하여 일벌백계하라는 김정일의 지시를 집행하는 흉내를 내야만 했던 공안당국이 ‘큰 놈’은 다 살려주고 ‘송사리’(작은 고기)들을 총살해버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송사리’들에 대한 공개재판과 공개총살을 보면서 북한 주민들은 “역시 돈이 있어야 살아남겠구나”라고 이야기했다. 결국 총소리는 김정일 정권이 의도한 것처럼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 주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만 증가시키는 역작용을 했다.
      한편 굶주림은 일반 주민에게만 닥친 고난이 아니었다. 김정일이 가장 신임한다고 하는 인민군에서도 굶주림과의 싸움은 전쟁보다 더 큰 비상사태였다. 수많은 인민군 병사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죽어갔고, 탈영과 약탈은 이 시기의 인민군을 특징짓는 대명사였다. 인민군의 무차별적인 약탈과 폭행으로 북한 주민들의 삶은 더 피폐해졌고 인민군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증오는 김정일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 시기 많은 대학생들이 생활이 어려워 대학을 중퇴했다. 지방대학 기숙사에서는 한 끼 식사로 메추리알만한 감자 세 알 또는 옥수수밥 한 줌을 주었다. 북한 최고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에서도 1997년 한 해 동안 통수수밥을 주었는데 많은 학생들이 배탈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대학생들은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그리고 대학에서 요구하는 각종 잡다한 ‘세금’을 내기 위해 학업은 뒷전에 놓고 장사에 뛰어들었다. 국가로부터 아무 것도 보장받지 못하는 대학교수들은 학생들의 성적을 올려주는 대가로 돈과 물품을 공공연히 받았고, 삶을 위해 학자의 양심을 팔아야만 했다.

      이처럼 1995년-1999년의 북한은 거의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당시에는 중앙의 지시가 지방에 잘 전달되지도 못했다. 주민들을 통제하려고 해도 권력기관마저 먹여 살릴 재정도 없는 북한 당국은 통제력을 거의 잃어갔다. 비록 김정일에게 몇 십억 달러의 비자금이 있다고는 하나 ‘사냥개’(북한 통치기구를 뜻함)에게 주기에는 너무나 피 같은 돈이었다. 김정일에게 출로는 없는 것 같았다. 이러한 북한의 상황은 북한 지식인들, 특히 젊은 대학생들에게는 희망을 주었다. 대학생들은 3명~4명씩 믿는 친구들끼리 모여 앉으면 김정일 체제를 비난했고 북한이 나아갈 새로운 길에 대해 모색했다. 북한이 이 상태로 가다가는 자생 붕괴될 것이며 그러면 새로운 민주적 지도자가 출현하여 북한사회를 개혁, 개방할 것이라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실제로 당시 북한체제를 반대하는 소요들이 지방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났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운이 좋았다.
    1997년 12월 남한의 민주투사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 북한과 오랜 인연이 있는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김정일에게 있어서 재생(再生)의 전주곡이었다.
    남한에서도 김대중과 북한의 인연에 대해 많은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으나 공개된 객관적 자료는 거의 없다. 일각에서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국정원에 있는 자신의 자료들을 다 없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사실이라 해도 김대중과 관련된 역사적 자료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북한의 비밀 문서고에 안전하게 보관되어있기 때문이다.
    훗날 북한사회가 개방되고 김일성-김정일 정권하에서 행해진 대남공작 관련 비밀 문서들이 공개된다면 모든 것이 다 밝혀질 것이다.
      아무튼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북한의 간부들은 물론이고 북한 주민들까지도 행여나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1970년대부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난과 공격의 한 방법으로 ‘김대중 카드’를 사용했다. 당시 김일성 정권은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에 비한 북한의 체제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남조선은 파쑈국가’라고 선전했고 그 실례로 민주인사들, 특히 김대중에 대한 탄압을 들었다. 필자의 아버지가 회고하기를 당시 북한당국은 김대중에 대해 상당히 동정하고 지지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필자가 성장하던 시기에도 북한당국은 김대중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1997년까지, 즉 김영삼 정부까지의 역대 남한 정부는 북한에 껄끄러운 존재였고, 따라서 이때까지 남한 정부는 북한의 주요한 비난 대상이었다. 남한정부가 북한의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니 자연히 정부를 비판하는 재야인사의 총수인 김대중은 북한 당국의 호감을 살 만했다. 북한당국이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사상교양을 시킨 것은 아니지만 신문이나 매체를 통해 김대중에 대한 북한 당국의 호감이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되었다. 김대중에 대해서는 어린아이를 포함해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김대중은 북한 사회에 잘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필자도 처음에는 희망을 가졌었다. 일생을 독재반대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사람이니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신념이 투철할 것이라 여겼고 그가 진정한 민주투사라면 북한의 독재와 인권유린에 대해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필자는 북한당국의 정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중앙당 간부로부터 북한당국과 김대중과의 관계를 듣고 나서 김대중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 그가 말하기를 김대중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김일성이 조총련을 통해 김대중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아마도 수령님(김일성)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겠는가”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필자는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김정일 정권이 붕괴되어야 북한 주민이 살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필자로서는 김정일에게 있어 회생의 출로가 될지도 모르는 김대중의 당선이 왠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실제로 필자의 우려는 몇 년 안에 현실로 나타났다.

      한편 2000년 이전 북한 당국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북한에 대한 특별한 지원이 없자 김대중을 곱지 않게 봤다. 당 간부들은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뭐 특별한 게 있을까 했는데 그 놈도 같고 같네”라고 말하며 노골적으로 실망을 나타냈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IMF사태를 수습하느라 대북문제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김대중 정부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북한 당국은 김대중을 한 번 찔러보기로 했다. 그래서 도발한 것이 1999년 6월에 발생한 1차 연평해전이다. 비록 북한군이 호되게 얻어맞고 도망쳤지만 국민의 정부가 정상적인 정부라면 단호한 대응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그와 관련하여 북한을 크게 비난하지 않았고 이는 북한 당국에 ‘김대중은 역시 다루기 만만한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즉 김정일은 ‘김대중과는 말이 좀 통할 것’이라는 타산을 했고, 이는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노벨상을 좀 타보려는 한 노인의 명예욕과 코드가 맞았다. 두 사람의 타산대로 6·15회담은 두 김 씨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김대중은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는 동시에 노벨상을 탔고, 김정일은 김대중으로부터 받은 달러를 체제유지의 수단으로 잘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이득을 본 사람이 있으면 손해를 본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럼 6·15회담을 통해 손해 본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남한 국민과 북한 주민들이다. 남한 국민은 세금을 내서 김정일 정권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꼴이 되었고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 정권의 회생(回生)으로 자유에 대한 희망을 빼앗겼다. 특히 북한 지식인들과 대학생들 중에는 6·15회담 후 김정일 정권의 통치력이 강화되는 것을 체험하면서 김대중에 대해 증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000년 4월 필자는 뜻이 맞는 대학생들과 반체제 단체를 만들었다. 북한에서 반체제단체를 만드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를 희생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 그러나 우리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북한당국의 종말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북한 상황은 장작더미에 기름까지 부어진 형국이었다. 불씨만 있으면 북한 전역이 혁명의 불길에 휩싸일 수 있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루마니아에서처럼 시민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우리가 그 불씨가 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대중이 평양을 다녀간 이후 북한의 상황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실제로 김대중의 평양방문 이후 북한당국의 통치력에는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당과 보위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의 주민통제가 더 심해졌고 북한체제는 점차 안정되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에서 보낸 쌀과 물자로 인민군의 보급을 개선하는 한편 인민군 사병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주민들에 대한 인민군의 약탈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전기공급 상황도 조금 개선되었고 철도사정은 많이 좋아졌다. 2000년 이후 북한은 철도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여 수많은 객차들이 생산되었으며 운행시간도 대폭 단축되었다. (2000년 이전에 20일이 걸리던 평양-청진 간 운행시간은 3-4일로 단축되었다.)
      또한 김정일은 2000년 이후 주요 공장, 광산 등에 많은 달러를 주면서 경제회생(回生)을 시도했다. 핵무기 개발이 2000년 이후 활성화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한편 국경경비대에 대한 통제도 엄격히 강화되어 북한주민들의 대량탈출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철통같은 국경 경비를 믿고 북한당국은 2000년 이후 “생계형 탈북자들은 용서해주라”는 아량까지 베풀었던 것이다. 권력기관의 강화와 더불어 북한 전역에서 울리던 총소리도 많이 사라졌다. 굳이 총소리를 내지 않아도 북한 사회를 통제할 수 있다고 북한 당국이 타산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김대중이 평양을 다녀간 다음 북한당국은 기세등등해서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북한 주민들과 지식인들의 자유에 대한 희망은 식어갔다. 많은 남한 지식인들이 당시의 햇볕정책이 아니었다면 북한이 붕괴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천만 명에 달하는 북한의 ‘떼거지’들이 남하(南下)하여 남북이 공멸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는 말처럼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오히려 필자는 당시 김정일 정권이 붕괴되었다면 북한 ‘떼거지’의 남하보다는 혼란상태의 북한에 대한 미국, 중국 혹은 유엔의 신탁통치가 더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북한 지식인들은 미국이든 중국이든 누가 신탁통치를 하더라도 김정일의 독재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북한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한국에 흡수되기보다는 유엔의 관할 하에 있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결국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6·15회담은 (남한에는 어떤 이익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북한 주민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한편 한반도 긴장의 핵심은 북한 핵문제이며, 북한 핵무기는 김정일 정권의 체제유지의 수단이다. 김정일 정권이 김대중에게서 받은 돈을 핵 개발에 사용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가 목적이라는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한반도 긴장 악화를 조장한 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만이 평화의 사도이고 북핵문제가 미국과 이명박 정부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과연 뇌(腦)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김대중의 평양방문과 소위 ‘6·15공동선언’은 본질에 있어서 과거 북한정권의 비밀지원에 대한 김대중의 보답행위이다. 김대중은 “내가 너무도 슬프고 한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옷소매에 눈물이 떨어질 때 내 손목을 잡아주던 사람의 은혜를 절대 잊지 못한다.”(김대중 잠언집 ‘배움’ 중에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대중에게 있어서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피해 해외를 전전하던 그 ‘한 많던’ 시절 자신의 손을 잡아준 김일성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겠는가. 김일성 생전에 힘없는 야당 지도자로서 김일성의 은혜를 갚지 못했으니 대통령이 된 후에 죽은 김일성의 아들에게 신세갚음을 한 것은 인간적인 도리를 지키려는 행위라고 좋게 봐줄 수도 있다. 김일성의 아들이 체제위기와 경제난으로 인해 가장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때 평양을 방문하여 남한의 지원을 약속하였으니 이는 김대중이 가장 어려울 때 도와준 김일성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필자는 김대중이라는 한 인간의 인간성에 대해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궁지에 빠진 김정일을 도와준 것이 ‘인간의 도리’였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그의 인간성에 대해 필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그는 개인의 신분으로 신세갚음을 한 것이 아니다. 또 신세갚음을 하려면 자기 주머니의 돈을 꺼내주든지 할 노릇이지 왜 국민의 세금을 털어 적장(敵將)에게 가져다 주어야만 했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아무튼 북한 당국에 대한 김대중의 신세갚음을 그의 업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입이 쓰겁다. 오히려 필자는 김대중이 원했던 통일이 어떤 통일이었을까 참 궁금하다. 6·15공동선언 2항에서는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북한의 소위 ‘연방제 통일 방안’이라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점진적 적화통일 방안이다. 한편 대한민국의 통일방안에서 말하는 연합제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한 연합제이다. 그토록 독서를 많이 하고 지식을 많이 쌓았다는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통일과 적화통일을 구별 못했다는 것이 의문스럽다. 지식은 많았으나 상식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상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적화통일에 동조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결 론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시기와 대상을 잘못 선택함으로써 남북관계의 궁극적 해결은 고사하고 오히려 북한당국에 남한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6·15선언, 10·4선언 촉구)만 쥐어준 꼴이 되었으며, 남한 정부가 남북협상에서 항상 북한에 끌려 다니게 하였다. 또한 ‘햇볕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김정일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킴으로써 한반도 평화는 더 위협받고, 북한주민들의 고통은 가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햇볕정책’이 대한민국의 이익이나 일부 정치인들의 이익의 측면에서, 또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는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북한주민의 이익과 북한의 개혁개방에는 장애물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햇볕정책’의 모티브는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김대중의 ‘햇볕’이 김정일 정권 이후의 북한에 비추어진 햇볕이라면 분명히 북한 주민에게도 이익이 되고 남북관계 개선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세갚음하기에 마음이 급했던 한 노인네로 인해 북한주민은 아직도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다.

      필자는 김대중을 비판하는 남한의 ‘보수’의 입장에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탈북자는 남한의 남남갈등과 이념투쟁에 끼어들 명분도 없고, 또 결코 관여해서도 안 된다. 영남출신도, 호남출신도 아닌 탈북자가 무슨 이득이 있다고 지역갈등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사실 탈북자들의 대부분은 북한에 있을 때 진보주의자들이었다. 탈북자들은 북한의 보수집단인 김정일 정권을 반대하고 북한의 개혁개방을 지지하는 철저한 진보주의자들이다. 하지만 탈북자들이 진보주의자라고 해서 김정일 정권을 찬양하는 남한의 이상한 ‘진보’와 타협할 수는 없는 일이다. 즉 탈북자는 남한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으로 봤을 때는 어느 편에 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필자는 남한의 보수와 진보를 다 존중하며 북한과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는 보수든 진보는 다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필자의 글이 ‘보수’의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오해하지는 않기 바란다. 단지 필자는 북한을 사랑하고 북한주민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북한출신의 한 사람으로서 김대중의 6·15가 적어도 북한 주민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업적이 아니라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굳이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6·15회담이 김대중의 ‘업적’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필자는 김대중의 ‘업적’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첫째, 북한의 핵 개발을 방조하여 “김일성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게 한 업적”이다. 둘째, 달러를 지원하여 김정일 정권의 통치력을 강화시킴으로써 ‘북한 사회의 안정’을 이루어낸 ‘업적’이다. 셋째, 북한주민들과 지식인들에게 한국 정부는 결코 북한주민의 친구가 아니며 자유는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한 ‘업적’이다.

      옛말에 ‘원수의 친구는 나의 원수’란 말이 있다. 북한 주민의 원수인 김정일의 생명을 연장시킨 김정일의 친구-김대중은 북한 주민의 원수이다. 그는 비록 죽었지만 그의 이름은 북한의 민주화와 북한주민의 인권을 외면한 거짓 민주화 투사로, 한국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김정일의 제1 협력자로 통일한국의 역사에 남겨질 것이다. 남한의 역사교과서는 몰라도 적어도 미래 북한의 역사교과서에는 “김대중은 북한 주민들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 북한 주민의 원수인 김정일을 협력하여 독재체제 유지에 협력한 자”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 가서 우리의 자손들은 두 가지 기준을 가진 ‘민주주의’와 ‘인권’은 가짜였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대중의 소위 ‘유훈’을 받든다고 하면서 그의 햇볕정책과 6·15를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 자신은 자신이 민주주의자도 인권투사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당신들이 정치인으로서의 생명 연장을 위해 그리도 몸부림치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동정한다. 하지만 당신들이 진실을 가리고 북한의 독재자에 대해 침묵하며, 역사의 수치인 6·15에 대해 찬양한다면 그만큼 당신들에 대한 역사의 심판은 더 준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기 바란다. 당신들이 고의적으로 이적행위를 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김대중을 추종했다면 어리석은 자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들의 이름이 ‘배신자’나 ‘어리석은 자’로 역사에 기록된다면 당신의 후손들은 얼마나 치욕스럽겠는가. 살아있는 오늘만 보지 말고 당신들이 죽은 후에도 이 땅에서 길이 살아갈 당신의 후손들을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한 시대에서 성공한 정치인이 되는 것보다 역사에 떳떳이 이름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필자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2009.9.15 조갑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