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안의 사회주의 -끝나지 않은 전쟁-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쥐덫’에서는 산장에 모인 사람들 중 누군가가 살해될 때마다‘눈 먼 세 마리의 쥐’를 조롱하는 동요가 등장한다.

    식칼에 꼬리를 잘린 채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눈먼 쥐들의 메타포는 바로 밀실에 갇힌 자들의 운명이었다.

    2011년, 우리 사회에도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라는 두 개의 덫이 복지에 눈먼 국민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 덫에는‘민주주의’라는 안전한 이름이 적혀 있다.

    더구나 그 안에는‘보편적 복지’라는 거부하기 어려운 미끼마저 걸려 있다.
    덫의 설계자는 자칭 대한민국의 진보세력이며 국민들에게 보내는 이 덫의 초대장에는 이른바‘복지동맹’이라 불리는 민주당과 야권대통합론자들의 서명이 박혀 있다. 최근 이 초대장에 남경필 의원을 비롯 몇몇 젊은 386 의원들이‘벤치마킹이 필요하다’며 이름을 넣었다. 

    올해 1월, 민주당과 야권 일각에서 벌어진‘세금 없는 복지’에 대한 때 아닌 논쟁은 바로 이 덫의 구조에 대한 논쟁에 다름이 아니었다. 보편적 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늘려야 한다는 ’증세론‘과 증세 없이 복지정책이 가능하다는 ’비증세 복지론‘이 맞붙었던 것.

    진보적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최태욱 한림대 교수가 민주당의 비증세 복지론을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며 한 일간지 칼럼을 통해 비판하자 민주당 이철희 전략기획위 부위원장이 ’서민들의 조세 저항을 피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아닌 정치가 우선‘이라고 맞받아쳤다. 당시 이철희 부위원장이 주장한 것은 바로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의 현실성 문제‘였다. 그의 주장을 되짚어 보면 결국 두 사람간의 논쟁은 교조적 사민주의와 유연한 사민주의 간의 국가복지 토론이었던 셈이다.

    자유주의로 위장한 사회민주주의     
     
     주목할 만한 점은 이 공방이 개인적 사견이었다기 보다는 소위 야권 내 ‘복지’라는 키워드에 대한 선점성의 공론이었다는 것. 한쪽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한쪽에서는 사민주의라는 형태로 전개되는 양상을 언론들은 ’유시민과 재야는 우클릭(진보적 자유주의), 손학규와 민주당은 좌클릭‘(사회민주주의)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양자는 이름만 서로 다를 뿐, 그 추구하는 바는 같다.

    그 핵심에는 경제를 시장이 아닌 국가 통제에 두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테제와 그렇게 함으로써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의 복지제도가 가능하다는 거짓말, 그리고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복지 쓰나미‘로  한나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하자는 선동 등이 논의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야권 내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는 지난 해 6·2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참패와 더불어 본격화됐다. 진보진영에 본격적으로 논의를 점화시킨 최장집 교수는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인 6월 11일, 경향신문과 장문의 인터뷰를 통해‘ 진보진영에서 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할 것’을 주문했다. 논지의 핵심은 한마디로‘한국의 보수진영이 원래는 진보적 평등이념인 자유주의를 반공 이데을로기로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장집 교수가 진보적 자유주의 논의를 이끌어 내자 곧이어 민노당과 진보신당 등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논의에 가담했다. 지난 해 7월부터 연말까지 사민주의를 적극 옹호하는 <레디앙>의 이론가 김규항과 진보적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진중권 간의 논쟁은 결국 유시민으로 하여금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얼치기 입장을 견지하게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좌파 내에서 마저 금기시 돼 오던 ‘사회민주주의’논의가 비로소 본격적인 공론의 장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비판사학회 산하 사회민주주의정책연구회는 7월부터 9월까지 무려 9차례에 걸쳐‘복지국가에게 길을 묻다’라는 토론 대장정을 펼쳤다. 이 세미나를 주도한 유팔무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복지국가는 사민주의 이념의 결과물”이라며 “대안담론으로서 사민주의를 본격적으로 고민하지 않은 채 복지국가만 주장할 수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보건사회연구원이 올해 1월,‘복지국가로서 적합한 정치모델’에 대한 전문가 설문조사를 보면 72%의 지지를 보이는 한국형 고유모델을 제외하면 북구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가장 많은 지지(11%)를 얻었다. 영미식 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지지는 4.5%에 불과했다. 결국 한국형 고유모델에 대한 답이 없다면 사회민주주의는 복지정책에 관한 한 유력한 후보로 등장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사민주의와 다르다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대한민국의 고유한 복지모델을 창출할 수 있을까. 우려스러운 것은 최장집 교수가 고전적 자유주의가 주장하는‘만인 평등’개념을‘경제적 수혜의 평등’으로 둔갑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좌파의 자유주의는 보수진영 해체용

    “고전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는 구분됩니다. 자유주의는 어떻게 정치권력을 제도화하고 인간의 자유·평등을 구현할 수 있느냐는 이론입니다. 로크, 몽테스키외 등은 자율적 시장경제를 지지·옹호한 적이 없어요.”최장집 교수의 주장이다.과연 그럴까.

    자유주의에 관한 한 가장 정통적 이론을 견지하고 있는 ‘한국 하이에크 소사이어티’의 조동근 회장(명지대 사회과학대 학장. 경제학)은 그러한 최장집 교수의 주장을 한마디로 ‘잘못된 것’으로 평가한다. 조동근 교수는 자유주의의 평등개념은 “공의(公義)를 위한‘불편부당’(Impartial)”이라고 반박한다. 즉 치우침 없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득이 높은 사람에게 세금을 더 거둬 소득이 낮은 사람의 호주머니를 채워주는 것이 어떻게 평등한 겁니까? 경제적 사후 평등이라는 것은 자유주의원리로는 실현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경제적 평등이 존재한다면 경제활동에 참여할 기회의 평등이겠지요” 조동근 교수의 이야기다. 그의 말이 맞다면 최장집 교수의 진보적 자유주의는 진보가 아니라 퇴보다.

    최장집 교수는 또 존 로크 등 고전적 자유주의론자들이 언제‘자율적 시장경제’를 옹호했느냐고 반문한다. 이에 대해 조동근 회장은 ‘존 로크는 개인적 자유 실현을 자유주의의 가장 큰 목적으로 보았고 그 수단으로서 사적 소유와 자발적인 교환체계를 지지했다’고 다시 반박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려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의 이익을 최대한 유지하려는 진보적 자유주의 또는 사민주의는 평행선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최장집 교수는 이 두 개의 평행선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간단하게 속칭 민주화(?)시켜 버린다. 최장집 교수의 주장을 좀 더 들어 보자.

    “한국 현실을 볼 때 자유주의는 진보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정치적 힘으로 조직·실천하느냐에 따라 사민주의 내용까지 포괄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 그동안 보수파들이 자유주의 이념의 핵심 요소들 즉 법의 지배, 법 앞의 평등, 인간 평등사상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최 교수의 주장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법의 지배, 법 앞의 평등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보 진영이 사회민주주의 마저도 수용하면서 자유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진보는 과연‘다행스럽게도’법을 잘 지켜왔다는 이야기인 걸까. 그리고 최 교수의 주장처럼 자유주의가 사민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걸까. 진정한 자유주의가 그 어떤 이름으로든 사민주의를 포용한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최 교수의 진보적 자유주의 담론이 가진 목적은 바로 ‘대한민국 보수 진영의 해체’라고 해석할 도리 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펼치는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진중권과 유시민.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자유주의와 거리가 먼 사회민주주의에 가깝다. 보수주의 이론가 조나 골드버그는 이러한 좌파적 자유주의가 파시즘에 기원하고 있다고 논증했다.

    스웨덴 복지모델 동경은 사민주의 때문

    현재 논의 중인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민주의에는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것이 있다. 바로 북유럽의 복지모델이다. 지난 1월 28일, 서울 마포구에 자리한 거구정이라는 한식당에서는 <복지국가 스웨덴> 출판기념회 및 ‘복지국가 스웨덴을 이야기 하는 저녁’이라는 좌담회가 열렸다.

    이날 국내 최대의 진보 싱크탱크를 자랑하는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이상이 대표는 “보편적 복지 도입 후 50년 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민주·복지국가를 건설한 스웨덴을 현재 복지국가 논쟁 중인 우리 사회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이 자리에서 비중 있게 나온 이야기들은 스웨덴의 복지모델이 아닌 대기업과 자유주의 보수에 대한 비난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은 복지 이야기를 하면 빨갱이로 몰고 잡아갈 정도로 국민을 방기했다”(이정우 교수),

    “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정치권력은 조중동이나 삼성과 같은 일부 대기업 등의 파워집단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민만기 녹색교통 사무처장),

    “보수 집단과 더불어 실제 생활에서 복지를 강하게 필요로 하는 사회적 집단을 정치적으로 활성화 시켜야 한다”(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이런 발언들의 배경에는 하나같이 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적개심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투여돼 있다. 그럴 정도로 스웨덴의 사민주의 복지정책은 위대한 것일까?

    올해 2월, 월스트리트 저널은 스웨덴의 국회의원 무카마르의 기고문을 실었다.
    ‘문제는 경제개혁이다. 바보들아’라는 제목의 글에서 무카마르 의원은 스웨덴의 경제성장이 복지가 아닌 자유주의 개혁 때문에 활기를 되찾고 있다고 썼다.

    그는 “ 외국인들이 스웨덴 모델의 성공을 잘못 이해하는 게 많다“며 ”1970년대부터 20년간 노동자의 실질 임금 소득 상승은 딱 1%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최근 스웨덴 모델이 각광을 받는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 행한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 때문”이라며, “1990년대 결단력 있는 자유주의적 정책을 사용한 이후 스웨덴의 실질 임금 상승률은 10년간 35%에 달했고 생산성과 삶의 질도 올랐다”고 밝히고 있다.

    또 “2010년 국민의 조세 부담률도 10년 전의 56%에서 45%로 낮아진 상태며 진짜 교훈은 여기서 얻어야 할 것”이라고 끝맺었다. 자유주의가 복지의 敵이라는 진보 진영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통제’라는 국가권력으로 지상 낙원의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보적 자유주의의 뿌리는 파시즘”

     민주주의의 실천과 완성이라는 진보적 자유주의가 사실 그 뿌리를 파시즘에 착근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바로 미국의 보수 이론가 조나 골드버그의 주장이다. 그가 2008년에 출판한 <Liberal Facism>은 뉴욕타임스 집계로 4주간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기고 내용도 충격적이다. 골드버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드로 윌슨 대통령(재임 1913~1921년)의 ‘위원회 정치’, 힐러리 클린턴의 국가에 의한 아동 양육, 유기농제품에 대한 열광 등은 모두 20세기 초 등장한 이탈리아의 국가사회주의(파시즘)에 닿아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골드버그는 파시즘이 다름 아닌 진보주의(Progressivism)로부터 시작됐음을 논증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대다수의 자유주의자들과 좌파가 진보운동에 동참하며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사실이 그의 서술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골드버그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항상 전체를 하나의 통일적 이상체로 보기 때문에 스스로 권위주의 정부를 지향하게 되고 통제와 간섭을 목적의 수단으로 삼는다고 분석한다. 골드버그의 이러한 주장은 워싱턴타임스를 비롯 각계로부터“지난 200년의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역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골드버그의 주장은 지난 노무현 정부를 떠오르게 한다. 수많은 위원회와 노사모라는 전위대 조직은 진보라는 이름으로 조직됐다. 청와대 내 언론이 통제됐으며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이 이뤄졌다.

    지난 3월 초, 진보를 자처하는 친노매체 <서프라이즈>에는 노무현 정부의 전 청와대 비서관 양정철 씨의 글이 대문글로 올라왔다. 그는 기고문에서“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을 미처 행사하지 못했다”라고 후회스러운 고백을 한다. 이러한 고백은 진보를 자칭하는 대한민국의 세력이 다음에 한나라당을 누르고 정권을 잡을 경우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지 충분히 예상케 한다. 진보적 자유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대한민국은 그들의 손에서 진정한 자유를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미래한국 392호)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前 KBS PD kalito7@empal.com